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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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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3)


지난 주일 히브리서 3장 1절을 읽고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시려고 아버지께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의미에서 사도이십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드리신 분입니다.   자신의 몸을 단 번에 드림으로 죄인들의 피 흘리는 제사를 완성하시고 죽음의 두려움에 매여 일생동안 종 노릇하는 죄인들을 자유하게 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여 우리가 믿는 믿음의 도리, 즉 우리 믿음의 고백의 사도시고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합시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선포한 말씀의 주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한 주간 각자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며 지냈습니까?     그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고자 노력했던 한 주간이었습니까?    오늘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에 이어 ‘예수를 바라보자’는 주제로 말씀을 드립니다.    바라본다는 말은 그냥 쳐다보는 것과 다릅니다.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나 사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말을 전하거나 무엇을 보여줄 때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주목하세요’ 하는 것처럼 ‘시선을 집중한다’ ‘주목한다’는 말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라보자’는 말을 경기장에서 경주하는 사람이 목표물에 시선을 고정하고 전력질주하는 행동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육상선수라면 골인 지점을 응시하며 목표를 향하여 죽을 힘을 다해 달리는 것이며, 복싱 선수라면 상대방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결정타를 날려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싸움을 하는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에서 말한 것처럼, 달리기 선수가 방향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달리거나 복싱 선수가 공중에 헛주먹을 휘드르는 것처럼 하지 않고 분명한 목표를 향하여 달리며, 정확한 펀치를 날리기 위하여 목표물을 응시하는 것을 가리켜 ‘바라본다’고 말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성도들이 우선 준비해야 할 자세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경기장에서 달리는 선수는 몸에 달린 치렁치렁한 장신구를 다 벗어버리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가벼운 몸으로 달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염려, 근심과 세상이 주는 즐거움이나 인간적인 자랑거리 등 그리고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죄의 문제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나서야 목표를 향하여 전력질주할 수 있습니다.   인생 최대의 문제는 먹고 마시는 것이나 어떤 집에 살고 어디서 일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무거운 죄의 짐을 주 앞에서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인간 해방입니다.

경기장에 서 있는 내 주위를 둘러봅시다.   수 만의 관중들이 축구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 하나를 주시하며 고함치고 노래하며 응원하는 것처럼 구름같이 둘러싼 수많은 증인들이 우리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증인들은 바로 히브리서 기자가 11장에서 소개한 믿음의 용사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먼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심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상급을 기다리는 믿음의 선배들입니다.  

치열한 영적 싸움터에서 싸움하며 자기들의 뒤를 따라 시상대를 향해 들어오고 있는 후배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승리의 면류관을 쓰도록 응원하는 믿음의 선배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보다 앞서 승리한 선배들을 모범삼아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참고 견딤으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경기에 최선을 다하라고 ‘힘내라!’ 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시선을 집중하고 참고 견디며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달려야 할 목표 예수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라고 했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예수님은 믿음의 근원이시고 그 믿음을 십자가에서 이루신 분입니다.   그와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시작이시며 완성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후의 상을 향해 달리는 성도가 평생 주목하고 따라가야 할 분은 우리 믿음의 기초를 놓으시고, 즉 믿음의 시작이 되시며 그 믿음이 성장하여 완성에 이르도록 도우시는 예수님입니다.   

우리 앞서 우리보다 더 힘들고 깊은 시련의 강과 산들을 건너고 험한 계곡을 통과한  믿음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최초의 순교자 의로운 아벨을 위시하여 노아와 아브라함, 모세와 요셉 그 외에 셀 수 없이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한 분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약속받은 그 나라를 위하여 이 땅에서는 시험과 고난과 위험을 구차하게 면하려 하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들였던 용사들입니다.   우리가 그분들처럼 숭고한 믿음을 유지하고 시험과 유혹이 많은 이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추천하는 가장 훌륭한 믿음의 모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좋은 맨토가 필요하고 모범이 될만한 대상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하는데  이런 모범적 신앙인이 나의 주위에 있고 그들을 통해 약한 믿음을 격려받으며 때로는 도전과 충고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나도 저 사람만큼 믿음이 든든하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저 정도만 되었으면 좋겠다는 내 나름의 모델을 정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 중에 어떤 이들은 소위 성공한 목회자들을 모델로 삼고 그분의 목회를 닮아보려고 노력합니다.    그 사람의 설교를 부지런히 듣고 읽으며 그 사람처럼 설교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그의 억양과 몸짓까지도 그대로 모방하는 열렬 팬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 중에는 소위 세상에서 잘 나가는 교인들을 모델로 삼고 싶어합니다.    믿음 좋다는 칭찬도 듣고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그분이 기도하는 스타일을 흉내내고 그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려고 애씁니다.   좋습니다.   발전지향적인 목표를 가진다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위인전기집을 읽고 장래의 꿈을 키워가게 하거나, 성공한 인물들의 입지전을 책과 영상으로 보고 들으며 그들의 삶을 배우는 일이 교육적인 차원에서 좋은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누구보다도 완벽하고 훌륭한 모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분의 삶을 따르는 것이 성도의 최종 목표입니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이 그런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처럼 여러분은 나를 본 받으십시오’ 했습니다.    사람들이 인간 바울을 모델 삼아 나처럼 살라는 교만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된 나 바울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공경하여 그분을 따르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와 함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아가자는 간절한 권면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일생동안 그의 시선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며 살았던 사람들 중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리스도께 시선을 집중하고 사는 일이 어떤 이들에게는 정말 쉽지만  어떤 분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하고 시골에서 땅을 일구며 사시던 옛 어른들 중에 복음을 들을 때 성경의 진리를 즉시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 일생을 맡기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무슨 철학을 배우고 역사와 정치를 많이 배워 세상 이치를 깨닫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것으로 인정하고 받을 때 한 순간에 성경의 진리가 깨달아지고 믿음이 성장하게 된 분들입니다.   학문 없음이 하나님의 자녀 됨에 아무런 장애가 없습니다.   글을 몰라 성경을 읽지 못하는 불편은 있지만 듣고 깨닫는 귀가 있으니 천국이 그들의 것입니다. 

물론 공부를 많이하고 학문의 깊이가 뛰어난 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나의 구주되심과 내가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됨을 즐거이 믿고 순종하며 삽니다.    깊은 연구와 폭넓은 독서를 통해 얻은 경험과 지식으로 세상의 이치와 원리를 더 깊이 깨달으며 광대한 세계를 발견하고 그 가운데 존재하는 작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비로소 그의 경험과 지식이 그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이 엄청난 세상의 원리와 규칙들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지혜자입니다.  

그러나 식자우환이라는 말처럼 아는 것이 병이 되어 더 많이 배우고 안다는 것 때문에 세상을 비관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상대적인 인간 진리에 길들여져 절대자를 부정하며 스스로 높아지고 어두움의 세력에 종노릇하는 경우도 너무 많습니다.    지식이 권력화되고 상업화되면 불행하게도 교만한 인간을 낳게 되고 하나님 자리에 인간이 서게 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허락하신 지혜의 빛은 그것을 통하여 더 넓은 세계와 깊은 진리를 발견하고 거기 계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겸손히 섬기도록 선물로 주신 도구가 아닐까요?    남들이 가지지 못한 재능이나 전문지식이라는 도구를 통해 신묘막측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그 크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청지기로 사는 것이 하나님 없이 풍부한 인간 지식을 자랑함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 잡던 어부 베드로와 가말리엘 문하에서 고도의 학문을 전수받은 바울의 예를 봅니다.   베드로는 바울에 비해 예수 그리스도를 더 쉽고 빠르게 만나고 고백한 제자였습니다.   베드로에게는 그물과 배와 가족이 전부였습니다.   공부를 많이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부 베드로가 불학무식한 사람이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바울에 비해 공부를 덜한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그런 베드로에 비해 청년 사울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만나 구주로 영접하기까지 베드로보다는 바울이 더 많은 시간이 걸렸고 깊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회심하기 전 청년 사울이 상대적으로 많이 배우고 생각이 많다보니 자기 것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기까지 절차가 더 복잡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결론은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굴복하였으며 예수를 만나기 전에 자신의 전부로 알았던 학문과 혈통과 권력 등 모든 것을 십자가의 진리 앞에서는 배설물처럼 여기는 사람으로 변화하였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학문과 물질과 권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권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얻고 누리는 우리의 소유는 그것이 물질이든 건강이든 학문과 권력 그 무엇이든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더 잘 섬기도록 돕는 도구가 되어야지 그것이 인생의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께 눈을 맞추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지 그 도구들을 붙들고 그것들에 온통 시선을 집중하고, 의지하고 권력을 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따름에 있어서 장애물이 된다면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줄 알고 오직 예수께 시선을 집중하고 살려고 했던 사람이 바울이었고 그외 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처음에는 예수께 시선집중하기 보다는 예수께로부터 나오는 능력과 영광에 집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신 이후로 비로소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바라보는 방향이 바뀌었고 바라보는 대상이 변하였습니다.   이렇게 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자랑스러워 하였고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좀 가난하고 비천하고 병들고 실패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살아갔습니다.

우리가 시선을 집중하고 바라보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았고 부끄러움 당함을 개의치 않으신 분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사형의 잔인함과 끔찍한 고통을 모르고 자청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가 당할 모진 육체의 고통과 정신적인 타격을 예상치 못하고 겁없이 영웅이 되려고 달려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기워 십자가에 높이 달리는 부끄러움조차 개의치 않으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참으심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인내를 비교해 봅니다.   예수 믿고 성화의 단계를 살고 있다고 자신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자존심과 자아는 팔팔하게 살아있습니다.   나의 자존심을 조금만 상하게 하는 말을 들으면 금방 얼굴을 붉히고 자기방어 태세를 취합니다.    혈압이 상승하고 심장이 두군거리며 눈꼬리가 올라가고 입술이 실룩거리다가 드디어 참을 수 없다는 듯 악담이 튀어나옵니다.    

언제 그 입술로 하나님께 찬송하고 거룩한 언어를 사용하며 눈물 흘려 기도했던가 싶을 정도로 돌변하여 옛날 거듭나지 못할 때 버릇이 그 입에서 튀어나오고 맙니다.    예수 믿는 것과 자존심 상할 때 나를 지키는 것은 별개라는 생각으로 자존심 상하고는 못살겠으니 하고픈 말, 하고픈 행동을 맘껏 다 하고 살겠다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좀 더 자신을 죽이며 살아야겠습니다.

본문 3절을 봅시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기억하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제대로 대우하지도 않았음은 물론 예수님을 감히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는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세상에 도무지 있을 수 없는 반역임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끝까지 참으신 분이십니다.    살다가 참기 어려운 순간을 만날 때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합시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만나는 고난과 시험의 순간에 지치고 곤하여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만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고 나에게 살 길을 열어주실만 한데 여전히 고난의 연속이요 아픔의 연속이니 참고 견디지 못하여 낙심합니다.    믿음 좋다는 아무개도 그렇고 그 사람들도 별 수 없네 하며 사람을 바라보다 실망하고 또 다시 옛날의 삶을 그리워합니다.    우리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우리를 위하여 참으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그 결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는 말입니다.    

4절을 봅시다.   성도들이 죄와 맞서 싸우기는 하는데 아직 피 흘리기까지, 즉 죽기까지는 대항하지 않고 있습니다.   싸우는 척만 했지 이러다 죽을까 두려워 죽기까지는 싸워보지도 못했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그렇게 험한 악형을 받아도 구차하게 면하지 않고 부활을 소망하며 즐거이 받았으며,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는데 성도들은 피 흘리기까지 싸워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손을 놓고 맙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아버지의 권면을 기억하지 못하고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쉽게 낙심에 빠지고 있으니 그럴수록 우리의 진정한 모델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그분에게 우리의 눈을 맞추자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부를 찬송가 85장에서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그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하고 노래합니다.    구주를 생각하는 것으로도 내 마음이 좋은데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볼 그날을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즐겁고 기쁨이 넘칩니다.   세상에서 아무도 날 알아주지 않고 주목하지 않아도 사는 날 동안 날 알아주시고 날 불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그분께 내 눈을 고정시켜 한 눈 팔지 않고 끝까지 달려가는 믿음의 용사들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 히브리서 3장 1절을 읽고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시려고 아버지께 보냄을 받아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의미에서 사도이십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드리신 분입니다.   

자신의 몸을 단 번에 드림으로 죄인들의 피 흘리는 제사를 완성하시고 죽음의 두려움에 매여 일생동안 종 노릇하는 죄인들을 자유하게 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여 우리가 믿는 믿음의 도리, 즉 우리 믿음의 고백의 사도시고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합시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선포한 말씀의 주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한 주간 각자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며 지냈습니까?     그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고자 노력했던 한 주간이었습니까?    오늘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에 이어 ‘예수를 바라보자’는 주제로 말씀을 드립니다.    바라본다는 말은 그냥 쳐다보는 것과 다릅니다.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나 사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말을 전하거나 무엇을 보여줄 때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주목하세요’ 하는 것처럼 ‘시선을 집중한다’ ‘주목한다’는 말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라보자’는 말을 경기장에서 경주하는 사람이 목표물에 시선을 고정하고 전력질주하는 행동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육상선수라면 골인 지점을 응시하며 목표를 향하여 죽을 힘을 다해 달리는 것이며, 복싱 선수라면 상대방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결정타를 날려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싸움을 하는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9장에서 말한 것처럼, 달리기 선수가 방향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달리거나 복싱 선수가 공중에 헛주먹을 휘드르는 것처럼 하지 않고 분명한 목표를 향하여 달리며, 정확한 펀치를 날리기 위하여 목표물을 응시하는 것을 가리켜 ‘바라본다’고 말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성도들이 우선 준비해야 할 자세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경기장에서 달리는 선수는 몸에 달린 치렁치렁한 장신구를 다 벗어버리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가벼운 몸으로 달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염려, 근심과 세상이 주는 즐거움이나 인간적인 자랑거리 등 그리고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죄의 문제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나서야 목표를 향하여 전력질주할 수 있습니다.   인생 최대의 문제는 먹고 마시는 것이나 어떤 집에 살고 어디서 일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무거운 죄의 짐을 주 앞에서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인간 해방입니다.

경기장에 서 있는 내 주위를 둘러봅시다.   수 만의 관중들이 축구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 하나를 주시하며 고함치고 노래하며 응원하는 것처럼 구름같이 둘러싼 수많은 증인들이 우리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증인들은 바로 히브리서 기자가 11장에서 소개한 믿음의 용사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먼저 선한 싸움을 싸우고 심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상급을 기다리는 믿음의 선배들입니다.   

치열한 영적 싸움터에서 싸움하며 자기들의 뒤를 따라 시상대를 향해 들어오고 있는 후배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승리의 면류관을 쓰도록 응원하는 믿음의 선배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보다 앞서 승리한 선배들을 모범삼아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참고 견딤으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경기에 최선을 다하라고 ‘힘내라!’ 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시선을 집중하고 참고 견디며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달려야 할 목표 예수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라고 했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예수님은 믿음의 근원이시고 그 믿음을 십자가에서 이루신 분입니다.   그와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시작이시며 완성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후의 상을 향해 달리는 성도가 평생 주목하고 따라가야 할 분은 우리 믿음의 기초를 놓으시고, 즉 믿음의 시작이 되시며 그 믿음이 성장하여 완성에 이르도록 도우시는 예수님입니다.   

우리 앞서 우리보다 더 힘들고 깊은 시련의 강과 산들을 건너고 험한 계곡을 통과한  믿음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최초의 순교자 의로운 아벨을 위시하여 노아와 아브라함, 모세와 요셉 그 외에 셀 수 없이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한 분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약속받은 그 나라를 위하여 이 땅에서는 시험과 고난과 위험을 구차하게 면하려 하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들였던 용사들입니다.   우리가 그분들처럼 숭고한 믿음을 유지하고 시험과 유혹이 많은 이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추천하는 가장 훌륭한 믿음의 모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좋은 맨토가 필요하고 모범이 될만한 대상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하는데  이런 모범적 신앙인이 나의 주위에 있고 그들을 통해 약한 믿음을 격려받으며 때로는 도전과 충고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나도 저 사람만큼 믿음이 든든하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저 정도만 되었으면 좋겠다는 내 나름의 모델을 정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 중에 어떤 이들은 소위 성공한 목회자들을 모델로 삼고 그분의 목회를 닮아보려고 노력합니다.    그 사람의 설교를 부지런히 듣고 읽으며 그 사람처럼 설교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그의 억양과 몸짓까지도 그대로 모방하는 열렬 팬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 중에는 소위 세상에서 잘 나가는 교인들을 모델로 삼고 싶어합니다.    믿음 좋다는 칭찬도 듣고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그분이 기도하는 스타일을 흉내내고 그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려고 애씁니다.   좋습니다.   발전지향적인 목표를 가진다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위인전기집을 읽고 장래의 꿈을 키워가게 하거나, 성공한 인물들의 입지전을 책과 영상으로 보고 들으며 그들의 삶을 배우는 일이 교육적인 차원에서 좋은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누구보다도 완벽하고 훌륭한 모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분의 삶을 따르는 것이 성도의 최종 목표입니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이 그런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처럼 여러분은 나를 본 받으십시오’ 했습니다.    사람들이 인간 바울을 모델 삼아 나처럼 살라는 교만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된 나 바울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공경하여 그분을 따르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와 함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아가자는 간절한 권면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일생동안 그의 시선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며 살았던 사람들 중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리스도께 시선을 집중하고 사는 일이 어떤 이들에게는 정말 쉽지만  어떤 분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하고 시골에서 땅을 일구며 사시던 옛 어른들 중에 복음을 들을 때 성경의 진리를 즉시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 일생을 맡기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무슨 철학을 배우고 역사와 정치를 많이 배워 세상 이치를 깨닫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것으로 인정하고 받을 때 한 순간에 성경의 진리가 깨달아지고 믿음이 성장하게 된 분들입니다.   학문 없음이 하나님의 자녀 됨에 아무런 장애가 없습니다.   글을 몰라 성경을 읽지 못하는 불편은 있지만 듣고 깨닫는 귀가 있으니 천국이 그들의 것입니다. 

물론 공부를 많이하고 학문의 깊이가 뛰어난 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나의 구주되심과 내가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됨을 즐거이 믿고 순종하며 삽니다.    깊은 연구와 폭넓은 독서를 통해 얻은 경험과 지식으로 세상의 이치와 원리를 더 깊이 깨달으며 광대한 세계를 발견하고 그 가운데 존재하는 작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비로소 그의 경험과 지식이 그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이 엄청난 세상의 원리와 규칙들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지혜자입니다.  

그러나 식자우환이라는 말처럼 아는 것이 병이 되어 더 많이 배우고 안다는 것 때문에 세상을 비관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상대적인 인간 진리에 길들여져 절대자를 부정하며 스스로 높아지고 어두움의 세력에 종노릇하는 경우도 너무 많습니다.    지식이 권력화되고 상업화되면 불행하게도 교만한 인간을 낳게 되고 하나님 자리에 인간이 서게 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허락하신 지혜의 빛은 그것을 통하여 더 넓은 세계와 깊은 진리를 발견하고 거기 계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겸손히 섬기도록 선물로 주신 도구가 아닐까요?    남들이 가지지 못한 재능이나 전문지식이라는 도구를 통해 신묘막측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그 크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청지기로 사는 것이 하나님 없이 풍부한 인간 지식을 자랑함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 잡던 어부 베드로와 가말리엘 문하에서 고도의 학문을 전수받은 바울의 예를 봅니다.   베드로는 바울에 비해 예수 그리스도를 더 쉽고 빠르게 만나고 고백한 제자였습니다.   베드로에게는 그물과 배와 가족이 전부였습니다.   공부를 많이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부 베드로가 불학무식한 사람이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바울에 비해 공부를 덜한 사람임은 분명합니다.   그런 베드로에 비해 청년 사울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만나 구주로 영접하기까지 베드로보다는 바울이 더 많은 시간이 걸렸고 깊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회심하기 전 청년 사울이 상대적으로 많이 배우고 생각이 많다보니 자기 것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기까지 절차가 더 복잡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결론은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굴복하였으며 예수를 만나기 전에 자신의 전부로 알았던 학문과 혈통과 권력 등 모든 것을 십자가의 진리 앞에서는 배설물처럼 여기는 사람으로 변화하였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학문과 물질과 권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권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얻고 누리는 우리의 소유는 그것이 물질이든 건강이든 학문과 권력 그 무엇이든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더 잘 섬기도록 돕는 도구가 되어야지 그것이 인생의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께 눈을 맞추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지 그 도구들을 붙들고 그것들에 온통 시선을 집중하고, 의지하고 권력을 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따름에 있어서 장애물이 된다면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줄 알고 오직 예수께 시선을 집중하고 살려고 했던 사람이 바울이었고 그외 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처음에는 예수께 시선집중하기 보다는 예수께로부터 나오는 능력과 영광에 집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충만하게 임하신 이후로 비로소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바라보는 방향이 바뀌었고 바라보는 대상이 변하였습니다.   이렇게 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자랑스러워 하였고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좀 가난하고 비천하고 병들고 실패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살아갔습니다.

우리가 시선을 집중하고 바라보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았고 부끄러움 당함을 개의치 않으신 분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사형의 잔인함과 끔찍한 고통을 모르고 자청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가 당할 모진 육체의 고통과 정신적인 타격을 예상치 못하고 겁없이 영웅이 되려고 달려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기워 십자가에 높이 달리는 부끄러움조차 개의치 않으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참으심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인내를 비교해 봅니다.   예수 믿고 성화의 단계를 살고 있다고 자신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자존심과 자아는 팔팔하게 살아있습니다.   나의 자존심을 조금만 상하게 하는 말을 들으면 금방 얼굴을 붉히고 자기방어 태세를 취합니다.    혈압이 상승하고 심장이 두군거리며 눈꼬리가 올라가고 입술이 실룩거리다가 드디어 참을 수 없다는 듯 악담이 튀어나옵니다.    

언제 그 입술로 하나님께 찬송하고 거룩한 언어를 사용하며 눈물 흘려 기도했던가 싶을 정도로 돌변하여 옛날 거듭나지 못할 때 버릇이 그 입에서 튀어나오고 맙니다.    예수 믿는 것과 자존심 상할 때 나를 지키는 것은 별개라는 생각으로 자존심 상하고는 못살겠으니 하고픈 말, 하고픈 행동을 맘껏 다 하고 살겠다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좀 더 자신을 죽이며 살아야겠습니다.

본문 3절을 봅시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기억하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제대로 대우하지도 않았음은 물론 예수님을 감히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는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세상에 도무지 있을 수 없는 반역임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끝까지 참으신 분이십니다.    살다가 참기 어려운 순간을 만날 때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합시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만나는 고난과 시험의 순간에 지치고 곤하여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만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주시고 나에게 살 길을 열어주실만 한데 여전히 고난의 연속이요 아픔의 연속이니 참고 견디지 못하여 낙심합니다.    믿음 좋다는 아무개도 그렇고 그 사람들도 별 수 없네 하며 사람을 바라보다 실망하고 또 다시 옛날의 삶을 그리워합니다.    우리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우리를 위하여 참으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그 결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는 말입니다.    

4절을 봅시다.   성도들이 죄와 맞서 싸우기는 하는데 아직 피 흘리기까지, 즉 죽기까지는 대항하지 않고 있습니다.   싸우는 척만 했지 이러다 죽을까 두려워 죽기까지는 싸워보지도 못했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그렇게 험한 악형을 받아도 구차하게 면하지 않고 부활을 소망하며 즐거이 받았으며,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는데 성도들은 피 흘리기까지 싸워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손을 놓고 맙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아버지의 권면을 기억하지 못하고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쉽게 낙심에 빠지고 있으니 그럴수록 우리의 진정한 모델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그분에게 우리의 눈을 맞추자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부를 찬송가 85장에서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그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하고 노래합니다.    구주를 생각하는 것으로도 내 마음이 좋은데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볼 그날을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즐겁고 기쁨이 넘칩니다.   세상에서 아무도 날 알아주지 않고 주목하지 않아도 사는 날 동안 날 알아주시고 날 불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그분께 내 눈을 고정시켜 한 눈 팔지 않고 끝까지 달려가는 믿음의 용사들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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