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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되고 변화를 이끌고 (요 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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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되고 변화를 이끌고 (요 4:1~42) 


1. “변화”

기독교가 추구하는 가치 가운데 하나는 “변화”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복음 안에 거하기 때문에, 즉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격과 살아가는 태도와 삶의 방법, 그리고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가 계속 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변화되었습니까? 그리고 그 변화는 지금도 여러분에게 계속 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과의 만남으로 그 자신이 변화되고,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을 그 변화의 자리로 이끌어 그들도 변화되게 만든 한 여인의 기록입니다. 그 여인에게 일어난 변화는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그녀는 왜 자신 만의 변화로 끝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까지 그 변화로 이끌었을까요? 이제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그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 주님을 만나 변화된 여인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후에 니고데모를 만나 ‘거듭남’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유대 지방으로 가셔서 요단 강 주변에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그러고서는 다시 갈릴리 지방으로 향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유대 지방에서 사마리아를 통과해 가는 길로서 그 길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부정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이 길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또 한 가지 길은 유대에서 사마리아를 우회해서 요단강을 건너 갈릴리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길은 멀고 또 험했지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이 길을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3, 4절에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은 특별한 이유로 사마리아 길을 이용하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왜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큰 불편을 무릅쓰고서라도 사마리아 사람을 피하려 했을까요? ‘사마리아인’은 BC 722년 사르곤 Ⅱ세가 사마리아를 점령한 후 각지에서 異 民族을 옮겨와 남아있던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을 시켜 태어난 혼혈인들의 후예입니다(왕하17:24~40). 비록 이스라엘적 요소가 종교와 문화와 생활양식에 남아 있었어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이스라엘 혈통으로 여기지 않고 이방인보다 더 적대시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유대인들이 그렇게 적대시하던 사마리아 지역을 예수님이 가셨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마리아 길에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방문하신 곳은 사마리아 성에 있는 수가라는 작은 성읍이었습니다. 이곳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유서 깊은 곳이었습니다. 야곱이 수가 성 근처의 땅 얼마를 원지인들로부터 매입하여 그 땅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창48:22).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곳에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에 요셉이 바로 이 땅에 매장되었습니다(수24:32). 

주님은 유대 지방에서 사마리아까지 걸어서 이동하셨습니다. 유대 지방에서 사마리아까지 여행하는 것은 그 길이 험하여 굉장히 피곤한 길이었습니다. 타는 듯한 사막과도 방불한 그 길을 긴 시간 걸어오신 주님은 상당히 피곤하고 지치셨습니다. 그래서 잠시 쉬기 위하여 우물가에 앉으셨던 것이죠. 그러자 제자들은 음식을 구하기 위하여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긷기 위해서 그 우물로 왔습니다. 그 시각은 제 6시, 즉 정오였습니다. 이 시간은 매우 더운 때이기 때문에 중동 지역 사람들은 거의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요즘 아랍권이나 스페인 등지의 ‘시에스타’처럼 공식적인 낮잠 시간은 아닐지라도 그 비슷하게 여겨지던 시간이었지요. 그런데도 이 여인이 다른 사람들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그 뜨거운 시간에 우물을 찾은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싶었던 사정이나, 남들에게 숨기고 싶고 감추고 싶은 것이 있었는지라, 당시 동네 뉴스가 가장 빨리 전파되던 우물가, 동네 여인들이 모여 온갖 이야기를 다 주고받던 그곳을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 시간에 우물을 찾은 것입니다. 

여인이 그 시간에 우물을 찾았을 때, 먼저 그곳에 와서 앉아 쉬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 주님이지요. 긴 여행에 피곤하고 목이 말랐던 주님은 마침 물을 길러 나온 이 여인에게 물을 떠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비꼬는 듯한 말투로 주님께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9)” 목이 마른 나그네가 여인에게 물을 구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인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부정하게 여겼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그릇을 함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그들과 접촉하면 부정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여인은 주님을 향해 비꼬는 듯 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녀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 이때까지 마실 물에 대해서 대화를 주고 받던 주님은 주제를 영적인 차원으로 전환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과 그리고 지금 그녀와 대화하는 자신이 누구인 줄 안다면 도리어 그녀 자신이 예수님에게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일상적인 것을 통하여 영적인 진리를 전하는 우리 주님의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은 나에게 이 우물 물을 줄 수 있지만, 나는 당신에게 이 우물 물보다 더 필요한 하나님의 선물, 영원한 생수를 줄 수 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그 여인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생수를 영적인 의미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거저 마시는 물로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여인의 생각은 물을 준다는 것에 한 단계 발전했습니다. 가르치는 선생님이 훌륭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녀 역시 아주 똑똑한 여인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물을 주신다는 말에서 그녀는 지금 이 낯선 남자와 자신이 만난 우물이 조상 야곱이 준 것임을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에게 ‘후손들에게 이 우물물을 준 야곱보다 당신이 더 위대하단 말입니까? 우리의 조상 야곱이 준 이 우물물보다 당신이 준다는 그 물이 더 나은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왜 자신이 제공하는 생수가 야곱이 준 우물물보다 나은 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야곱이 준 우물물은 마신 후 얼마 있지 않아 다시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는 한 번 마시면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물은 그것을 마신 사람의 속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준 우물물은 일시적인 갈증은 해소시켜 주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생수는 영원한 만족을 줄 것입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정말 그러한 물이 있다면 자기에게도 그 물을 달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여인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물이 어떤 신비한 효능을 가진 샘물이라고 착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은연중에 그대로 노출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 ‘사람들 눈치 보며 물 길으러 오는 것을 끝낼 수 만 있다면 ….’ 그런 생각을 비추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영적인 상태를 고백한 것입니다. “목마른 내 영혼 ….” 

여인이 자신의 문제와 그 영혼의 갈증을 드러내자, 주님은 그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고 사뭇 엉뚱한 듯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그녀의 가장 은밀하면서 핵심적인 것을 건드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남편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애매한 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고 동거 중이었기 때문에 ‘남편이 없다’는 말은 법적으로는 맞지만, 실제는 동거남이 남편구실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녀가 감추고 싶었던 것, 특별히 생전 처음 만난 예수님에게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18)”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여인의 상황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사회는 쉽게 이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랍비들은 율법을 해석하여 최대 3번까지의 이혼은 허락하되 그 이상은 금하고 있었는데요. 사정이 어떠했든지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었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비난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고대 사회의 여자라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정상참작도 가능합니다. 

당시 사회는 여자 혼자 살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경제와 사회 전반을 남성이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자 홀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길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 살기 위하여, 외롭고 허전해서, 자식이 없어서 등의 이유로 변명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럴지라도 여섯 번째 남자와 산다는 것은 아주 특이한 경우입니다. 본인도 이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피하여 이렇게 남들이 움직이지 않는 시간에 우물로 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녀의 문제를 피해가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단도직입적으로 그녀의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녀가 구원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려는 의도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여인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어떻게 오늘 처음 만난 이 낯선 사람이 나에 관해 이렇게 소상하게 알고 있단 말인가?’

여인은 자신이 우물가에 만난 이 남자가 일반 사람이 아니라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눈치 채었고, 그러자 갑자기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이 첨예하게 갈등하고 있던 <예배 장소>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질문했습니다. 그녀가 갑자기 주님께 이러한 질문을 던진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비범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되자 평소에 궁금하게 생각했던 문제를 알고 싶어서 질문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주님께서 자기의 은밀한 것까지 다 알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이야기의 초점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하여 이러한 질문을 던졌을 수도 있습니다. 

여인이 물은 <예배 장소 문제>는 당시 사람들에게 결코 간단한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주전 536년 경, 바벨론에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성전을 재건축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사람들도 그 일에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만,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거룩한 성전 건축에 참여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을 대적했고, 또 성전 건축을 여러 방법으로 방해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 자기들의 성전을 짓고 그곳을 예배 장소로 선포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근거가 성경에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창 12:7)과 야곱(창 33:20)이 이곳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으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한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신 11:29, 27:12). 

또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산이었으며,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난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근거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만이 유일한 성전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과 끊임없이 논쟁을 벌여 온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예배 장소에 대해 어느 편도 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세상에 온 이후로는 예배드리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이 성전이시기에 장소에 세워진 건물인 성전의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든 곳이 예배 처소이고, 주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이 주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는 이들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더 중요한 것은 예배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진리의 말씀대로 드리는 예배, 그리고 성령의 임재와 감동으로 드리는 예배가 새 시대의 예배라고 여인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에 관한 예수님의 결론적인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기대했던 만족할만한 결론을 얻지 못했다고 여겼든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25절,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즉 여인은 예수님께서 결론을 내리셨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가 오시면, 그가 이 모든 문제를 분명하게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여인이 메시아에 대해 언급하게 되자, 주님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순간을 이용해서 자신이 메시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6절,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여러분, 이 여인이 충격을 받았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어느날 여전히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몰래 찾은 우물가에서 예고도 없이 만난 한 낯선 남자, 그렇게 감추고 싶었던 비밀을 마치 곁에서 본 것처럼 소상하게 알고 있던 사람,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어느 누구도 쉽게 해결하지 못했던 예배 장소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하신 바로 이 남자가 자신들이 그토록 고대해 온 메시아라는 사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여인은 이제 그가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말씀하신 내용 만이 아니라, 자신을 대하는 태도, 자신을 바라보시던 친정 아버지의 눈 아니 하나님 아버지의 눈길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더 놀라운 것은 대화의 시작에 “생수를 주겠다”라고 했는데, 그 분과 대화하는 가운데 뭔지 모를 시원함이 마치 얼음물을 마신 것처럼 자신의 온 몸으로 퍼져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마치 수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같은 마음과 영혼의 고속도로가 뚫린 것같은 느낌, 이제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가 부끄럽지 않을 것같다는 생각 ….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것을 느낀 여인은 놀랄 수밖에 없었고, 그 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는 제자들의 등장으로 끝이 났습니다(27). 그러나 그 순간이 그녀에게는 새로운 시작의 순간이었습니다. 메시아를 만났기 때문에 결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숨기고 싶었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줄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었던 정욕과 세상의 쾌락에서 자유하게 되었고, 이제는 세상을 향하여 당당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그녀를 그렇게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물을 긷다 말고 물동이를 우물가에 내버려두고 곧 바로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마실 물과 그 물을 긷던 물동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급하게 동네로 달려가는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녀가 얼마나 상쾌 유쾌 통쾌하게 변했는지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명예, 재물, 오래 사는 것, 그리고 세상의 행복이나 쾌락이 더 중요했었지만,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메시아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네로 달려가서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9)” 이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도리어 방탕한 삶으로 인하여 가까운 사람들에게 걱정거리였으며, 주변 사람들의 조롱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생겼습니다. 문제는 달라도 다들 아픔 몇 가지, 숨기고 싶은 것 몇 가지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예수님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 여인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반드시 일어나는 변화의 모습이지요.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내면과 밖으로 드러나는 변화가 있으시지요?

3. 다른 사람들을 변화의 자리로

마을로 달려간 여인은 동네 사람들에게 그 동안 자기가 행한 모든 일들을 다 알고 있는 한 사람에 관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방탕한 삶을 살던 여인이 갑자기 변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수가 성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여인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출생, 성품, 상황, 처지 등등 …. 그런 여자가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했던 행동과 말을 하니 사람들은 그녀를 주목하게 되었고, 주목하면 할수록 그녀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확신에 차고 당당한 것, 그리고 그 만큼 그녀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여인을 따라 마을에서 나와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왔습니다. 

여인의 인도로 주님께 온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님을 만난 후에는 스스로 주님께 요청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며칠을 더 머물면서 진리의 말씀을 더 전해 주십시오.’ 그래서 주님은 그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그 동안에 주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마리아 사람들은 처음에는 여인의 말을 듣고 주님께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스스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42절,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네 말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직접 주님의 증거를 들었고, 그 말씀을 인해 우리는 이 분이 진정한 세상의 구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도 처음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확신보다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아 교회에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주변에 있는 성숙한 성도들의 영향을 받아 예수를 믿거나 교회에 출석합니다. 그 다음에는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 수준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서 확신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확신이 없는 신앙은 진정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주님을 믿게 된 사마리아 사람들이 여인처럼 그들 스스로 주님이 메시아임을 시인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그렇게 주님을 직접 만나 시인하고 고백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영혼의 추수는 다른 사람의 증거로 인해 시작되나 자기 확신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여인의 증거는 그들을 예수님께로 오게 하는, 즉 믿게 하는 요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다른 사람의 증거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생겨나는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서 고백하는 것이 바로 이 믿음이고, 이것이 그들에게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4. 변화되고, 변화로 이끌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한 술주정뱅이가 있었습니다. 노름으로 재산을 날리고, 부인과 자식들에게 폭행을 일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저런 사람이 교회를 다녀 봤자 달라질 게 있겠어?” 하며 회의적이었습니다. 

어느 날 친한 친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무어라 가르치시던가?” “착하게 살라고 하기도 하고, 뭐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어.” 친구가 또 물었습니다. “그럼 성경은 누가 썼다던가?” 그는 당황하며 대답했습니다. “글쎄, 잘 모르겠는걸.” 친구가 여러 가지 질문을 했지만 그의 대답은 모두 신통치가 않았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도대체 교회에 다닌다면서 자네가 배운 것이 뭔가?”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 확실히 달라진 것이 있다네. 전에는 술이 없으면 못 살았는데, 요즘은 술 생각이 별로 나질 않아. 전에는 퇴근만 하면 노름방으로 달려갔는데, 지금은 집에 빨리 가고 싶어. 전에는 아이들이 나만 보면 슬슬 피했는데, 요즘은 나랑 함께 저녁식사를 하려고 기다린다네. 

그리고 아내도 전에는 내가 퇴근해서 집에 가면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내가 퇴근할 무렵이면 대문 앞까지 나와 나를 기다린다네.” 이 글은 정신과 전문의인 이무석 박사의 「30년만의 휴식」이라는 책에 나오는 실화입니다.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경험이나 자신의 신앙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만남을 경험한 사람의 행동과 생활과 대인관계는 다른 사람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가 추구하는 가치 가운데 하나는 “변화”입니다.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즉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변화되고 또 그 변화가 계속 일어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비밀이자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여인을 보십시오. 주님을 만나 변화되었습니다. 놀랍도록요!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녀가 또 다른 사람을 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이것이 주님의 복음 안에 거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제부터 이런 변화가 바로 여러분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변화로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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