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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 (막 12: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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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아름다운 이유 (막 12:28~34)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 첫째는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지난 주일에 가장 사랑다운 사랑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사랑에는 3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이 조건이 없는 사랑이고 세심한 배려이고 상대방에게 민감함입니다. 이 사랑이 완벽한 사랑의 요소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이런 사랑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랑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또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기관 한사람이 예수께 왔습니다. 서기관은 당시 레위지파에서 배출되었는데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의 직무를 기록하고 성전수리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에는 율법학자라고 불렸던 사람입니다. 

그 서기관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계명 중에서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당시 계명이 모두 613가지나 되었습니다. “하지 말라”는 금지명령 법이 365가지로 일 년 365일에 맞추어 제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라”는 긍정명령 법이 248가지였는데 그것도 사람의 몸에 있는 뼈 조각 수에 맞추어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613가지나 되는 율법 중에서 어떤 법이 가장 큰 계명이냐고 따지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이 서기관도 예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29)”는 것이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 이 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31).”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계명들 중에서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계명이고 가장 고상한 언어이고 가장 깊은 정신이며 최고의 가치이고 최고의 이상입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 사랑에 이런 값이 있기 때문이고 뜻과 깊이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혼자서는 발휘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어떤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대상이 둘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사랑 

하나님은 사랑의 원천이시고 본질이시고 주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본질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30절에 몇 가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입니다. 그 말은 지정의를 다하여 하나님을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이를테면 “당신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것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즉 흔쾌한 신앙고백입니다.

또 “목숨을 다하여”입니다. 그 말은 적당히, 형편대로가 아닌 절대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목숨을 다하여”라는 말은 나를 부정하면서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나와 하나님 둘 중 하나를 택하여야 한다면 기꺼이 하나님을 택하는 선택이 목숨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또 “뜻을 다하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형식이 아닌 의미와 내용과 중심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형식의 대상이 아닌 뜻을 다하여 사랑할 대상이십니다. 그리고 “힘을 다하여”입니다. 물리적인 노력과 최선을 다하는 행동으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이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목적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여기에 훨씬 못 미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대부분 말로만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식적이고 조건적이며 핑계가 많습니다. 이것은 모두 생명력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이유든 흥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아닌 것은 아닙니다. 순교자들은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해서 순교한 것입니다. 그것이 힘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적당히가 너무 많습니다. 신앙의 세계에까지 적당주의가 들어왔고 형식주의가 들어와 있습니다. 신앙안에 형식주의 들어오고 적당히가 들어오고 타협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의 의미도, 내용도, 감동도, 떨림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그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인가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순교자들이 많습니다. 순교자들은 모두 “아닌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해서 고난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사랑도 그냥 사랑이 아니고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사랑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 

우리들이 이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것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수직적인 사랑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수평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고로 이웃과의 관계를 잘 이루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이루는 길이고 조건입니다. 이 두 관계를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33절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제물을 드림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가까운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부부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그 대상이 점점 부모로 형제들로 이웃들로 내 동포들로 넓어집니다. 그들은 모두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대상들입니다. 나의 가장 가까운 내 형제들도 사랑하지 못하면 우리들이 누구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순서입니다. 

먼저는 부부간에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부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내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이 이 사랑도 잘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본이 안 되니까 다른 것들이 안 되는 것입니다. 부부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사랑해요”라는 말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것이 잘 안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안 되느냐 하면 훈련이 안되어서 그렇습니다. “사랑해요”는 고사하고 “여보”라는 말도 못하고 살아가는 부부들이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여보”는 “같을 여” “보배 보”입니다. 여보는 “보배 같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합당할 당” “몸 신”입니다. 당신이라는 말은 “당신은 내 몸”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런 뜻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은 “여보이고 당신”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보 당신”만 감칠맛 나게 부를 수 있어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은 이웃사랑을 보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보이고 있는 것은 오직 나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균형을 잃은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몹시 흔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흔들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흔들리고 그리고 우리들의 가정이 흔들리고 직장과 사회와 교회가 다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내 인생까지도 흔들리고 내 삶까지 다 흔들립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두 가지 의무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의 의무 

하나는 “생존을 위해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생존하기 위해서 해야 하고 행복하기 위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또 우리들이 살기 위해서 사랑하고 사랑을 받기 위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상실된 곳에는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 자기 사랑입니다. 이 자기사랑이 강한 사람들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통곡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 분들이 대부분 자기들만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왜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깨닫고 보니 자기만 사랑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회하고 통곡하는 것입니다. 고로 내가 행복해지고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하고 그 다음에 점점 넓혀가며 사랑하는 것이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야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모아지게 됩니다. 사

랑도 받아본 사람이 누굴 사랑할 줄 알고, 용서도 받아본 사람이 누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맛본 사람이 누굴 사랑할 줄 알고 용서할 줄도 압니다. 사랑은 명령으로 결심으로 작심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초점되시는 그 분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만들어집니다. 불 가까이 가면 따뜻해지듯이 촛불 가까이 가면 밝아지듯이 사랑의 본체 되시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때 그 사랑의 자본을 공급받습니다. 그 자본을 공급받아야 누구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랑의 훈련”입니다.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다. 사랑은 짜릿한 것인 줄로 알고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는 것 인줄 압니다. 또 사랑을 멋있는 외모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사랑할 준비가 다 되었는데 준수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서 사랑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오해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데 그 사랑이 조건이나 외모 때문이면 그것은 사랑도 아닙니다. 그러다가 나쁜 면을 보면 곧 돌아서게 됩니다. 그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바바라 월터라는 유명한 저널리스트이자 미국에서 인기 있는 여인이 또 유명한 기자요 컴퓨터 전문가인 완벽한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 완벽한 부부가 결국 이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서로가 적합한 사람을 구하는 광고를 냈습니다. 신청 자료를 모아 컴퓨터에 넣고 분석을 해서 나와 가장 잘 어울릴 상대 10명을 뽑은 다음 또 그중에서 한사람을 다시 뽑았는데 마지막에 뽑힌 사람이 알고 보니 헤어진 아내였다고 합니다. 문제는 조건이 아니고 사랑입니다. 

사랑은 일방적으로 다가가는 것이고 일방적으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자상한 배려이고 민감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좋은 인상을 주도록 나를 훈련해야 합니다. 사람은 외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좋은 인상과 좋은 품성을 주는 일입니다. 외모는 얼마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좋은 인상은 오래갑니다. 좋은 품성은 시간이 갈수록 사랑이 깊게 풍겨납니다. 또 사랑은 상대를 좋게 보는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한쪽만 보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오해가 만들어지고 편견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보이지 않는 뒷모습도 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좋지 않은 부분을 더 좋지 않게 보지 않는 능력입니다. 또 사랑은 화해의 능력입니다. 사랑은 시련이 닥칠 때 진가를 발휘합니다. 그때 결별하거나 나누이거나 다투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싸우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원하는 바이고 우리 삶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싸우지 않고 살아가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차선으로 화해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을 만들어 가는 삶입니다. 고로 사랑은 훈련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에서는 당당했습니다. 그런데 집에만 들어가면 늘 2인자였습니다. 아내가 너무 강해서 한 번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늘 불만이었고 갈등이었고 좀 부드러운 여자와 살아보았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을 늘 가졌습니다. 아이들이 다 분가해서 단 둘이 살았습니다. 총각 때 어느 분이 충고하기를 아내를 고를 때 3가지를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고집 센 최씨, 곱슬머리, 뻐드렁니만 피하면 남편노릇 쉽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고집이 보통이 아닙니다. 이 분이 그 원인을 모르고 살다가 어느 날 잠을 자다가 옆에 누운 아내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것입니다. 

보니까 아내가 그 3박자를 다 갖춘 여자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기가 막혀서 웃었다는 것입니다. 웃다가 문득 이렇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저 여인에게 연단을 몹시 받은 결과 목회하면서 찾아온 모든 어려움을 아주 쉽게 극복할 수 있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 3박자가 내게 행복을 준 3박자로 해석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화해의 기술입니다. 이것을 잘못 생각하면 불행의 3박자이지만 이것을 잘 해석할 때에는 기가 막힌 은혜의 3박자가 되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라는 분이 네 가지 사랑을 말했습니다. 첫째는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 육체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사랑을 위해서 사람들은 사랑을 나눌 대상을 찾아 헤매고 다니다 일단 상대를 찾으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독점하려고 하고 결국 집착으로 변질됩니다. 그러다가 싸우고 갈등하고 나누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로스 사랑의 한계입니다. 

두 번째는 “스토르게의 사랑”입니다. 혈육 간의 사랑입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처럼 가까운 사람으로 한정되어 있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귀한 것은 즉각적인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필리아의 사랑”입니다. 친구처럼 정신적인 차원에서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사랑인 우정입니다. 네 번째는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상대를 차별하지 않고 변치 않는 사랑을 말합니다. 지루함이나 권태가 없는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황홀한 때가 있지만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황홀함이 사라지고 식어지고 곧 익숙해집니다. 그래서 감동이 사라집니다. 감동이 사라진 후에 미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아가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이 아가페의 사랑을 통해서 영원의 세계를 경험하게도 됩니다. 

이 사랑도 발전합니다. 처음 육신적인 사랑은 초보적인 사랑이고 자기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발전하여 혈육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발전하고 확대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더 발전하여 마침내 나와 우리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우정으로 더 깊고 더 넓은 사랑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다가 이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발전합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은 이렇게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무능하고 연약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원하십니다. 그 대표적 원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두 가지 요구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 사랑도 그냥 사랑이 아니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네 이웃 사랑” 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되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 말은 진정 네 몸을 사랑하듯이 그렇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랑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입는 사람도 아름답고 또 그 사랑을 행사하는 사람은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제물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가장 선한 제물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은 이 사랑이 결핍되어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한탄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사람들 모두에게 이 사랑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간에 갈등이 존재하고 원망이 존재합니다. 그 모든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사랑하는 일입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 때 우리 삶에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고 섭리가 이루어지고 우리 삶에 향기로운 결실이 맺히게 될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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