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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에의 용기 (욥 2:7 ~ 욥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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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의 용기 (욥 2:7 ~ 욥 3:10)


1. 욥기는 신비의 책이다. 마치 미스터리에 쌓여 있는 것 같다. 

-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전하고 정직한 욥, 동방에게 가장 훌륭한 신앙인에게 왜 그런 고난이 있는가? 
- 그는 엄청난 재산을 가진 부자였다. 그가 누린 부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복이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그 많던 재산이 제로가 된다. 하나님은 왜 그 복을 주셨다가 다시 빼앗는가?
- 왜 하나님은 사탄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에게 불같은 시험을 주시는가?
- 하나님은 욥의 소유를 사탄에게 맡기셨는데, 그의 재산만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자녀들까지 일순간에 몰살당하게 하시는가? 과연 자녀들도 소유물에 불과한가? 

성경은 어쩌면 자녀 역시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자녀가 내 것(나의 소유)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요, 그 자녀 역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하나님께 드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자녀를 맡겨 주셨고, 그들을 잘 다스리고, 가르치고, 보존하는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 욥은 고난 앞에서도 의연하다. 그의 재산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10명의 자녀들이 한꺼번에 사고로 죽어서 장례식을 치루었어도, 온 몸에 종기가 나서 기와조각으로 북북 긁고 엄청난 고통을 견디고 있는데, 와이프가 와서 한 마디를 한다. “하나님 욕하고 죽어버려라.”

사랑과 위로의 말이 아닌, 엄청난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그 때에도 욥은 하나님을 욕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얼마 후에 그의 생일을 저주하고, 빨리 죽기를 바란다. 엄청난 고난 앞에서도 의연하던 욥이 육체적 고통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왜 그런가? 
고통은 하나님의 신비라고 말한다. 그 고통이 왜 내게 왔는지, 고통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고통과 함께 우리는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지..... 그래서 고통은 하나님의 신비라고 한다.

욥기는 이런 모든 신비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신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렇다, 저렇다 얘기해주지 않는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는지 우리에게 시원하게 대답해 주지 않는다. 


2. 오늘 본문은 욥의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몸에 종기가 돋기 시작했다. 머리끝에서 시작한 종기가 얼굴과 온 몸을 덮기 시작하더니 발바닥까지 내려온다. 온 몸에 물집이 잡히고, 농이 잡혔다. 가려워서 미칠 지경이 되었다. 그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온 몸을 벗고, 기와조각을 가져다가 날카롭고 까칠한 부분으로 긁기 시작했다. 

그의 아내가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한 마디 한다. “당신이 그러고도 계속 의로운 척 하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 버려라.” 여러분! 욥의 아내를 너무 욕하지 마라. 나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된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남편이 그런 고통을 받는데, 자기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아파서 저 사람의 고통을 대신해 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혼자서 그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두 눈 뜨고 바라보아야 하는 가족의 심정을 아는가? 

어머니가 담도암을 앓으셨는데, 고통이 심하셨다. 병원에 가는 날부터 시작해서 어머니는 한 숨도 못잤다. 병원에 입원해 계셨지만, 고통이 밀려올 때면 어머님은 배를 감싸 안고, 얼굴을 침대에 묻고 한 동안 이를 꽉 물고 아무 말도 없으셨다. 병원에서 진통제를 투여해도 고통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집으로 퇴원했다. 집에서 고통은 더 심해졌다. 먹는 것도 없고,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고통을 함께 지켜보던 아버님께서 어느 날, 눈물을 흘리시면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이제 그만 아프고, 제발 편하게 빨리 가라.” 

저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그냥 고통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는 모습을 눈 뜨고 바라보아야 하는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 욥의 아내도 아마 욥을 진실로 사랑했기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하고, 그 고통으로 그의 모습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의 친구들은 멀리서 욥인 줄도 몰랐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일주일동안 지냈지만, 그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3. 욥기의 메시지

- 나는 그 무엇 때문에가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만을 온전히 섬기고 신뢰할 수 있는가?
사탄의 논쟁 (1:9-10)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에게 많은 소유를 주고, 복을 주었기 때문이다.” ~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가? 하나님이 돈을 많이 벌게 해 주니까? 자식이 잘 되니까? 병이 치유되었으니까? 내 기도를 들어 주셨으니까? 

하나님은 욥기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너는 그냥 나를 잘 섬길 수 있느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너는 나를 경외할 수 있느냐? 너는 건강이 악화되어도 나를 섬길 수 있니? 너의 질병이 지속되어도, 네가 나를 향해 고쳐주세요 라고 말할 때 내가 No라고 대답해도 너는 나를 똑같이 바라볼 수 있느냐?”

“ ~ 때문에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청산해야 할 또 하나의 인본주의다.

-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 그 응답은 세 가지이다. 
Yes, Wait, No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해 주셨는가? 하는 응답의 방법이 아니라, 나는 그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 때문에가 아니라, 나에게 “그래”를 주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가? 
“기다리라”고 하실 때 내가 견디고 인내해야 하는 그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의 과정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가? 
“이건 아니야. 안 돼.” 라는 그 부정적 상황이 아니라, 내가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내게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 욥에게서 배울 점

그가 이토록 극심한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면서도 자기의 아내의 말처럼 “하나님을 욕하고” 원망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나에게 고난이 찾아왔을 때 나도 욥처럼 할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이 한탄해야 한다면, 그가 경험한 인생과 영성의 깊이만큼 많은 메타포를 동원하여 아픔을 노래할 수 있을까? 고난 받는 자가 너무 쉽게 할 수도 있는 “하나님! 진짜 너무합니다.” 그 흔하디흔한 원망 한 마디도 안 할 수 있을까? 내가 원망스럽고 고통스러운 날을 지나야 한다면, 나의 아픔을 노래함으로, 비유로 생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욥에게서 배우지 말 것

그는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은 그의 마음을 잘 표현해 준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죽기를 갈구하거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견뎌내야 한다. 믿음을 가지고 살기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을 붙잡고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켄 가이의 책 ‘하나님의 침묵’에서 그는 욥의 고난을 묵상하고,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주님,
한 웅큼의 질문을 들고 하늘의 문을 두드릴 때
너무 큰 소리로 또는 너무 악착같이 두드리다가
제 문을 두드리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일이 없게 도와주십시오.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고 주님을 맞이해 들인다면
주님은 제게 어떤 질문을 하실 지요? 
“내가 네게 지금까지 보여준 모든 친절은 다 어디에 기억해 두었느냐? 나에 대한 네 믿음은 어디 있느냐? 나에 대한 네 사랑과 순종은 어디 있느냐?”

제 질문들 때문에 하나님의 질문들이 들리지 않는 일이 없게 해 주십시오.
‘왜’ 라는 질문을 ‘무엇’ 이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는 곳까지
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까?”라고 질문하는 대신 
“이 일을 통해 주심이 원하시는 좋은 일들을 위해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 것입니까?” 라고 질문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왜 이렇게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질문하는 대신 
“상처를 입고 주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질문하는 대신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에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묻는 욥에게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말씀하고 계신지도 모른다. 이제 너도 “왜?”라고 묻지 말고 “주님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묻고 순종하기를 원하실지 모른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다면 믿음을 더욱 가져야만 한다. 내가 고난의 순간에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엄청난 용기이다. 시편의 시인이 말한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우리의 길이다.

(시119:81-83)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내가 연기 속의 가죽 부대 같이 되었으나 주의 율례들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피곤하고 곤고하지만, 심신이 지치고, 쪼그라들지만, 나는 그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을까? 아니 하나님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을까? 

지금 내가 고난 가운데 있다면 내게 필요한 것은, 구원보다, 응답보다, 할렐루야 보다
주의 율례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나님 그 분 자체이다. “주님,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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