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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갈림길에서 (요 6:6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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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갈림길에서 (요 6:60~71)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오해와 갈등을 낳습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늘 관점과 이해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사람을 편견 없이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어렵고, 인간관계에서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컵에 물이 반쯤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모두 한결같이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이 반 밖에 남지 않았다’고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은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관점의 차이를 긍정과 부정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차이를 일으키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사람이 경험해온 삶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질에 대한 생각뿐 아니라 시간에 관한 개념의 차이도 사람들에게 존재합니다. 두 사람이 저녁 7시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한 사람은 7시 정각에 도착했고 늘 늦는 다른 사람은 10분 늦게 도착했습니다. 제 시간에 도착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버럭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늘 늦는 사람은 그 일이 그렇게 화낼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시간 지키는 것이 우선순위를 가지는 일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시간보다는 해야 할 일을 여유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한 습관이었습니다. 삶의 규칙이나 가치관이 서로 다르면 서로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관심이 서로 달라도 갈등의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남편은 TV에서 축구나 골프 경기로 먼저 채널이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내는 드라마를 보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사소한 관심의 차이 때문에 가정의 평화가 깨어진 경험이 있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경험이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손가락으로 셈을 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열 이상의 수를 이해시키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연수만을 아는 초등학생에게 음수, 곧 마이너스의 수를 이해시키기란 어렵습니다.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고비의 복잡한 마음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로 넘어서는 순간에도 난처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껏 자신이 알지 못했던 세계입니다. 보이는 것만 알고 그것에만 속해있던 사람 누구에게나 이해하기 힘든 고비가 됩니다. 영의 세계, 하늘의 세계가 있으며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규칙을 따라 살려고 마음먹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본문에도 그런 고비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말씀으로 가르치는 중이셨습니다. 백성들은 즐겁게 듣기는 했지만, 그 순간 백성들에게는 더 큰 배고픔의 문제가 말씀을 듣는 모두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배고픔이라는 물질의 문제, 육신의 문제가 예수님과 그들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러자 곧 예수님께서는 모두의 배고픔을 해결하시려고 빵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따르던 사람들이 배고플 때 오병이어로 먹이셨습니다. 육체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의 인기는 최고로 치솟았습니다. 육체적인 문제, 눈앞에 보이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면 무엇인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지도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시는 자기들이 형식적인 문제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은 바로 그 순간 조용히 자리를 뜨시고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 기도는 사람들의 욕망과 오해, 하나님 나라의 왜곡과 단편적인 이해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는 결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두가 원하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보고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과 너무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현실문제의 해결에서 영적인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생 목적,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목적과 그들의 목적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절을 택하시고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디로 피하시던지 민중들이 그를 뒤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오해의 피해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인기와 현실적인 기적에 관심을 두고 따라온 사람들이 제자들 중에도 많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5)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40)

예수님은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고, 자신의 피는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듣고서 제자들마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받아드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저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이들은 처음으로 경험한 세계,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이 담긴 메시지를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 입에서 탄식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요한복음 6:60)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힘들어 떠났습니다.

‘예수님이 좀 이상하다’, ‘예수님을 이해하기 참 힘들다. 누가 들을 수 있겠느냐?’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던 제자들도 이해하기 힘들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예수님이 펼쳐 보여주시자, 제자들은 곧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예수님이 이해하기 힘든 언어를 사용했을까요? 혹시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가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단어들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아주 구체적이고 쉽고 간단한 언어를 사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내가 곧 생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오리무중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영적인 세계가 물질적인 세계보다 더 크기 때문에 내 세계가 하늘의 세계보다 못함을 아는 것입니다. 또한 하늘의 세계를 주신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며 나의 창조주이신 것을 고백하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한복음 6:66) 

예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이해의 공백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이 예수님을 떠나가는 공간적인 공백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라가기 위해 직업과 가족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해할 수 없고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또한 지금까지 따라온 이유와 맞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됨을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냥 함께 있다고 동지가 아닙니다. 함께 걷는다고 다 친구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도 제자들과 대화와 소통의 단절이 있었습니다. 대화의 단절 자체가 두려운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부모와 자녀 간에도 대화가 단절됩니다. 심지어 부부 사이에도 단절이 생깁니다. 문제는 단절됨에도 굴하지 않고 무엇을 향해 함께 나가는가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소통의 단절이 생긴 것은 매우 충격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할 때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이 그의 곁을 떠난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함께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는 파멸로 끝납니다. 
함께하면서도 함께하지 못하면 결국 파멸로 끝납니다. 예수님을 떠날 사람은 그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사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예수님을 떠날 자로 가룟 유다를 지목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요한복음 6:70-71)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같이 있었어도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뜻대로 순종한 것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예수님을 제압하기를 원했습니다. 같이 있다고 다 대화의 상대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다고 다 들을 귀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신앙의 성숙을 가르치기 원했습니다. 제자들의 신앙이 향상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라고 스스로를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물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신앙의 초기,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던 처음에 여전하게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깊은 신앙과 교제의 세계로 이끌리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면서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나님을 알기 원하기보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선물과 축복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보이는 물질에만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할 영적인 존재임을 가르치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떡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적인 것보다 보이는 세계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의 기로에 서도록 도전하셨습니다. 
여러분, 신앙의 시작을 되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왜 믿기 시작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먹는 문제와 마시는 문제를 해결해주세요. 내가 입고 사는 문제, 물질적인 축복과 육체적인 건강함을 주세요. 내 자녀들 아프지 않고 잘 자라게 하시고 대학 입시에 합격하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신앙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렇게 드리는 기도가 나쁜 것일까요? 이렇게 구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구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육체의 건강함, 물질적인 문제를 다 아뢰어야 합니다. 이런 기도도 매우 소중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이 세상에서 복된 삶을 살기만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여기에만 머물러 있다면, 신앙은 아주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에만 머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다른 우상들과 다를 바 없는 현세의 복을 위한 분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기복신앙은 모든 것을 물질적인 복, 외면적인 복, 현세적인 복으로 가늠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물질의 풍요로움과 바꾸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물질의 어려움과 궁핍함 앞에서 신앙인의 도리와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뜨리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가 이런 상황에 머물도록 두시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요한복음 6:26)

우리의 신앙은 투자한 것을 돌려받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습과 유사한 것들을 자주 발견하곤 합니다. 우리가 애용하는 ‘곱절’의 축복은 자기가 정한 기준인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한 가지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곱절의 축복’을 달라고 구하는 것은 마치 투자한 것을 더 많이 돌려받겠다는 유치한 기복신앙과 같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셔서 신앙을 갈림길로 몰아가십니다. 그리고 결단의 순간을 주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허물고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더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멋진 신앙인으로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성숙한 신앙인, 고상한 신앙인으로 변화 시켜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쳐 줍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 
(이사야 32:8)

이 말씀에 ‘존귀하다’는 말이 세 번 반복하여 나옵니다. 존귀하다는 말은 ‘멋지다, 고상하다, 성숙한 품격을 보인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존귀해지기를, 물질적인 축복에 머물지 말고 영적인 축복으로 더 성숙해져가기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사귐을 나누는 신앙으로 성숙해가야 합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들을 때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자기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늘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지만,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습니다. 제자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수준의 신앙인이었습니다. ‘예수님, 먹을 것만 해결해 주세요. 예수님, 내 질병만 고쳐주세요. 그것만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바라보시며 보이는 물질에 집착하는 것을 넘어서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에 들어오기를 기다리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를 먹고 마셔라. 나와 함께 거닐어라. 나와 함께 뒹굴어라. 나와 함께 노래를 부르자. 나와 함께 영혼의 춤을 추자.’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은 다른 선물들보다 더 크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다른 축복보다 더 크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생명의 말씀을 시작하자 제자들마저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거절하고 공감하기를 거부하며 떠나가는 제자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열두제자를 향해서 물으십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 (요한복음6:67)

예수님의 안타까움과 슬픔이 담긴 말입니다. 예수님의 낙담과 절망도 느낄 수 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새로운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너희들은 바로 설 수 있지 않느냐? 너희들은 내 말씀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지 않느냐? 난 너희와 함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이끌어 가고 싶다.’

물질세계가 아닌 영적인 세계를 발견하고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질문을 했을 때 제일 앞장섰던 인물은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실수와 실패가 많았으나 예수님께 기쁨을 제일 많이 준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 순간 귀한 대답을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요한복음 6:68-69) 

그는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마음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물질적인 세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영적인 세계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많은 선물보다 예수님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이 거룩하신 분으로 느껴졌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큰 기쁨이었기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어디로 갑니까?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서 여기 계시는데 우리가 어디로 갈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주님과 함께 영적인 세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이것은 더 깊은 신앙, 더 풍요로운 신앙으로 이끌어 가시려는 예수님의 부르심과 이에 응하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와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아직도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세계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물질의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육체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건강을 주신 하나님,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처럼 물질의 세계에 멈춰서면 서서히 멸망으로 빠지고 말 것입니다. 결국 자기의 이익과 먼 예수님으로부터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실수투성이였던 베드로와 같을지라도 예수님의 말씀 속에 영적 세계의 문을 열어놓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영광 받아주시고, 하나님의 귀한 사명도 아름답게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불신앙과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에게 물질과 건강과 세상에서의 복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역사를 누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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