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으려는데 낙망 되십니까? (행 4:29~33)

  • 잡초 잡초
  • 273
  • 0

첨부 1


믿으려는데 낙망 되십니까? (행 4:29~33)


평안하셨습니까? 반가운 얼굴들과 함께 다시, 8월을 보내는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벌써, 가을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9월이 되면, 우리는 내년 2010년도를 준비해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는 말씀이 새삼스레 마음에 와 닿습니다(엡 5, 16). 

직역하면, ‘너희는 시간을 확보하라. 왜냐하면 날들이 악하기 때문이다’입니다. 세월은 ‘카이로스’를 말합니다. ‘시간이 제공하는 기회’라는 말인데, 기회를 아끼라(속량, 값을 치루고 사라)는 것입니다. 때가 악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의 시간들이 긴박할 뿐 아니라 악하기 때문에, 선하고 의롭고 진실한 일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여간 고군분투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 세계적인 축구 명문 클럽인 영국, 맨체스터 유나티드 팀이 경기할 때마다 가지고 있는 초미의 관심이 있지요. 박지성 선수가 경기에 출전하느냐, 하지 않느냐지요. 박지성 선수 자신은 물론이고, 그를 좋아하는 축구 팬들도 마찬가집니다. 이번 경기에, 박지성 선수가 뛴대? 안 뛴대?… 뛰고 안 뛰고는 누구 권한입니까? 선수, 자기권한 아닙니다. 100% 감독의 권한입니다. 

퍼거슨 감독이 뛰라할 때, 뛸 수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선수에게는 최고의 복이지요. 혹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도 전후반 90분 경기가 진행 되는 중, 언제라도 감독이 나오라고 하면, 如何間 뛰던 일을 즉각 중단하고 운동장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게 선수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축구선수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너 이번 개임에 나가서 뛰어라’ 하시면 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러 주지 않으시면, 몇 개임이고 벤치 신세 각오해야 합니다. 열심히 뛰다가도 ‘이제 그만 뛰고 나오너라’ 하시면 뛰던 일, 즉시 중단하고 벤치로 나와야 합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세월을 아낄 줄 아는 믿음, 우리 모두에게 요구됩니다.

★ 휴가 중, 책을 읽고 기도하면서 내내 제 마음을 사로잡은 것 한 가지는, ‘교회론’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물음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교회의 존재이유 하면, 주제가 너무 큽니까? 만일 그러시다면, 적용범위를 구체적으로 좁히면, 이 문제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쇼는 멈추고 사명을 다시 찾은 교회 하나가 있습니다. 미국, 에리조나 주 피닉스(Phoenix) ‘기쁨의 교회(Community Church of Joy)'입니다. Walt Kallestead 목사님이 담임목사신데, 목사님이 부임하실 때 그 교회는 불과 200명 정도 모이던 그저 평범한 교회였습니다(윌로우 크릭 교회의 Bill Hybels, 새들백교회의 Rick Warren과 교회를 찾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교회는 어떻게 세워가야 하는가?). 

그런 교회가 유명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기쁨의 교회 예배가 화려한 공연수준이었다는 겁니다. 그 공연에는 늘 관객이 가득했습니다. 공연예배가 좋아서 몰려드는 교인이 수천을 헤아렸고, 마침내 12,000명 출석하는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목사님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공연 같은 예배에서 목사님은 소비자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자신을 소진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 것입니다. 

25년 목회를 멈추고, 잠시 안식하면서 복음적인 교회들을 둘러보며 당신이 목회하는 교회를 진단해 본 것입니다. 결론은 기쁨의 교회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를 기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연예배를 감상하기만 했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겁니다. 

목사님은 안식하면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너무 죄송합니다. 제가 해 놓은 이 일들, 너무 죄송합니다.” 과감하게 이전과 같은 교회를 청산하고, 영적가지치기를 단행하면서, 예수 안에서 열매 맺는 교회로 거듭나기를 시도했습니다. 그러자, 공연을 기대하던 관중 같은 교인들이 다른 곳을 찾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12,000명의 교인 중 1/3에 해당하는 4,000명이 떠났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를 예배해라. 내 臨在로 들어와라. 내가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나다. 출석 인원이 아니다.”

남아 있는 뿔난 소비자 같은 교인들이 월요일만 되면, 목사님을 찾아와서 항의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떠나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겁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죠? 이전의 생동감과 흥분은 다 어디가고, 지금은 무슨 장례식 분위기입니다.” “월트 목사님, 아무래도 이제 은퇴하시고 다른 목회자를 들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친구들이 다 떠나고 있어요. 교회가 예전 같이 않아요.” “제 친구들을 교회로 불러오기가 꺼려져요. 음악도 엉망이고, 설교도 별로예요. 배가 가라앉는 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복음적인 건강한 교회를 위한 가지치기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가슴 에이는 아픔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 구경꾼들은 많이 떠났지만, 그러나 참된 예배가 그 자리를 메웠습니다. 그때까지 기쁨의 교회는, 교인들의 익명성을 보호해 주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인 삶으로 밀어넣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우리교회 공연예배에 한 번 와보라고 사람들을 초청했지만, 그때부터는 “당신이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라”며 초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까지는 “더 많은 사람을 우리교회에 오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그때부터는 “어떻게 하면 우리 성도들이 각자의 부름 받은 일터에서 교회가 되도록 훈련시키고, 능력을 입도록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공연 같은 예배로, 소비자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찾는 교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다운 교회되기 위해서, 가지치기하면서,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안에서/ 열매를 맺으려는 교회/되기를 꺼려합니다. 아픔이 크고, 더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교회▪신자 되기 원하십니까?

▶ 우리는 이쯤해서 우리가 예수 믿는 이유를 바꾸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 2008년도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에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발표했습니다(우리들의 자화상을 우리 스스로 조사해서, 치부를 발표한 셈입니다…). 그 조사에서 우리나라 국민의 18.4%만이 한국교회를 신뢰한다고 응답했습니다. 반면에 개신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힌 사람이 48.3%였습니다.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오늘의 한국개신교를 불신하고 있다는 이야깁니다.

그런가 하면 가장 신뢰하는 기관에 대해서, 50.3%가 시민단체를 꼽았고(1위), 없음이 19.2%, 그 다음이 개신교로 12.1%, 그 뒤를 이어 언론기관이 9.2%, 사법부가 8.1%, 국회가 1.1%의 응답을 얻었습니다. 국민들이, 사회 기관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불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 오순절 성령강림 후,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한, 사도행전 2장이 증언하고 있는 초기예루살렘교회와는 한국교회에 대한 오늘의 대사회적인 신뢰도에는, 확실히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사도행전 2장에 이어서/ 본문 사도행전 4, 32이하 말씀을 보십시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의 한국교회상에는 성령 충만했던 ‘초기예루살렘교회 공동체’가 가지고 있었던 ‘교회의 원상原象’(헬, 프로토스)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교회의 原象’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보니,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건물이나, 규모나 예산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는 ‘교회의 원상’을 회복하는 교회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 오늘의 교회들은, 소비자와 같은 교인들에게만 좋은 교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교회는 가지고 있는 경제적인 부와 성장의 힘을 이용해서, 1980년대 이후 90년대 중반까지 일었던 비교적 소박했던 교회건축 붐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초대형교회(메가처치)를 지향하는 붐이 일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곳곳에서 진행되는 신도시 개발과 재개발이라는 사회현상과 맞물려 진행되고 있습니다(몇 백억 수준이 아닌 천억을 훌쩍 넘기는 교회건축; 대단히 염려스러운 현상). 메가처치가 좋은 면도 있겠지만, 건강한 교회, 복음적인 교회가 되기보다는, 소비자 같은 교인들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교인이 돈이고, 규모).

여러분은, 왜 예수 믿으십니까? 복 받기 위해서이십니까? 그러시다면, 받고 싶으신 그 복은 도대체 무슨 복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복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을 구하십니까? 애통하는 자의 복을 구하십니까? 온유한 자의 복을 구하십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입니까?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입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입니까? 화평케 하는 자의 복입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의 복이십니까? 이 복이 아니시라고요? 그러면 무엇입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는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을 통해서 세속적인 복을 보장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 지, 안 계시는 지,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성공만 이룰 수 있다면. 이를 위해서,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무장하고 있는 비장의 무기가 있지요. ‘肯定的인 思考’라는 무기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라는 가치와 세속적인 성공가치를 추구하는 ‘맹목적인 신앙’과 깊이 결탁되어 있는 형태입니다. 믿으면 다 이루어진다. 병도 낫는다. 합격한다. 성공한다. 이런 식의 신앙 말입니다. 

오늘, 긍정적인 사고를 강조하는 세속적인 사회 가치, 마치 그것이 기독교 신앙인양 하는 데,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가만 보면, ‘난 할 수 있어’라는 긍정적인 정신을 성령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신뢰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우리 사회에 보편화 되어 있는 긍정적 사고와 자아성취의 가치를 마치 성경적인 진리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肯定的인 思考와 기독교 福音은, 절대로 같지 않습니다.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소위 말하는 긍정적인 사고에 기초를 둔 신앙, 믿음이라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음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치입니다. 그 단적인 이유로, 긍정적인 사고에는 ‘죄’라는 개념이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만사형통의 유사복음에 목을 매고 계십니까? 그 만사형통이 말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세속적인 부와 명예와 권력과 출세, 존재지향적이기보다는 소유지향적인 그런 유類의 복이 아닙니까? “당신에게 믿음만 있으면 다 이루어집니다. 당신의 믿음이 부족해서 받지 못한 것입니다. 더 열심을 내십시오.” 여러분, 이건 믿음도 아니고, 복음도 아닙니다.

어느 교회 기도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소위 말하는 영서(靈書)를 쓰시는 분입니다. 그 분이, 어느 장로님 부인 권사님이 암에 걸리셨는데, 하나님께서 고쳐주신다고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믿기만 하고, 병원에도 가지 말고, 그저 기도만 하라 했습니다. 그분의 말을 듣고 권사님이 기도만 했는데, 병 낫기는커녕 아주 고생하시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이 그 분을 고소를 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믿음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인생에 찾아오는 여러 가지 고통에서는, 결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통당하며 사는 것을 비정상적으로 생각합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뭔가 자신의 신앙에 큰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 합니다. 물론 우리가 잘못해서 겪는 고통,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고난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不義가 가득한 세상에서는 의인은 고통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고난을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라, 복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이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29 말씀 보십시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했습니다(사도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 초기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이 이룬, 예루살렘교회공동체의 ‘原象’에는 ‘예수님의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고난이라는 痕迹이 아주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보십시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함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 11, 24-28).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도 바울의 믿음은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바울처럼 믿음이 충만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이 왜 그런 고난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단 말입니까? 그가 당하는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던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세상이 내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울증하십니까? 절망감을 느끼십니까? 그리스도인도, 우울증에 빠집니다.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진들을 증언하면서 말씀합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선지자들…이들을 가리켜 말씀합니다(모두 만만찮은 삶을 삼).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였느니라”(히 11, 38).

♣ 휴가 중에, 귀한 모임 하나를 시작했습니다. 역사가 꽤 있는 교회, 목사님들 6분이 모였습니다. 우리 교단교회에, 크게 세 부류의 교회가 있는데 (1) 명성교회 스타일이 있고, (2) 온누리교회 스타일이 있고, 그리고 (3) 전통적인 장로교 영성을 지향하면서 신학이 있는 목회, 장로교 전통을 건강하게 계승하려는 교회를 지향하는 목회스타일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모임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여러분 고난 때문에 낙망하지 마십시오.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사는 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아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교회 예루살렘교회와 같이 교회의 원상을 회복하고 지향하는 교회 되게 하옵소서. 복음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 받고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비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