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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연모의 방식 (눅 7: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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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모의 방식 (눅 7:36~50)


드라마 <대장금>을 기억하시지요? 이 드라마 막판에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둘러싸고 사랑싸움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극중의 민정호는 장금과 서로 연모하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임금이 끼어 있습니다. 주변에서는 임금에게 장금을 후궁으로 들이라고 청합니다. 민정호는 임금과 독대하여 후궁으로 들이지 말고 왕을 돌보는 어의가 되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비록 여인의 몸이지만 의술이 뛰어나니 그 길을 가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장금을 연모하지만, 자신의 아내로 삼기보다는 의원이 되어 대성하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자신의 <연모의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지만 아내로 삼지 않고 더 큰 길을 가도록 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연모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은 <연모의 방식>이란 말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리고 임금은 장금을 후궁으로 삼기를 원했지만, 의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어의로 삼고, 자신이 죽을 무렵 민정호에게 보내 줍니다. 임금도 나름대로의 연모의 방식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의 연모의 방식은 드라마를 더 감동적으로 만들었습니다.

한 중년 남자가 우체국에 와서 우표를 삽니다. 그리곤 정성껏 쓴 편지를 부칩니다. 편지를 보내기는 하지만, 딱히 답장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보낼 뿐입니다. 그가 1947년부터 1967년까지 20년 동안 한 여인에게 보낸 편지는 무려 5천 통이나 됩니다. 6.25 이전의 편지는 불타서 없어졌는데, 여인은 그 후의 편지들을 보관하고 있다가 그가 죽은 후 200여 편을 골라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이쯤 하면 누구의 이야기인지 아시는 분들이 많으시겠지요. 그는 부산여상의 교장을 역임했고, 1967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지금은 부산 하단동에 묻혀 있는 <청마 유치환> 시인입니다. 그는 통영여중 교사 시절에 29세의 정운 이영도 여사를 동료 교사로 만났습니다. 당시 이영도 여사는 21세에 남편을 결핵으로 잃고 딸 하나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을 보면서 청마의 마음에 사랑이 싹이 텄습니다. 그러나 유교, 불교를 거쳐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날마다 기도의 삶을 살던 이영도 여사는 시인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마 유치환 시인은 계속 편지를 썼습니다. 왜 그렇게 수 없는 편지를 썼을까요? 그 이유는 유치환 시인의 그 유명한 <행복>이란 시 한편을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상대방의 반응에 상관없이 아름다운 고백과 인생의 노래를 글에 담아 보내는 것이 시인의 <연모의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태도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리석다, 답답하다, 한심하다...는 등의 다양한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누가 뭐라고 하든지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방식을 보게 됩니다. 이 사랑을 보이고 있는 사람은 모든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한 여자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시몬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은 율법을 잘 준수하고 경건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초청한 것은 예수님을 존경하기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풍속으로는 손님이 오면 발을 씻겨주거나 적어도 발을 씻을 물을 주는 게 보통인데, 시몬은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환영의 키스도 하지 않았고, 발 씻을 물을 드리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난 당신을 존경하지는 않아. 그러나 당신이 워낙 유명하니까 한 번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이런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둘러앉아 있는 바로 그 식사 자리에 그 여인이 등장했습니다. 여인은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곤 예수님의 뒤로 다가와서 발 곁에 서서 울면서, 그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었습니다. 그리곤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더니 향유를 그 발에 부었습니다.

그 때 시몬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39절을 보세요.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 예수가 진짜 능력 있는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얼마나 평판이 나쁜 여자인지, 우리 동네에서 얼마나 욕을 먹는 여자인지 알텐데...>라는 것입니다. 시몬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 아셨습니다. 이 여자가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을 받는 여인임을 아셨습니다. 이 여인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스캔들로 소문이 났거나, 혹은 많은 사람들의 추측처럼 창녀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시몬의 생각대로 그 여자가 더러운 여자인 줄 아셨다면 예수님은 그녀를 쫓아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이 어떤 여자인지를 아시면서도 그대로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시몬 보다 여인을 더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비유 하나를 말씀했습니다. <오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이 있고,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이 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갚을 능력이 없다. 그래서 돈을 빌려준 사람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두 사람의 빚 모두를 탕감해 주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고마워하고 탕감해 준 사람을 사랑하겠느냐?> 시몬은 대답했습니다. 43절을 보십시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예수님께서도 시몬의 대답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사람은 시몬과 여인을 가리킵니다. 여인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죄인입니다. 그녀는 오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시몬은 그녀보다는 의롭게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오십 데나리온 정도의 빚을 진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빚을 모두 탕감해 주셨습니다. 그 때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하나님께 감사하고 고마워하겠습니까? 당연히 여인입니다. 

시몬은 생각합니다. <난 그래도 저 여자 보다 낫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당연히 용서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다릅니다. <주님, 난 죄인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내 생명을 다 바쳐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주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눈물로 씻고, 머리털로 닦고, 향유를 부어 드렸습니다. 

왜 주님께서 시몬보다 여인을 칭찬하셨습니까? 여인은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을 아는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사랑 받는 감격>을 압니다. 또 그녀는 <사랑하는 기쁨>도 압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 부어 드리는 값비싼 향유도 아깝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발에 입을 맞추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녀가 주님을 사랑하는 방식이었고, 주님은 그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 그녀를 칭찬하신 배후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사랑을 아시는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보통 사람들이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 없으신 너무도 정결한 그 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인들이나 매달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물어봅니다. <왜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까?> <너희가 지은 죄를 대신 짊어지고, 너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해서다.> <주님, 왜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베푸십니까?> <그건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게 주님의 이상한 사랑입니다. 아무런 자격 없는 우리를 위해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님의 사랑을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사랑은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 사랑을 받고는 싶지만, 그냥 받자니 미안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뭔가 보답을 해 드릴 테니, 받아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준수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면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세 당시의 많은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금식을 하고, 고행을 하고, 선행을 많이 행해야 주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랑 받을 자격>을 논하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격을 갖추라고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 대하여 매우 냉정합니다. 그들은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속으로 <자격도 없는 주제에....>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의 바리새인 시몬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여자를 볼 때 <자격도 없는 주제에, 감히 이런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다니....부끄럽지도 않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것도 못마땅해합니다. 향유를 붓는 것도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몬은 사랑도 자격을 갖춘 사람들끼리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데 아무런 자격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일정 자격을 갖춘 사람만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사랑을 가지고 나오면 다 받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들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연모의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 중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주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울었는데, 그녀들의 눈물은 주님을 향한 연모의 방식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일이 지난 첫 새벽에 예수님께서 계신 무덤을 찾아가는 것으로 그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누가 말렸겠지요. <마리아, 이 새벽에 무덤에 뭐하러 가는가? 이젠 다 틀렸어. 그 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구. 자네 마음은 알지만, 정 가려면 날 밝은 다음에 가게!>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대답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게 제 사랑의 방식입니다. 선생님은 선생님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전 제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데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사랑의 방식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오늘날도 이 사실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방식을 가지고 주님을 사랑합니다. 

어떤 이들은 6.25 전쟁 당시 피난을 갈 수 있었지만, 교회당을 비울 수 없다는 일념으로 남아 있다가 순교하는 방식으로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이용규 목사님 같은 분은 하버드 대학 박사라는 학벌을 내려놓고 몽고 선교사가 됨으로써 주님을 향한 사랑을 드리고 있습니다. 

일전에 우리교회를 방문하셨던 이 여호수아 선교사님은 그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남태평양의 섬들에 사는 원주민들을 향해 가시는데, 그게 주님을 향한 그 분의 사랑입니다.

어느 시골 교회 할머니는 날마다 아끼는 닭이 낳는 달걀 한 개씩을 새벽기도 시간에 강단 앞에 가져다 놓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시자 달걀도 더 이상 놓여지지 않았습니다. 새벽마다 강단 앞에 드려진 달걀 한 개, 그것이 할머니가 주님께 드리는 연모의 방식이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성도들을 위해 눈물 마를 날이 없는 마음으로 어려운 교우들을 생각하면서 눈물로 설교를 준비하고 기도하면서 긴긴 세월 묵묵히 목회자의 길을 갑니다. 

어떤 이들은 집에서 편히 자는 것을 포기하고 예배당을 방 삼아 주무시며 기도합니다. 그들만의 사랑의 방식입니다. 

어떤 이들은 너무 숨이 차서 중간에 열 번씩 쉬어가면서도 예배당에 오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예배에 참석하는 것, 이것이 그분들의 주님을 향한 연모의 방식입니다. 
어떤 이들은 어려운 살림에도 입지도 않고, 쓰지도 않고 정성껏 모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장학사업을 위해, 선교를 위해 써 달라고 드림으로써 주님을 사랑합니다. 

오늘날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 방식으로 주님을 향한 자기 나름대로의 연모의 방식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랑의 이야기가 우리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우리 눈에 눈물이 흐르게 만들고, <아, 이게 바로 신앙이야!>라고 깨닫게 만듭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을 향한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들을 때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어거스틴이 살던 당시에 로마 황제의 측근 인사 두 사람이 궁궐의 화려한 삶을 버리고 광야의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 일을 전해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평소에 자신이 무시했던 두 사람이 나름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데 놀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방식을 알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사랑의 방식이 없다는 데 대해 마음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리고 주님을 향한 연모의 방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주님께 여러분의 뜨거운 심장 속에 흐르는 사랑을 보여드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신앙생활은 교회에 다니는 것 이상이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궁극적 차원은 주님의 사랑을 받고 사랑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사랑을, 연모를 주님께 드리십시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주님을 향한 나의 연모의 방식>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주일마다 설교하는 것일까? 교회의 여러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밖에 나가서 교회 목사로 행세하는 것일까? 뭘까? 주님을 향한 나만의 사랑의 방식은 무엇일까?> 여러분 모두 주님을 향한 여러분만의 독특한 사랑의 방식을 가지시길 기원합니다.

나중에 천국에 갔을 때, <너는 어떻게 나를 사랑했느냐?>라고 물으실 때 본문의 여인은 말할 것입니다. <전 그 날 주님의 발에 제 눈물을 드렸습니다. 제 머리털을 드렸습니다. 제 입맞춤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 향유를 드렸습니다.> 그 때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랑으로 예배하십시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사랑으로 전도하고 봉사하시길 바랍니다.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성령님은 사랑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의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의 은사입니다. 여러분, 성령님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성령 충만하여 여러분의 사랑이 완전 연소되는 사랑이 되길 원합니다. 

<완전 연소와 불완전 연소>라는 글이 있습니다. <사랑은 타오르는 장작불과 같습니다. 장작더미에 공기가 충분히 공급되면 불이 활활 일어 열을 내서 따스함을 주고 빛을 내어 주위를 밝힙니다. 그러나 공기가 부족하면 장작더미는 열과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을음과 연기만 냅니다. 그을음은 어둠을 주고 연기는 사람의 눈을 맵게 하여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이것이 완전 연소와 불완전 연소의 차이입니다. 사랑도 장작불과 같아서 성령이 충만하면 거기서는 사랑의 완전 연소로 온유함과 오래 참음의 선한 열매가 나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이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성령의 역사와 멀어질 때는 사랑의 불완전 연소로 그을음과 연기, 곧 시기와 질투만이 남게 됩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만의 비뚤어진 사랑은 자멸을 가져오고 고통스럽게 할 뿐입니다.> 

다음 찬양을 함께 불러봅시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 사랑합니다 그것 뿐예요
사랑한다 아들아 /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 네게 축복 더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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