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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눈 (암 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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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눈 (암 9:1~10)


아모스9:1-10
(1) 내가 보니 주께서 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숴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륙하리니 그 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2) 저희가 파고 음부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서 취하여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취하여 내리울 것이며 

(3)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서 뱀을 명하여 물게 할 것이요 (4) 그 원수 앞에 사로잡혀 갈지라도 내가 거기서 칼을 명하여 살륙하게 할 것이라 내가 저희에게 주목하여 화를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5) 주 만군의 여호와는 땅을 만져 녹게 하사 무릇 거기 거한 자로 애통하게 하시며 그 온 땅으로 하수의 넘침같이 솟아오르며 애굽 강같이 낮아지게 하시는 자요 (6) 그 전을 하늘에 세우시며 그 궁창의 기초를 땅에 두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니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길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8) 보라 주 여호와 내가 범죄한 나라에 주목하여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함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10)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

하나님의 심판

아모스의 다섯 번째 환상입니다. 그 무대는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이스라엘의 벧엘 성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께서 성전의 제단 곁에 서 계십니다. 하나님은 성전의 기둥머리를 쳐 성전을 무너뜨립니다. 기둥머리는 성전의 모든 하중을 견디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성전이 무너지고 그 아래서 예배를 드리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벧엘 성전의 규모는 이스라엘의 국력이나 유다와의 경쟁 관계로 볼 때 예루살렘 성전 못지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중요한 것은 크기나 사람의 수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 위에 서 있느냐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느냐 입니다. 하나님은 시내 산 떨기나무만 있는 초라한 곳에서도 나타나 모세를 만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곳이 거룩한 땅이라고 하시며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하였습니다. 

광야 사막 시절에는 하나님은 성막에 나타나셨는데 그 성막의 바닥은 맨 흙바닥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곳에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임재하시고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건물이 거룩해서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은 아무리 화려하다한들 그것은 돌덩어리를 쌓아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진리를 벗어나 장사치의 소굴이 되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을 죽이는 성전을 향하여 예수님은 그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헤롯 성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모릅니다. 기원전 20년 전에 건축되기 시작하여 예수님 공생애 당시에도 완공되지 않았고 기원후 60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막13:1) 하고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사람들도 헤롯성전을 보지 않고는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았다고 하지 말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유대전쟁사』를 썼던 요세푸스는 자신의 책에서 성전의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성전의 외부형태를 보는 자는 그 눈과 영혼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 성전은 어느 곳이든 거대한 금판으로 덮여 있었고. 해가 뜨면 금판에서 불같은 광선이 반사되어 그것을 똑바로 보려 해도 해를 직시할 수 없는 것 같이 눈을 돌려야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성전을 향하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는 파멸의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AD 60년 완공된 지 불과 10년 만인 AD 70년에 정말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로마에 의해서 철저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건물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진리가 없는 곳은 제 아무리 화려한 것으로 치장했을지라도 그곳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진리가 없고 불의가 가득한 성전은 무너뜨려 버리십니다. 

성전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심판은 매우 철저합니다. 성전 파괴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칼로 망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한 사람도 이 하나님의 칼을 피하지 못합니다. 2-4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고 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피하여 음부로 내려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찾아내어 심판하시겠다고 합니다. 음부는 죽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세계입니다. 

반대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로 피신해도 찾아낼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울창한 숲 풀을 자랑하는 갈멜 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피하지 못할 것이며, 깊은 바다 속에 숨을지라도 하나님은 바다의 옛뱀을 이용하여 물게 할 것입니다. 또 적국에 포로로 가서 이제는 안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도 칼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피하여 어떤 곳에 숨는다 하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내실 것입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하나님의 주변을 보호하는 네 생물처럼 생긴 천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모습이 괴상합니다. 그들의 사방에 눈이 가득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꿰뚫고 있으며 또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의 상징이라 할 것입니다. 

마치 모든 감시 카메라가 사방에 설치되어 있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감시당하고 있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바다 끝으로 달아나려 하였지만 결국 하나님의 레이더 망에 포착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니느웨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흔히 위기의 때에는 부유한 자들과 유력한 자들은 다 빠져 나가고 힘없는 자들만 당한다고 합니다. 전쟁 나면 재빨리 먼 곳으로 피하여 달아나면 그만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해서 그들을 추적하여 결국 심판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아마 철저한 추적으로 유명한 곳이 이스라엘의 모사드라는 정보기관일 것입니다. 

이들은 2차세계 대전 당시에 유태인들을 학살했던 전범들을 집요하게 추적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이 지나도 그들을 추적하여 심판대에 세웁니다. 지난 1960년대에는 유태인 학살에 관여했던 독일 친위대 장교 아히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이름을 바꾸고 숨어살다가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1988년도에도 나치수용소 간수였던 사람이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추적도 이처럼 치밀하고 철저한데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능력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심판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심판에는 허점이 있고 한계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아모스는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의 철저함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또한 역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철저함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시편139편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 

우리 하나님은 먼 바다나 사막 한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깊은 고독의 바다나 나만의 은밀한 방에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감옥에도 계시고 차가운 벌판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북한의 저 암울한 동토에도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이 어느 곳, 어떤 상황에 계시든 하나님은 그곳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은 김대중 전대통령의 장례식이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와 인권, 남북통일과 평화를 위해 헌신하신 위대한 인물입니다. 우리 민족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아마 김구 선생 이래로 사상이나 업적 면에서 추앙받기에 부족하지 않은 분이라 생각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70년대와 80년대에 민주화를 상징하던 세 인물이 있었는데 유럽의 바웬사, 아프리카의 만델라, 아시아의 김대중 이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인물을 곁에 두고도 제대로 존경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적으로 더 유명한 분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역감정과 분단 이데올로기로 인하여 얼마나 그 분을 폄훼했는지 모릅니다. 한국 사회는 인물을 키우기보다는 인물을 깎아내리는 데 빠른 사회입니다. 이순신, 정약용, 김구 등 당대에 환영을 받았던 영웅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자기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자기편이 아니기 때문에 모함하고 매장하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손해입니다. 부족해도 잘한다고 하고 키워주어야 정말 위대한 인물이 됩니다. 그런데 단점만 끄집어내고 그 부족한 것만 보려한다면 그 어떤 성인군자도 한국사회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관련되어 가장 감동적인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저 유명한 김대중 납치사건이 있을 때의 일입니다. 도쿄에서 한국 정보부에 의하여 묶인 채로 현해탄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바다에 수장시키려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 김대중 대통령은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김 대통령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를 김 대통령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밧줄을 뜯을 수가 없나 손에 힘도 줘봤어요. 

그 때 갑자기 예수님이 옆에 서시더라고요. 그래서 예수님 소매를 붙잡고 예수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제가 아직 국민들을 위해서 할 일이 많습니다.” 곧 이어서 미군 헬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고 그 위기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 정보부에서 은밀하게 진행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감출 수 없었고 위기의 순간에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내가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는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번 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감동적이었던 것은 영부인 되신 이희호 여사와 일기와 고별의 편지를 통해 주고받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2009년 1월 11일자 일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몹시 춥다. 그러나 일기는 화창하다. 점심 먹고 아내와 같이 한강변을 드라이브했다.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 둘이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매일 매일 하느님께 같이 기도한다.” 아내에게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희호 여사가 입관식에서 쓴 고별의 편지에서도 자기 남편을 향하여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어느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 저 웬수!”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자고로 ‘그 하인이나 아내에게는 영웅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웅이 가까이 있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내에게서 존경받는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사람이라면 정말 위대한 분이라 할 것입니다.

그분은 또한 따뜻한 마음과 눈물을 가졌던 분이기도 합니다. 용산 참사의 보도를 보며 그분이 기록했던 일기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용산구의 건물 철거 과정에서 단속 경찰의 난폭 진압으로 5인이 죽고 10여 인이 부상 입원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 용산 참사는 이제 이 시대의 불의와 치부를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정치지도자들 중에 이 사건을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모스가 고발하는 이스라엘의 죄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까닭은 가난한 자를 향한 눈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는 지도자가 있다면 국민들은 사는 게 어렵고 힘들어도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 분은 또한 용서를 실천한 마치 종교인 같은 정치지도자였습니다. 유신정권에서도 많은 고난을 당하고 그래서 그는 평생을 절룩거리고 다니고 그 아들 또한 고문후유증으로 파킨슨 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80년대에는 사형 선고를 받기도 하고 오랜 망명 생활을 하기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보복을 많이 당하고 구금, 연금 생활을 많이 하면서 미운 사람 많지 않았느냐?” 그러자 김대중 대통령은 “용서하고, 미워하는 감정을 버리는 게 신앙의 가르침이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말대로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사면하여 사형을 면하게 하였고 일체의 정치보복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용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로의 과거와 실수에 대해서 용서하고 포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국사회는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상처를 서로 용서하고 치유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 용서와 치유 없이는 민족의 하나됨도 통일도 어렵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몸소 평화의 삶을 사셨습니다. 아마 예수님도 현해탄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살렸던 일을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나라를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는 하나님의 심판이 결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의지가 분명한 대도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의 희망을 붙잡는 자들이 있습니다. 10절에 묘사되고 있는 자들이 그렇습니다.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임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기에 우리는 망하지 않을 것이고, 출애굽 사건이 바로 그 증거라는 논리입니다.

이런 자들을 향하여 아모스는 그들이 의지하는 출애굽 신앙을 여지없이 깨뜨려버리고 맙니다. 매우 충격적인 해석인데 7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길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나 구스 자손이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구스는 지금의 에디오피아 지역에 사는 흑인들을 말합니다. 당시 중동 지역 사람들은 구스 족을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들이 하찮게 생각하는 구스 족속이나 이스라엘이나 나는 똑같이 취급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로부터 출애굽시킨 것은 이스라엘만의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 족속도 하나님께서 갑돌, 오늘날 크레타를 말하는데 그 갑돌에서 이곳으로 옮기셨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경쟁자인 아람 사람도 메소포타미아의 길이라는 곳에서 이곳으로 올라오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사건에 의지해서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별 것 아님을 밝히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역으로 이를 통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어떤 분이신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한 민족을 일으키고 한 민족을 이주케 하며 한 민족의 발전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과 주관하심 가운데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 역사에도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전 지구상에 이스라엘 위에만 하나님의 태양이 비치고 다른 민족이나 땅에는 사단이 지배하는 어둠의 나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화된 유럽만이 축복의 땅이고 인디언들이 살던 아메리카나 농경중심의 아시아는 야만의 땅이요 서구인들을 통하여 광명을 얻게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심각한 오해입니다. 모든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입니다. 그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군을 통하여 우리 민족을 건국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임을 고백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라서 단지 하늘의 신처럼 묘사했을 뿐입니다. 우리 민족을 한반도로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민족의 위기에서 구원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착한 심청이를 복주시고, 악한 놀부나 변 사또에게 심판을 내리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과 주변 민족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말씀이 주어지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지만 유독 이스라엘에는 하나님 말씀을 주셔서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과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밝히셨습니다. 이것은 특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거운 책임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모범국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받는 국가의 모델을 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런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무효화하는 순간 그들은 이제 이방 민족과 전혀 다를 바 없게 된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지기 전의 우리 민족과 복음이 전 해진 이후의 우리 민족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달빛 같은 은혜와 햇빛 같은 은혜의 차이라 할 것입니다. 전에도 빛은 한반도 땅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빛이 희미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복음과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태양처럼 환한 하나님의 빛이 비추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다면 그것은 달빛이나 촛불 빛보다 더 못한 상황이 되었다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희미한 별 빛을 보며 길을 나섰던 이방의 동방박사들을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그러나 환한 빛이라는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있었던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경배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죽이려는 음모만이 진행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빛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빛에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환한 형광등 아래서도 공부하지 않고 잠만 자고 있다면 호롱불과 반딧불에 비추어 공부하는 사람만 못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교회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주신 신앙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의인이나 악인을 가리지 않고, 또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리지 않고 이루어지나?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악인에 대해서는 철저히 추적해서 행하는 심판이요, 의인은 가려서 살리는 심판입니다. 9절에 말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함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에서 곡식을 추수하여 정미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곡식을 타작마당에서 치거나 훑어서 낱알을 분리합니다. 분리한 다음에는 바람 부는 곳에서 키질을 하여 먼지나 겨와 같이 가벼운 것들을 날려 보냅니다. 다음에는 비교적 큰 그물눈을 가진 체를 이용하여 돌멩이나 지푸라기들을 제거합니다. 이때 알곡들은 그물을 통과하고 큰 불순물들만 걸러집니다. 그래서 9절을 표준 새번역은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똑똑히 들어라. 내가 이제 명령을 내린다. 곡식을 체질하여서, 돌멩이를 하나도 남김없이 골라내듯이 세계 만민 가운데서, 이스라엘 집안을 체질하겠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불순물과 알곡은 완벽히 구분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배했던 이스라엘의 지도층과 부유층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알곡과 같은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8절 말씀의 의미입니다. “보라 주 여호와 내가 범죄한 나라에 주목하여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물론 전쟁과 심판의 과정에서 죄없는 많은 의로운 자들이 죽기도 합니다. 우리가 한 공동체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한 가장의 잘못이 온 가족에게 미치듯 소수 권력자들과 부유층의 잘못으로 인하여 많은 가난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정확함입니다. 겉으로는 마치 도매금으로 넘어가듯이 집단적인 죽음과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알곡과 돌멩이를 가르듯 정확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체질을 하는 비유를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돌멩이와 불순물만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마13:47-48) 그물질을 하여 고기를 잡은 후에는 어떻게 합니까? 육지나 배 위에 앉아 고기를 구분하지 않습니까? 값비싼 고기나 좋은 고기를 가르고, 상하고 나쁜 고기를 가릅니다. 아무런 이익이 없고 해가 되는 것은 아예 버려버립니다. 

한 인간이란 존재는 얼마나 소중하고 그 인생은 얼마나 무겁습니까? 세상 법정에서도 한 사람의 죄를 묻기 위해 수많은 증거들이 동원되고 오랜 세월이 흘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 또한 정확함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의인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고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가 어느 곳, 어떤 상황에 있던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43:1-2) 이 하나님의 은혜가 고 김대중 대통령의 영혼 위에와 함께 예배를 드린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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