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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증인 (행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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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증인 (행 1:6~26) 
 
 
본문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이 땅에 거하셨던 마지막 모습과 오순절 성령님 강림 이전 제자들이 증인으로 준비되어지는 마지막 모습을 보여줍니다.

승천 직전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6). 제자들이 사용한 용어 하나하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들의 철저한 오해를 보여줍니다. “회복”은 그 나라의 본질을 다윗과 솔로몬의 때처럼 이스라엘이 이방세계를 지배하는 정치적 왕국으로의 회복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그 나라의 범위를 국가 이스라엘에 한정시킵니다. “이 때”는 그 나라가 한 순간 세워진다는 생각을 반영합니다. 40일 동안의 집중 교육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해수준은 하나님 나라를 오해하고 있던 당시의 유대인들의 생각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배웠고 오랫동안 배웠는데도 이처럼 깨닫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그들의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시고 처방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7).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는 마음은 잘못이 아닙니다.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고난 받는 민족의 독립과 번영에 대한 그들의 포기할 수 없는 소원을 예수님은 충분히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회복의 “때와 기한”을 하나님의 권한에 맡기지 못하는 점을 문제 삼으셨습니다. 그 일에 마음이 매여 있는 한 주님께서 지금 명하시는 일에 성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이 땅에서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8). 제자들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부르셨고, 이 일을 위해 집중 교육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러한 ‘소명’을 알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부르셨는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위하여 일생을 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도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관심 갖지 않아도 될 것에 지나치게 집착했습니다. 반면 관심 가져야 할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관심이 없으니 오래 교육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일은 당시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라는 용어 자체가 소수에 의한 그들 당대만의 사명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지요. 이 말씀을 직접 듣지 않았던 다른 이름 없는 제자들도 증인의 삶을 살았음이 사도행전에서 곧바로 확인됩니다. 따라서 7-8절 말씀은 교회를 향한 명령으로 해석해야 마땅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잘 증시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체들은 그 사명을 중심으로 각자의 은사를 발휘하며 협력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그 구성원들에게 ‘행복’을 주는 곳으로 여기고 싶어 합니다. 행복을 바라는 마음은 잘못이 아닙니다. 사실 성도는 누구보다 극치의 행복을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근심과 걱정이 없고 눈물과 아픔이 없으며 부족함도 연약함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을 소망하며 사니까요. 

하지만 지금 이 땅에 사는 동안은 행복 추구가 나의 소명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행복이 중요하지만 그 일에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관심을 돌려서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생각하고, 그 소명을 위해 교회의 지체로서 나의 은사를 어떻게 발휘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 나라가 본질적으로 성령님의 권능으로 세워지는 영적인 측면이 있음이 함의되었습니다. 그 나라의 범위는 우주적이어서 땅 끝까지 미칠 것입니다. 그 나라는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고 제자들의 증인된 삶을 통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갈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그 나라의 왕으로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증인이 되도록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우리가 그 명령에 순종할 때 지금 여기에 예수님의 왕권이 작용하고 있음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존재함을 증시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이후에 곧바로 천당으로 옮겨지지 않고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그 목적이 성도의 삶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9-11절의 “보는 데서” “보이지 않게” “쳐다보고” “쳐다보느냐” “본 그대로”라는 표현들은 제자들이 보는 상황에서 확실하게 승천이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공개적 승천으로 예수님이 더 이상 육체로 함께 하시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재림하시기까지 천상에서 우주적인 왕권을 시행하실 것입니다. 

승천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육체적으로 계속 교제하려는 마음을 접고,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도록 준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도 계속 산위에 머물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자 천사들은 제자들을 책망합니다. 그들은 이제 산을 내려가 예수님의 재림이 있기까지 증인으로서 살아갈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12-14절은 120명의 제자 공동체가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사실을 기록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올바른 기도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기도하는 모습은 전혀 볼 수는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상황에서도 근심과 염려 속에서 졸기만 할 뿐 기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자발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기도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는 표현이며,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는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기도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준비 사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철저히 복종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맡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에 실현되도록 기도에 전념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성도의 기도가 공로로 작용해서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통해 당신님의 약속을 실현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없다면 그분의 약속이 우리 삶에 실현되는 것도 성령님의 권능의 역사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증인의 권능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주님의 명령을 따라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도하는 일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때를 막연히 기다리지 않고 기도에 헌신함으로 기다렸습니다.

15-26절은 기도 외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또 다른 모습을 기록합니다. 베드로는 시편 말씀(69:25; 109:8)을 인용해서 유다의 파멸을 예언한 성경말씀은 “응하였”으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는 일이 아직 성취되지 못했음을 말합니다. 원래 이 시편들은 원수들에 의해 고난 받는 무죄한 의인에 대한 예언으로 예수님께 적용되었습니다(요 15:25, 요 2:17, 롬 11:9-10, 롬 15:3). 베드로는 이 말씀에 비추어 유다를 “예수 잡는 자를 지로한” 즉, 예수님께 고난을 가한 세력의 앞잡이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기 위해 비어 있는 사도직을 보궐해야 할 필요를 제안했고, 나머지 성도들도 동의했습니다.

제자 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시행함에 있어서 먼저 기록된 성경 말씀에 철저히 의존했습니다. 자신의 체험과 인간성에 근거했다면 오랫동안 동고동락했던 동료를 사단의 앞잡이로 평가하는 일은 잔인하고 무정한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철저히 계시 의존적인 판단을 했습니다. 말씀에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은 부분은 건전한 상식을 사용하여 말씀으로부터 유추했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생각해서 후보자들을 선별했지요. 그 후 인간의 편애하는 마음을 배제하고 선택을 하나님께 맡기기 위해 기도한 후에 제비를 뽑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맛디아를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게 했습니다(26).

제자 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시행함에 있어서 ‘기도’하여 ‘말씀’에 의존했고, ‘말씀’에 의존하여 ‘기도’했습니다. 말씀에서 분명히 언급하지 않은 세부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말씀으로부터 정당하게 유추할 수 있는 건전한 상식을 사용하여 결정했습니다. 기도와 말씀과 상식은 지금도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시행하는 건강한 방법입니다. 다만 제비뽑기는 이제 제외됩니다. 제비뽑기는 성령 강림 전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임시방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성령님의 강림 이후에는 제비뽑기를 하나님 뜻을 알아보는 수단으로 결코 다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열한 명의 사도에 한 명을 더 가입시켜 열둘을 만든 이유를 좀 더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그분의 나라에서 제자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릴 것이라 하셨습니다(눅 22:30). 구약적 하나님 나라에서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 모형은 신약적 하나님 나라에서 열두 사도로 성취되는 것이지요. 열둘이라는 숫자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교회의 기반을 놓는 일과 관계되었습니다. 

유다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유다의 배도 때문에 기반을 위한 한 사람이 더 필요했습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를 교회의 기반과 관계해서 해석할 수 있는 이유는 나중에 야고보 사도가 죽었을 때는 사도를 보충하지 않은 일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교회의 창설을 위해 세움 받은 직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직접적인 목격자로서 교회의 기반을 놓아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율법 준수 문제를 놓고 최초의 공의회가 개최됩니다. 모든 사도들과 장로들은 그 동안 성령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돌아보면서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확정했습니다. 사도들의 그 결정이 이방 교회들에게 선언됨으로써 교회의 기초는 든든히 놓였습니다(16:4). 그 이후로 사도행전에서 ‘사도’라는 명칭 자체가 사라집니다. 이는 교회의 기초가 놓인 후로는 사도직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누가의 관심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사도들의 가르침인 성경만으로 충분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성도는 교회의 지체로서 증인된 삶을 위해 준비되고 협력되어야 합니다. 그 준비에 있어서 기도와 말씀에 의존함이 핵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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