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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도다 (창 6: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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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도다 (창 6:13~22)

 
부기맨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호러 장르에 속합니다. 사실 저도 직접 본 건 아닙니다. 저는 무서운 영화를 싫어합니다. 여러분에게 보시라고 권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줄거리 중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주인공이 어린 소년이었을 때부터 아빠가 잠들기 전에 베개 맡에서 무서운 얘기를 해 주는데 벽장 안에 괴물이 숨어있다는 얘기를 해 줍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아버지가 평소처럼 벽장 안에 숨어있는 괴물에 대해 얘기를 하는 중에 진짜 벽장에서 괴물이 나와서 아버지를 잡아간다는 내용입니다. 나머지 줄거리가 궁금하시면 그 영화를 찾아서 보시면 됩니다. 우리는 자녀가 어렸을 때부터 ‘너, 엄마, 아빠 말 안 들으면 망태할아버지가 잡아간다.’ 이런 유의 이야기를 해 주기를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망태할아버지를 우리가 믿느냐 하면 그건 아니에요. 그냥 애들 정신 차리라고 겁을 주는 것뿐입니다. 아이들이 자라다 보면 더 이상 망태할아버지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도 이와 같은 면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람에게 겁을 주기 위하여, 사람에게 교훈적인 효과를 얻기 위하여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들으면 망태할아버지가 잡아간다는 식으로 겁을 주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일종의 엄포-bluff 가 아니냐. 실제로는 없는데 교훈적인 효과를 얻기 위하여 있는 것처럼 말하지 않느냐.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성경의 종말론적 예언들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심판은 사람의 하기에 달린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말씀을 듣고 정신 차리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심판을 철회할 수 있다, 사람이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 근거로 제시하는 성경 구절이 니느웨성과 소돔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요나 선지자를 니느웨에 보내셔서 사십일 후에 너희가 멸망한다고 경고하십니다. 그건 사실 경고가 아니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십일이 있으면 멸망한다, 그 외에 어떤 단서가 없어요. 그런데 이 예언을 듣고 니느웨성 사람들이 임금에서부터 애까지 짐승까지 금식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말씀하신 멸망을 철회하셨습니다. 

또 소돔과 고모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려고 했을 때 아브라함의 간청에 따라서 만일 소돔 성에 의인 열 명이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겠다 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멸망했지만 만일 열 명이 있었다면 하나님이 경고하신 멸망을 철회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종말론적인 예언을 희석시키기를 좋아합니다. 그 말은 실제로는 이것이 하나님의 엄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없는 일인데 사람들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하여 부모가 자녀에게 망태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겁을 주는 것이다, 이런 해석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벽장에서 괴물이 나오면 정말로 놀라는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그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예언하신 종말론적인 심판이 닥칠 때 정말로 놀랄 사람들은 지금까지 성도들 교화를 목적으로 그것을 가르치던 설교자들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작 믿지 않고 허풍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만일 하나님이 경고하신 노아의 홍수가 실제로 임하지 않았다면 뭣 하러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비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아를 교화시킬 목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그 세상 사람들을 교화시킬 목적으로 말씀하신 게 아니고 홍수로부터 노아를 건지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비가 오지 않는다면 방주는 불필요하고 무의미하고 오히려 노아를 우습게 만들고 하나님을 우습게 만드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비유적인, 상징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구체적인 치수를 제시하셨겠습니까. 방주를 지을 때 이 규모로 만들어라, 구체적인 치수와 규모와 자재와 모양을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시하셨다는 것은 이 사건이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스토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상징은 구체적인 치수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자재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방주에 대해서 사람보다 더 진지하게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이것이 하나의 교훈이 아니고 진짜 비가 올 것이기 때문에 그 비에서 노아를 구원할 수 있는, 물 위에 뜰 수 있는 홍수에서 사람을 지켜줄 수 있는 방주를 하나님은 구상하시고 그 방법을 노아에게 전수하시고 노아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믿고 그대로 방주를 지어서 자기와 자기 가족과 그리고 땅의 생물을 건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경고하신 홍수가 사실이 아니고 엄포에 불과했다면 제일 웃음의 대상이 된 사람은 노아가 됐을 것입니다. 이미 그는 방주를 짓는 수십 년 동안 사람들에게 엄청난 웃음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짓는 것도 아니고 맨땅 위에, 그것도 그렇게 큰 규모의 방주를 수십 년 걸려서 짓는데 얼마나 사람들이 노아를 비웃었겠습니까. 저 사람, 정신 나갔다, 저 사람 제정신이냐, 웃었을 것입니다. 만일 비가 오지 않는다면 노아는 제일 우스운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노아의 하나님도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만약 비가 오지 않았다면 어떤 교훈도 없고 어떤 신앙적인 가치가 없는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홍수가 오지 않는다면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만한 것은 전혀 없어요. 이것은 교훈적인 목적을 위한 엄포가 아니었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을 교화시키려고 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았고 어떤 교훈을 남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신 목적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를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은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지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이 교훈을 받게 한다든가 세상을 바꾸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구원과 변화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노아의 홍수 사건뿐만이 아니고 성경 전체에 메시지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부르고 구원하시는 분-savior 라고 부르지, 변화시키는 분이라든가 혁명가라든가 개혁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역사를 구속사-salvation history라고 부르지 진보의 역사라든가 변화의 역사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노아의 방주와도 같은 분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가 구원을 받고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은 심판을 받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를 떠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구원을 받고 예수님 밖에 있는 자는 심판을 받습니다. 방주와도 마찬가지에요. 노아의 방주가 홍수로부터 노아를 건진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주의 진가는 홍수가 왔을 때 드러납니다. 홍수가 닥치기 전까지는 방주는 우스워 보이고 불필요해 보이고 불편해 보이고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비가 쏟아지기 시작할 때 그때 방주의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 방주 안에 있는 사람도 그렇고 바깥에 있는 사람도 그렇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할 때 방주의 목적과 진가를 알게 되는 것처럼 지금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진가를 우리도 실감하지 못하고 안 믿는 사람도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를 믿지만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어떤 혜택을 받는가에 대해서 우리 자신도 아직 실감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깥에 있는 사람과 생각이 비슷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왜 예수님을 믿어서 불편한 것과 또 하지 말아야 될 것과 눈치 보는 것과 제재를 받아야 될까. 불편하다. 과연 이것이 필요하냐. 그러나 비가 쏟아지는 날이 되면 그때 비로소 그 방주의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와 밖에 있는 자가 극명하게 분리되는 날이 오게 됩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것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자신이 사람을 서로 차별하는 것에 대해서 저항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교리적으로는 천국 간다는 것을 믿지만 실제적으로 세상 사람들 중에 누구는 천국가고 누구는 못 간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 자신이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비가 쏟아지는 날 방주 안에 있는 자와 밖에 있는 자의 운명은 극명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그 이후에 임하게 될 심판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심판이 없다면 예수님이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심판이 없다면 예수님이 하실 일이 없습니다. 심판이 없다면 예수님 없어도 됩니다. 안 믿어도 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그 보내신 사건을 통하여 그 이후에 임하게 될 심판에 대해서도 증거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주가 여기에 임했는데 방주를 필요로 하는 것은 그 이후에 심판이 엄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들 정신 차리라고 하나님이 겁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겁주기 위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실 필요가 없고, 굳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할 필요가 없고, 이미 자신들의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고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상대주의적인 생각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오늘날 이미 자기의 종교를 갖고 있는 문화와 고유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굳이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하는 것이 불편하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땅 끝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실 때 땅 끝까지 있는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이 섬기는 신이 있고 그들이 섬기는 종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이방 나라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그들에게 이미 기존의 종교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 섬기는 신들이 있고, 다 종교 제도가 있고, 어떻게 보면 기독교보다 역사도 길고 더 많은 스토리를 갖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예수님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홍수가 온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방주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방주 안에 있으면 살고 밖에 있으면 죽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한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 안에 있느냐 예수님 밖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의를 좌우하는 것은 예수님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구원을 좌우하는 것은 그 사람이 예수님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사람은 사람에 불과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를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 안에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주소가 있지요. 사는 집의 주소가 있고 이메일 주소가 있는 것처럼 천국 가는 사람에게도 주소가 있는데 그 주소는 서울특별시 예수 안입니다. 예수 안, in christ 예수 안에 있는 것 그것이 우리의 주소에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아담에게 물어보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어보실 때, 너는 어디 있느냐 할 때 죄인이든 의인이든 우리가 답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저는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나에게 정죄함이 없고, 예수님 안에 있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어디 있느냐? 예수님 안에 있으면 ‘초막이든 궁궐이든 구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구주 예수 모신 곳. 우편 강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today,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곳이 낙원이에요.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으면 그것이 심판이에요. 그곳이 멸망의 골짜기에요. 

하나님은 노아에게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지으라’ 우리가 남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남에게 도움이 되는 면도 있지만 예수님을 믿어서 최대의 수혜자는 우리 자신이에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 아내를 위해서 믿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를 생각해서 믿는 것도 아니고 목사님을 생각해서 믿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내 구원과 나의 영혼과 나의 혜택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지 드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최대의 피해자는 내 자신입니다. 믿어도 최대의 수혜자도 나이고 안 믿어서 최대의 피해자도 나 자신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가 보기 싫어서 교회 안다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를 위해서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녀서 최고로 복 받는 사람은 나 자신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방주를 짓고 안 짓고는 노아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일단 짓기로 한 이상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지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아주 엄하고 분명하게 그 방주의 규격과 자재와 모양과 모든 것을 명시하셨습니다. ‘장․광․고, 3층으로 창을 내고 잣나무로 만들고 역청을 바르라’ 그래야 그것이 방주의 역할을 할 것이고 물에 떠야 될 것이 아닙니까. 물에 뜨지 않는다면 그건 방주가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안 믿고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믿기 시작한 다음에는 주님이 지정하신 방식을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내 믿음은, 내 신앙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내가 믿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일단 방주를 짓는다면 하나님이 명시하신 것을 따라야 그 신앙이 효험이 있습니다. 

그 신앙이 나에게 효험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명시하신 방법을 따라야 됩니다. 기도든 헌금이든 봉사든 내게 효험이 있기 위해서는 주님이 명시하신 것을 따라야지 내 생각대로 내 판단대로 하게 되면 그것은 내가 방주를 내 생각대로 짓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에 따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와 내 가족과 생물을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방주를 지을 때 분명히 비웃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홍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비웃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창세기에 이미 끝 날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은 그 이후의 모든 시간은 유예기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성경을 시작하는 그 시점에 이미 하나님은 끝 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 끝 날은 이미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유예기간이에요. 하나님은 그때부터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게 아니고 구원하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구원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구원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이 땅을 변화시키고 교화시켜서 지상에 낙원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도다’라고 했습니다. 끝 날이 옵니다. 끝나는 날이 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나라의 영광에도 개인의 부귀영화에도 끝나는 날이 옵니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신문에서 어떤 연예인,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 마치 없어야 되는 일이 생긴 것처럼 충격을 받고 호들갑을 떠는데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끝 날은 오게 돼 있습니다. 그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에게도 끝나는 날이 옵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일찍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주 예수 다시 올 때 그대는 영접할 예복이 있는가 그대 몸은 거룩한 성전에 들어갈 준비가 됐는가’ 방주를 준비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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