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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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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3) 
 
 
❚누가 정말 행복한 사람인가?

미국에서 살다 뜻하지 않게 갑자기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세계 최고의 팝스타로 5살 때 연예계에 데뷔하여 51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 3억장의 음반을 판매하고 어마어마한 명성과 돈도 얻었습니다. 바로 마이클 잭슨입니다. 남들은 다 그의 성공을 부러워했지만 그는 화려한 삶 뒤에는 아픈 과거의 상처가 자리 잡고 평생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아버지는 전직 기타리스트로 자신의 가족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줄 길은 오직 음악뿐이라고 믿고 9남매를 혹독하게 훈련시켰습니다. 잭슨 파이브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아이들을 훈련시키면서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폭력을 휘두르곤 했습니다. 

결국 마이클 잭슨은 아버지의 바람보다 더 성공한 팝 스타가 되었지만 그의 전 생애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수십 차례의 성형수술과 아동 성학대 등으로 얼룩져 불행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51세의 나이에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불행한 삶을 마치고 맙니다.

또 한 사람은 라이언 화이트(Ryan White)라는 소년입니다. 열세 살 때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받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혈이 잘못 되어서 에이즈에 걸린 것입니다. 병원의 잘못 때문에 억울하게 죽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도 원망 안하고 특히 의사들을 원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항상 밝은 웃음을 띠고 모두에게 친절했습니다. 오히려 염려하는 부모를 위로하며 날마다 기쁘게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언론을 통하여 전 미국에 전해져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어린이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었고 유명 인사들이 앞 다투어 이 소년을 방문합니다. 당시에 대통령이었던 레이건도 이 소년을 방문했고 앞서 소개한 팝 가수 마이클 잭슨도 이 소년을 방문해서 위로했습니다. 이 소년은 5년을 더 살다가 18세에 죽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기독교 잡지에 실려서 더욱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아버지는 죽어 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나는 아무 것도 너에게 해줄 것이 없구나. 이 아빠가 더 이상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 다오.”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아빠, 아니에요. 전 지금 많은 선물을 받았어요. 많은 선물을 받고 살았지만 누구도 아빠가 제게 준 선물처럼 좋은 선물을 준 사람은 없어요. 

아빠는 내게 천국 열쇠를 주셨어요. 예수님을 소개해 주었고, 교회에 나가 예수님을 믿게 해 주었고, 말씀을 통하여 영생을 얻도록 해주셨어요. 이보다 위대한 선물은 없어요. 아빠 고맙습니다.” 이 두 사람 중 누가 행복한 사람일까요? 

모든 명성과 부를 얻은 스타입니까? 아니면 허무하게 에이즈에 걸려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 소년입니까? 마이클 잭슨은 이 소년을 위로한답시고 찾아오기까지 했지만 정작 위로 받을 사람은 이 라이언 화이트라는 소년이 아니라 마이클 잭슨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나눈 대로 진정한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오직 내 마음 속 내면에서 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내 안에 주님이 계심에서 오는 것임을 말입니다.

❚가난한 자의 복

예수님이 팔복 설교에서 말씀하신 첫 번째 복은 이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여기서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본디 물질적인 가난을 뜻하는 말입니다. 돈이 없어 가난하고 궁핍한 것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분명히 ‘살림이 가난한 자,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라고 하지 않고 ‘심령이 가난한 자, 즉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내면적으로,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늘 무능함을 느끼며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게 됩니다. 누군가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내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가난한 자란 늘 자신이 무능한 사람임을 느끼며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 없이는 잠시도 살아갈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을 뜻합니다. 겸손한 마음, 갈급한 마음,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거지’가 되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우리말에는 ‘가난’하다는 말이 하나밖에 없지만 신약이 기록된 헬라어에는 두 가지 종류의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는 ‘페나스’라는 낱말인데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가난입니다. 그저 먹고 살기가 좀 어려운 정도의 가난을 뜻하며 비록 먹고 살기 좀 힘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먹을 것이 아예 없어 굶고 살아야 하는 수준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반면 가난을 뜻하는 또 하나의 낱말인 ‘프토코스’는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지지리도 가난하다”는 뜻입니다. 아예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살아야 하는, 구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의 그야말로 ‘거지’를 뜻합니다. 실제로 누가복음 16장 20절에 등장하는 ‘거지’ 나사로도 이 포토코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거지는 내 힘으로는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렵기 때문에 구걸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낱말은 내 힘으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고 전적으로 남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참 중요합니다. 인간은 본디 가난한 존재요 거지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먹고 살기 힘든 정도가 아니라 전적으로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예 전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심령이 부자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뭔가 내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능력으로, 내 힘으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자만한 사람들이지요. 반대로 심령이 가난한 거지가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지 깨달아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잠시도 살 수 없다고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자만심이 있을 리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된다는 것은 곧 심령이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말이나 소는 태어나면 곧바로 일어서서 제 힘으로 걸어가고 엄마 젖도 먹지만 사람은 안 그렇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는 제 힘으로 아무 것도 못합니다. 걷기는커녕 눈도 못 뜨고 고개도 못 가눕니다. 제 힘으로 몸을 뒤집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늘 엄마가 안아주고 젖을 먹여야 합니다. 제가 싼 똥 귀저기 하나 치우지 못합니다. 철저하게 엄마가 도와주어야만 삽니다. 그러니 심령이 가난한 자는 심령이 간난아이와 같아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잠시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심령이 부유한 자와 심령이 가난한 자

예수님은 이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해 누가복음 18장에서 잘 설명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또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바리새인이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이 바리새인의 행동을 좀 들여다볼까요?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더러운 세리와 같이 기도할 수는 없으니 따로 떨어져 혼자 기도하면서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즉 저 세리처럼 토색(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음)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더러운 인간들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제가 저 세리 놈하고 같은 부류가 아님을 감사드립니다.” 무슨 기도가 이래요? 어떻게 저런 놈하고 같은 인간이 아니라서 감사하다고 기도합니까? 바리새라는 말 자체가 ‘분리된다’는 뜻인 것처럼 이 바리새인은 자신이 세리처럼 더러운 죄인들, 타락한 인간들과 구분되는 의로운 사람임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도 잘한다고 자랑스레 기도합니다.

반면, 세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자세부터가 바리새인과 다릅니다.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죄인인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말입니다. 기도도 이 한 마디뿐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무슨 차이입니까? 바리새인은 전형적인 ‘심령이 부유한 자’입니다.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고 “나같이 예수 잘 믿는 사람 나와 봐” 하고 스스로를 과시합니다. “나는 저런 죄인이나 사이비 크리스천들과는 달라” 하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하나님이 별로 필요 없는 자입니다. 말로는 자기가 잘 믿는다고 하고 또 기도니 제사니 십일조니 하는 종교적인 의무는 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들어내고 자기 의를 과시하고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겉으로는 좋은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별로 필요 없는 자입니다. 반면 세리는 전형적인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더러운 죄인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나 같은 죄인은, 나같이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고 추악한 자는 하나님 없이는 못 산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훌륭한 크리스천인 바리새인이 아니라 흉악한 죄인인 세리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리의 기도가 어디선가 많이 듣던 말 같지 않습니까? 같은 누가복음 5장 8절에 보면 베드로의 고백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하셔서 고기를 많이 잡자 감사하다는 말 대신에 이 고백을 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의 기도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와 거의 똑같습니다. 게다가 세리가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자기 가슴을 치며 기도한 것처럼 베드로도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 어부 중에 자기가 최고라며 그저 물고기 많이 잡는 것만 유일한 삶의 목표인줄 알고 살던 베드로에게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베드로는 세리처럼 자신이 얼마나 가난한 자인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게 됩니다. 나 같은 더러운 죄인은 예수님과 감히 한 배에 타고 있을 수도, 가까이 있을 수도 없음을 깨닫고 자기를 떠나시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자신의 무능함과 죄인 됨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 바리새인처럼 가슴을 치며 우는 사람들, 베드로처럼 무릎을 꿇고 나를 떠나시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나는 죄인이라고 아무 것 할 수 없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라고 인정하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영적인 거지입니다. 영적으로 나는 완전 무능력자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영적 파산자들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나는 영적 파산자라고 인정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선고 받으면 그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영적인 거지, 영적인 파산자가 되면 하나님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내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내가 한 번 해보겠다는 심령이 부유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돕지 않으십니다. “그래, 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니 한 번 잘해봐라!”며 도와주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는 못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입니다.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무기력한 자입니다. 나를 도와주소서!” 하고 부르짖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역사하고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 뜻대로 날뛰며 복을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살던 야곱이 아니라 얍복 강가에서 환도뼈가 부러져 절룩거리는 야곱을 도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이스라엘 민족을 압제에서 구하리라”며 혈기 넘쳐서 애굽 사람을 때려죽인 모세가 아니라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구질구질하게 양이나 치며 살던 80노인 모세를, 하나님이 “내가 너를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시자 “나 같은 놈이 무엇인데 그런 엄청난 일을 하겠습니까?”(출 3:11)라고 뒷걸음질 치는 모세를 도우신 것입니다. 

제 힘 믿고 주먹질이나 하던 모세, 애굽 궁전에서 왕자로 40년이나 교육을 받아서 말도 청산유수로 잘하는 그런 모세가 아니라 늙어서 힘도 다 빠지고, 말도 잘 못하고, 손에는 양치는 지팡이나 하나 든 모세를 들어 쓰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갖 학식과 가문과 로마 시민권을 자랑하던 사울이 아니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라고 고백하는 못난이 바울을 도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난 할 수 있다고, 아직 나에게는 힘과 능력이 남아있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난 못한다고, 내게는 하나님밖에 없다고,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탕자가 자기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빈털터리 거지가 된 후에야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처럼,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심령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의 도우심만 전적으로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상급

그런데 이렇게 가난한 마음, 겸손한 마음,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 천국은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하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어떤 외적인 조건이나 공로가 아니라 철저하게 심령이 가난해서 늘 겸손하고 순수하며, 하나님만 의지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만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왜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습니까? 그것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부자들의 마음이 대개 교만해서 누구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만 믿고 의지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심령의 문제요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도 천국에 들어가기 원한다면 심령이 부유한 자가 아니라 철저하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장차 천국에 들어갈 뿐 아니라 이미 내 마음속에 천국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천국을 소유하고 천국 백성의 삶을 누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내 외적인 조건은 어떠하든, 내 외적 환경은 어떠하든 내 마음속에 이미 천국을 소유하고 천국의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나를 내 자신이 다스리지 않습니다. 내 생각이나 주장이나 능력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따르기에, 오직 그분에게만 순종하기에 이미 그는 천국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또한 천국은 부족함이 없는 곳입니다. 세상에서는 늘 부족함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천국은 하나님께서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곳이니 부족함이 있을 리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과 공급하심에만 의지해 살아가기에 이미 천국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이 천국을 소유한 복 받은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하실 때 이 말씀을 듣던 유대인들이 그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참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가난을 저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현상이 계속됩니다. 교회에서조차 부자는 축복 받은 사람이요 가난한 사람은 저주 받은 자라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것은 복 받은 사람이요 출세하고 성공하고 좋은 대학 들어간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지만 아픈 사람, 실패한 사람, 떨어진 사람은 저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지배하는 이상 우리가 진정한 복을 받은 행복한 사람이 되기 어렵습니다. 물론 저는 담임목사로서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 모두 부자 되고 건강하고 성공하고 잘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친다면 우리의 신앙은 저 절에 올라가 부처 앞에 시주 내고 부지런히 빌며 복을 구하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무당에게 푸닥거리를 하며 갓바위에 올라 자녀들의 합격을 기원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물질만능주의, 물신주의에 빠져 오늘도 돈이 최고라고 외치며 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그 답은 요한계시록 3장 17절에 나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이 말씀은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무척 부유했습니다. 부자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부자라고, 부유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부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혹시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은지요? 세상의 것들을 많이 소유했다고 자부하고 교회 안에서조차 그것을 내세우며 자랑하며 살지 않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야말로 진짜 거지다. 진짜 가난한 자들이다. 

왜? 자신이 가난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는 부자라도, 세상에서는 건강하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박수 받고 살지라도 내 마음에 천국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그는 진짜 거지입니다. 내 마음속에 주님이 안 계시고 그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는 진짜 가난뱅이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모두가 진정한 부자, 진정한 천국의 백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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