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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해자로 산다는 것(고후 5: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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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자로 산다는 것(고후 5:16~21)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한 신앙인의 죽음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지만 처서 절기가 성큼 우리 앞에 당도했습니다. 옛날 농부들은 이맘때가 되면 여름내 사용하던 농기구들을 닦아 창고에 들여놓았다고 합니다. 뜨겁던 햇볕이 누그러져 풀이 더 이상 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마 통에 눅진눅진해진 옷과 책을 꺼내 바람을 쐬주는 것(擧風)도 지금 해야 할 일입니다. 바야흐로 좋은 때가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흔연하지 못합니다. 왠지 모를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 열립니다. 

평생을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헌신해 온 한 거인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애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를 사랑했던 이들은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그분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표했고, 그를 미워했던 이들은 그에게 색깔을 덧입혀 경멸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 국민들은 그분에게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분은 누가 뭐래도 제도적인 민주주의의 초석을 닦은 분입니다. 수없이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를 지탱해준 것은 신앙이었습니다.

저는 80년대 초반, 감옥에 갇혀 있던 그가 가족들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 복사본을 매달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교인 중의 한 분이 그걸 전해주곤 하셨습니다. 봉함엽서에 여백조차 없이 써내려간 깨알같은 글씨를, 그것도 남몰래 보기 위해서는 집중력이 필요했습니다. 젊은 날 그가 보여준 진지한 신앙의 모습은 저에게도 상당히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김대중 옥중서신>>(청사, 1984)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가 곧 판매금지 조치된 그 편지글 어디를 펼쳐보아도 진실한 신앙인으로 살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크리스찬이 된 행복은 무어라 해도 남(敵)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웃 특히 고난받는 사람들에의 사랑의 마음과 봉사를 주님의 뜻으로 행하는 기쁨일 것이오.”(35쪽)
“사랑하려면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려면 상대의 처지와 심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하려면 상대방의 처지와 심정을 알기 위한 대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대화도 이해도 없는 가운데 곡해와 무지가 쌓여있는 가운데는 용서도 사랑도 있기 어렵습니다.”(143쪽)

“하나님의 축복이란 평탄한 생활과 번영의 보장이 아니다. 그것은 어떠한 고난 역경 실패 속에서도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능성 앞에 서는 힘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202쪽)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빛은 암흑의 권세와 싸워야 하고, 부패의 힘과 싸워야 한다. 그러므로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시련과 고난의 생활을 의미한다.”(286쪽)

물론 그라고 해서 왜 오류가 없었겠으며, 실수나 죄가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도 그가 끝내 지향했던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참 세상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어 정치 보복을 차단하고 관용과 포용을 역설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신앙으로부터 나온 것일 겁니다. 그와 작별하는 시간을 앞두고 화해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얼의 사람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17)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부활의 생명에 잇대어 살기로 굳게 작정한 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이들은 사람들을 육신의 잣대, 곧 그가 가진 것(what they have)이나 외적 조건(how they look)을 보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돈이 많고, 학벌이 좋다고 해서 모두가 훌륭한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사람들은 세상의 잣대로 보면 보잘 것 없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사무엘조차 다윗의 인물됨을 알아보지 못했고,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집을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막12:10)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1:27)

주님은 어부와 세리 같은 보잘것없는 이들의 가슴에 하나님 나라의 꿈을 새겨 넣어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어젖히게 하셨습니다. 그러기까지는 많은 시련과 연단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련, 고통, 절망을 거쳐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들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얼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꿈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에게 주어진 과제는 하나님이 보시며 ‘좋다’ 할 수 있는 세상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 그리스도의 사절

바울 사도는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들의 소명은 ‘화해’라고 말합니다. 화해는 분열을 전제로 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분열을 죄라고 일컫습니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부정적인 인간 경험은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지는 순간, 이웃들을 향한 사랑의 불꽃은 사그라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당신과 세상의 화해를 위한 촉매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혼자 힘으로는 하실 수 없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인간의 자발성에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게 해주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요즘 들어 저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우리가 수행해야 할 실존적 과제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고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인도 캘커타에서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마더 테레사 수녀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악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토록 해주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습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고 있던 영생의 집에 왔습니다.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곧장 여성들이 머무는 구역으로 갔습니다. 그는 한 수녀 옆에 멈추어 섰습니다. 그 수녀는 구더기와 오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여자 병자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수녀의 손과 얼굴과 눈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수녀에게 일할 힘을 준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습니다. 그 남자는 테레사에게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증오심으로 가득 차서 이곳에 왔지만, 지금은 제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갑니다. 저는 마치 그리스도를 돌보듯이 병든 여자를 돌보는 그 수녀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아름다운 영혼, 행복한 미소>>, 92쪽)

테레사 수녀는 우리가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생생한 현존’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절’이라는 영예스런 호칭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 사절이 해야 할 일은 분리의 장벽들을 허물고, 사람들이 친밀한 우정을 나누도록 돕는 것입니다.

• 산문 같은 현실 속에서

삶이란 갈등과 불화의 연속입니다. 이웃들은 우리들 기쁨의 매개이기도 하지만 두려움과 공포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도 화해의 사절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만 하루에 10분씩만이라도 하나님의 현존 속에 들어가, 그분의 부드럽고 사랑스런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모으고 앉아 있다 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싸 안고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사랑을 경험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애집하고 있는 것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흐트러진 삶의 질서를 바로잡는 시간이고, 우리 인생의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는 순간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세라는 그릇된 속박에서만 벗어나도 우리 영혼은 한결 가벼워집니다.

하지만 거기에만 머물면 안 됩니다. 변화산에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베드로는 그곳에 초막을 짓고 살자고 했지만 주님은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가자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그 순간을 시적인 영감의 순간이라 한다면, 우리가 살아야 할 현실은 산문(散文)이라 할 것입니다. 아옹다옹, 옥신각신, 경쟁하고, 상처를 주고받고, 미워하고, 갈라서는 것이 우리네 인생의 풍경입니다. 

성도는 그곳에 들어가 화해의 촉매가 되어야 합니다.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폭력에 동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정과 환대가 넘치는 정의의 새 세상을 이루기 위해 땀 흘려야 합니다. 

지금 지구에는 65억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중에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30억 가까운 사람들이 하루 2달러 이하의 생활비로 살아갑니다. 하루 1달러 이하의 비용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12억 명 정도인데, 세계은행은 그들을 가리켜 BOP(Bottom of Pyramid)라 합니다. 매일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2만 5천 명이고, 10세 미만의 아이들이 5초에 한 명꼴로 아사하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7분에 1에 해당하는 8억 5천만 명 이상이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에 있고, 그중 3천만 명이 부유한 나라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합니다. 물 부족으로 사망하는 사람의 수는 매년 1,200만 명 정도이고, 11억 명 이상의 사람들은 깨끗한 물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뿌옇거나 누렇게 오염된 물을 그대로 마십니다. 해마다 설사병으로 죽는 어린아이가 220만 명에 달하는데, 설사 환자의 40 퍼센트 가량은 손을 깨끗이 씻을 수 없다고 합니다. 현재 지구 위에는 제대로 된 화장실 없이 사는 사람이 무려 40 퍼센트에 이르고 있습니다.(차병직, <<상식의 힘>>, 305-6쪽 참고) 

• 하나님의 통치를 위해

이런 현실에 눈을 감는다면 우리는 신앙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기본권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무능하거나 게을러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이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삶의 구조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디딤돌조차 없습니다. 조금만 도와주면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의 삶이란 누군가의 ‘설 땅’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설 땅이 되어 주셨습니다.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비폭력은 고통 받는 인류를 위하여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불의의 현실을 모른 체해서는 안 됩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편지를 써서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고, 어려운 이들과 연대함으로써 사람들 속에 있는 선한 열정을 불러 일으켜야 합니다. 수입의 한 부분을 그들을 위해 써야 합니다. 신학자이자 사제인 이냐시오 엘라쿠리아는 엘살바도르에 있는 예수회 대학교의 총장입니다. 그는 자기를 찾아온 평화 운동가들에게 자기 사역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 엘살바도르에 예수회 대학교가 있는 목적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것은 평화와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과 불의에 공적으로 항거하지 않고서는 평화와 자유가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존 디어, <<살아 있는 평화>>, 127쪽)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이들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이처럼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현실이 불의하다는 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숙명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공개적으로 악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어려운 이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악의 구조에 동조하는 게 됩니다. 악에 협력하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성도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함께 만들어가야 할 세상에 대한 꿈을 공유하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땀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불의를 준엄하게 꾸짖고, 인간의 기본권을 박탈하는 모든 억압에 대해 꾸짖고 항거하는 예언자들은 물론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들 이상으로 필요한 것은 스스로 불쏘시개가 되어 사람들 속에서 선의 불을 지피는 이들입니다. 

엘라쿠리아의 말대로 우리가 이곳에 있는 까닭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임을 잊지 마십시오. 눈물과 아픔이 가시지 않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삶으로 증언하고, 스스로 화해의 실천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역사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가슴 벅찬 소명입니다. 이 소명에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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