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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신앙 (요일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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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신앙 (요일 2:17)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숲 속 오솔길을 걸어가던 중 두 갈래의 길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뜻대로 갈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의 길을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지팡이를 중앙에 놓고 쓰러뜨렸을 때 지팡이가 왼쪽으로 쓰러지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쓰러지면 오른쪽으로 가겠습니다.' 할머니가 지팡이를 쓰러뜨렸습니다. 

그러자 지팡이가 오른쪽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마음은 왼쪽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다시 지팡이를 쓰러뜨렸습니다. 하지만 역시 지팡이는 오른쪽으로 쓰러졌습니다. 할머니는 다시 지팡이를 쓰러뜨렸고 여러 번을 거친 후에 왼쪽으로 지팡이가 쓰러지자 할머니는 '역시 하나님이 왼쪽 길로 인도해 주시는군.'하면서 왼쪽 길로 유유히 걸어갔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나아가겠다고 기도를 하면서도 내가 생각한 뜻이 아니면 다시 반복해서 기도함으로 끝내 나의 뜻대로 행동하지는 않는지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했습니다. "예, 가겠습니다"하고 아주 정중하게 쉽게 대답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아들에게 가서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했더니 이 아들은 자기가 무엇이 해야할 일이 있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못가겠습니다." 아주, 확실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에 생각하니 잘못된 것 같아 뉘우치고 포도원에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는 가겠다 하고 안가고 하나는 안가겠다 하고 가고, 이 둘 다 좋지 않습니다. 썩 좋은 것이 아닙니다. "가겠습니다"하고 가는 아들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포함한 전메소보다미아 지역을 떠나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그 곳은 하나님을 떠난 우상 숭배자들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할 땅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의미합니다. 

부름받은 아브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갔습니다.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75세로 중년기였습니다. 그는 하란을 떠날 때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지체함이 없는 신속한 행동을 보였습니다(갈1:15-16). 이 위대한 순종이 아브람 신앙의 특징입니다. 그가 하란을 떠날 때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도 동행하였습니다. 

아내인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람은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앞서 언약하신 대로 다시금 하나님의 기업의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그 기업의 땅이 바로 가나안인 것을 밝히십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는 근본 사상이 되었으며 출애굽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신 후에 아브람은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가 제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의 표시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이며,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겠다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아브람의 신앙은 가나안에서 겪은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는 참 신앙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11:8)라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면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도의 극치요,신앙의 극치입니다.
참 신앙생활이란 나의 소원을 성취하려는데 있어선 안됩니다.

그것은 신앙 낭패의 태도입니다.  되도록 나의 뜻,나의 소원,내 설계도는 버려야 합니다.
내 소원을 성취하려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천재라도 나의 판단은 부족할 뿐이므로 나보다 더 완전하시고 나를 진정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기도하는 것이요,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기도의 극치는 겟세마네에 들어가 예수가 되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하나님만 바라고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나님 견해 대신 자신의 하찮은 계획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은 헛되이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자기 천성이 좋아 하는 대로 행동하거나 자기의 지혜로 하거나 주위 환경이 끌고 가는대로 끌러가선 안됩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일이 중요합니다. 무슨 일에 몸을 맡기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의 발 아래서 ’나의 예수님,내성질,내 견해,나의 자연적 활동을 온전히 포기하고 오직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 만을 위해 이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때문에 주님과 일치하려고 하옵니다”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모든 염원,계획,일체의 동경을 끊임없이 예수님 곁으로 올라가게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마음의 절대 주로 임하셔서 주권을 행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 친히 내 손을 잡으시면 내 가는 길의 진보는 지극히 빠르고 효과적입니다.
주님 친히 내 영혼 안에 계셔서  더불어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온전히 자신을 일임하면 뒷일은 예수님께서 모두 맡아 깨끗히 차리해 주십니다.
위대한 일이란 내가 계획한 일이 성취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소유하고 계시는 그 무한한 보화를 이해하고 그 권능을 얻는 일입니다.

순종형의 인물에게는 일일이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지시가 임합니다.
주기철 목사는“사람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의 경우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편으로 우편으로 지시하는데도 사람의 뜻은 좌편으로 좌편으로만 고집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경우 사람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만 절대복종하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사람의 뜻은 사는 길 갈지만 결과적으로는 망하는 길이요 하나님의 뜻은 얼른 보기에 망하는 길 같으나 복의 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일 어느 작은 마을에 드보라라는 가난한 소작농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워낙 가난한 데다가 2년 동안의 가뭄으로 인해 남은 것이 전혀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주인이 소작까지 내놓으라고 하는 충격적인 소식까지 받았습니다. 앞날이 캄캄해진 그는 식구들을 불러 모으고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를 '주님, 저희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저희의 길을 인도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도를 끝나자, 그들이 기르던 새가 창문에 매달려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창문을 열자 새가 들어왔는데 그 입에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알고 그것을 팔아 쓸려는 유혹을 받았지만 드보라는 자기 욕심을 과감히 버리고 그 반지의 주인을 찾아서 수소문해 보았더니 그 지역의 부자가 반지를 잃고 사방으로 찾고 있었던 것을 알고 즉시, 돌려주었더니 그 부자는 너무나 고마워하면서 고마운 답례의 표시로 집과 땅을 마련해 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깊이 일치해 살고 그 뜻만 헤아려 따르는 사람은 그 광명 아래서 살 때,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생관,새로운 가치관,새로운 복의 관념으로 사물을 보게 됩니다.
인생관과 가치관이 일변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우리의 의지들 일치시킨다는 것은 풍성한 초자연적 결실의 원천인 동시에 깊은 내적 평화의 기초가 됩니다.

우리 마음 안에 고요한 안정과 확신을 획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완전히 맡기는 일,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아무 것에도 아음이 애착하지 않는 일입니다.
모든 면에서 주님과 일치하려 하여야 합니다. 내면적 제욕(制欲)이 모자라면 자기 마음의 움직임이나 신체의 본능적 충동도 제어해내지 못합니다.
자아의 개성이 너무 강하면 신인합일,일치를 이루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일,그 자체가 예수님의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의사와 행위는 완전히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 절대신뢰를 드릴 수 있는 이는 예수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만이 예수님의 유일한 목표요,최대 기쁨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뜻은 완전히 포기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의 소원과 노력은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바로 알고,자기의 뜻과 자기의 계획은 사정없이 버리고,하나님의 뜻을 절대복종하여 따르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첫째 의무는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만 사랑하고 주와 일치하는 생활을 하는데 있습니다.

예수 믿는 목적은 인간인 내 뜻,내 소원을 성취하려는데 있지 않습니다.
신자의 목적은 완전히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께 절대 신뢰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명한 하나님 현존과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면서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고 동행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매일 매일 시시각각 하나님 안에서 호흡하고 걸음걸음 그리스도처럼 걷고 신앙과 순종으로 정성을 다하여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정성을 다하여 살고 오늘 하나님을 만나려 해야 합니다. 유일한 현실인 현재에 오늘 나의 삶에서 내 뜻을 버리고  열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 그 뜻에 우리의 의지들 일치시키는 것만이 우리 잚을 그르치지 않고 초자연적 결실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참 신앙생활은 나를 완전히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과 일치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며 거기에 자신의 삶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디로 이끄시든지 그것에 마음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고자 할 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아마도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인생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행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것입니다. “잘못된 질문을 하면 잘못된 답을 얻는다”(게인스 도빈스) 하기도 합니다. 항상 틀린 답만 나올 때 우리는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우선 답을 찾기 전에 과연 내가 올바른 질문을 하고 있는지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는 단순히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올바른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일단 파악하면 나는 내 인생을 하나님께 맞출 수 있습니다. 초점은 내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목적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향한 뜻을 가지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하고 계신 일에 근거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모든 것이 허무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만이 신적이며 불후의 가치를 지닙니다. 모든 인생은  태어나 본능에 따라 살다가 죽으면 그만입니다. 

그의 존재,그가 이룩한 업적,그의 기억은 모조리 허무한 것이요 망각의 과거로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인생 일생을 상실하지 않고 가치 있는 생활을 하려면 허무한 세상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과 일치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사 건건 하나님과 동행하려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숨결로 숨 쉬려 하여야 합니다. 만에 한가지라도 제멋대로 하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혼자 걸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정원에 대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몸소 대나무에 물을 주었습니다. 때때로 시든 잎이나 벌레 먹은 잎이 보이면 살짝 따주었습니다. 

그는 알뜰살뜰하게 대나무를 사랑했습니다. 오래지 않아 대나무는 밭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사랑스런 식물로 자랐습니다. 대나무는 주인의 은혜에 매우 감격하여 항상 어떻게 보답할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대나무 곁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내 사랑하는 대나무야, 이제는 내가 널 사용하려고 하는데 네가 원할는지 모르겠구나.' 대나무는 재빨리 대답하였습니다. 

'주인님, 저도 마침 당신이 키워준 은혜에 보답하려고 했는데, 어찌 원하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널 사용하기 전에 땅에서 찍어내어야…' 대나무는 주인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황급히 말하였습니다. '아, 주인님! 그건 어렵겠는데요. 여태까지 밭에서 내가 가장 높고 귀했습니다. 내가 모든 식물보다 크게 자랐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인님이 나를 찍어버려 땅에 가로놓이고 그들 밑에 구부리면, 나는 그로부터 다시는 곤경에서 헤어나는 날이 없을 것입니다. 

아, 주인님! 오직 이 일만은 안됩니다.' 주인이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를 본래의 땅에서 찍어내어 땅에 눕히지 않으면 너를 쓸 수가 없단다. 너는 내가 이전에 너를 재배한 목적이 무엇인지 기억하느냐?' 대나무는 주인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기 때문에 고통을 참으며 주인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주인님 뜻대로 이뤄지기 원합니다.' 주인은 곧 날카로운 도끼로 대나무를 찍어서 땅에 눕혔습니다. 찍을 때의 그 아픔은 비할 데 없었다. 그러나 대나무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기꺼이 참고 견디었습니다. (사막의 샘 / Mrs. 찰스 E. 카우만)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자는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삽니다. 참 그리스도인의 일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그대로 재연합니다.
매일 예수 안에서 살고 예수와 동행해 살고,예수 처럼 살고저 하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이요 하나의 예수요,예수의 화신입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나 함께 하며 고락을 함께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고 살라면 살고 죽으라면 죽고 예수께서 우시면 나도 울고….그것이 바로 예수와 일치하여 하나의 예수가 되어 사는 일입니다.
“나의 영적생활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단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자기의 계획,자기의 설계도만 보지 말고 저 하나님을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념에서 행하여야 합니다. 이것 만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기도도,일도,선행도,수업도,휴식도,무엇을 하든지 주님 사랑하려고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주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찾아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영광 돌리며 사명 감당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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