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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롭게 된 삶 (엡 4: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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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된 삶  (엡 4:25~32)

 
첫 번 사람 아담은 아마도 선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에겐 악한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선하게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껏 받아 누렸을 것입니다. 그의 삶은 행복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의 삶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악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악한 생각은 또한 악한 말과 악한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가 범죄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고 말았습니다. 더럽고 추한 욕심이 이끄는 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로 물든 인간의 실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만 죄의 길로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거듭난 성도들 중에도 옛 습관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꾸짖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5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믿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여전히 이방인들처럼 헛된 것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방탕한 죄의 길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옛 습관을 따라서 사는 사람을 가리켜서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 4:22)
그렇습니다! 마치 더러워진 헌 옷을 벗어 던지듯이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옛 사람을 벗어 버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선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하지만 다음으로는 반드시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옛 사람을 벗어 버리는 것이 죄에서 해방되는 단계라면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단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생명의 씨가 들어오면 모든 죄악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새롭게 거듭날 뿐 아니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이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후에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거듭난 후에 거룩함을 좇는 삶이 매우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기만 하면 구원이 완성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일에는 우리의 수고와 헌신이 필요합니다. 병을 고치는 것은 물론 의사의 전문 영역입니다. 그러나 효과적인 병의 치료를 위해서 환자의 협력도 반드시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새 사람을 입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그 뜻에 따르는 거룩한 삶을 사는 일은 우리가 감당해야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새 사람을 입은 성도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새 사람의 실제적인 말과 행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25절 말씀으로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쁜 소문은 날아가고 좋은 소문은 기어간다."

사람들은 나쁜 소식을 들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빨리 전하고 싶어합니다. 반면에 좋은 소식은 별로 전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어떤 교수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소문이 퍼져나가는 속도를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나쁜 소문은 좋은 소문에 비해서 네 배나 빨리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나쁜 말을 전하는 것을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학자는 '소문은 우리를 파괴하는 정체 불명의 괴물'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불평과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마음속에 있는 시기, 열등감,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그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을 퍼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29절 말씀으로 거듭 강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우리가 어떤 말을 들었을 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이 과연 덕을 세우는 말인가?' '이 말이 사람을 살리는 말인가 아니면 죽이는 말인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이나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말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찍이 시인도 분명히 경고한 바 있습니다.
시편 101편 5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둘째, 26절 말씀으로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분노는 사람의 감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누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누구나 화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화를 내는 사람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화를 낼 때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화를 낼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화를 내면 그것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쉽게 화를 내면서도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화를 내면 싫어한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주님도 그와 같은 이기적인 태도를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우리가 왜 화를 냅니까?
모든 것이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짜증이 납니다. 그러다가 점차 분한 감정으로 발전합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참을 수도 있고 화를 멈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을 넘으면 쌓인 감정이 격한 분노로 폭발합니다. 심한 경우 광분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조급하게 화를 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잠 16:32 상반절)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화가 나기 시작할 때 거기서 자기의 감정을 다스립니다. 화가 날 때 먼저 기도하면서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성내는 것이 옳습니까? 제가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습니까?"
기도할 것 같으면 얼마든지 화를 멈출 수 있습니다.

셋째, 28절 말씀으로 사도 바울은 도둑질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대부분 나와는 상관이 없는 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언제 남의 물건에 손을 댄 적이 있는가?' '나는 세금도 정확하게 내고 있지 않는가?' '나는 헌금도 많이 하고 있는데 왜 내게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의 모든 소유를 어떻게 얻었습니까? 물론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크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까지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고맙게 생각하지 않고 받은 바 모든 것을 이웃과 더불어 나누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도둑질이 뭔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것이 바로 도둑질입니다. 더 나아가 이웃과 더불어 나누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선한 마음을 품고 실행에 옮길 때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는 마음 그 자체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결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人間)이라고 할 때 그 간(間)이 무슨 뜻입니까? '사이 간'입니다. 인간은 서로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누군가를 도와 줘야 하고 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며 또 누군가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누군가 우리를 도와 주고 이끌어 주고 위해서 기도해 주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가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말로 상처를 입히고 심지어 그들의 소유를 빼앗는 것으로 그 빚을 갚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면 또한 마땅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짓을 버리고 분을 내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도둑질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선한 일에 힘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웃과 더불어 서로 친절하게 하며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이 주시는 참된 기쁨과 평강을 마음껏 누리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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