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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 (사 5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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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 (사 58:1~12) 
 

1. 신앙은 커뮤니케이션이다. 

신앙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입니다. ‘communication’은 ‘communicate’라는 동사에서 온 말인데요. ‘communicate’란 ‘사람이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이나 정보를 누군가에게 전하다’, ‘상호 의사소통을 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서 온 ‘communication’은 ‘전달, 연락, 통신, 서신 왕래, 다른 누군가와의 교제, 의사소통’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때는 분명한 상대방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그 무언가를 끊임없이 주고받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의 일차적이고 우선적인 대상, 즉 신앙의 상대방은 누구입니까? 살아 계셔서 여러분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과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만남이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상대방이 분명하지 않고, 또 그 상대방과의 만남이 실제적으로 이뤄지지 않는 신앙을 뭐라고 부릅니까? 예, 그것은 “미신”입니다. 상대가 분명하지 않고, 그 상대와의 만남과 소통이 없는 신앙이 바로 미신이지요. 그가 살아 있는 대상이든 아니든, 그가 인격적이든 비인격적이든, 그와 내가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건 없건, 그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종종 미혹하는 악한 영이 마치 그들의 상대자가 있는 것처럼 조작을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조작일 뿐이죠. 열왕기상 18장에 기록된 갈멜산 사건을 보십시오!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이 하루 종일 자신들의 신을 미친 듯이 불러댔고, 심지어 칼로 자기 몸을 自害하면서까지 그들의 신을 불렀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상호소통이 없이 일방적이기만 한 신앙이 미신입니다.

따라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앙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소통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의 뜻과 명령을 아는 것이 우리가 받는 것이고, 또 역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형편을 살피시사 채워주시는 것, 이런 소통이 신앙입니다.

성도 여러분, 원래 사람은 하나님과 상호 교통하기 위하여 지음 받았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으면서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이러한 하나님과의 상호교통을 잃어버렸으나,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성도는 이 상호교통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상호교통이 없는 성도는 성도라고 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이것이 없다면 인간으로서 존재 의미도 없습니다.

2. 하나님과의 상호교통, 문제없습니까?

여기서 여러분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의 상대방이신 하나님을 항상 의식하고 만나고 계십니까? 사람들과 함께 있거나 무리 속에 있을 때는 간혹 잊어버린다고 칩시다. 그러나 홀로 있을 때 결코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늘 느끼고 체험하고 계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일상생활 전체로 이어져 항상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의식하여 그 하나님을 존중하면서 살아오셨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 교통, 즉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리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시며,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것들을 넘치도록 공급해 주시는 일들이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미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차원 높은 신앙이요 참된 신앙임에도 불구하고, 혹시 여러분의 신앙은 미신의 차원, 즉 일방통행식의 신앙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무수한 기록들, 신앙의 선배들과 그들의 생애는 하나님과 만난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 다윗, 다니엘 …. 그들은 무리들로 인하여 하나님을 의식하고 만나는 일이 소홀해질까봐 홀로 있기를 즐겼습니다. 그들과는 달리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인도하심 등이 있을 때, 그것이 예외적이고 지극히 드문 일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니 그런 것이 없는 상태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왜 입니까?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듯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 역시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깊이 있고, 또 실제적인 만남에 목말라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임마누엘’, 즉 항상 여러분과 동행하신다 하셨으니, 그 구체적인 증거가 여러분의 삶의 구석구석에 넘쳐나야 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의 문제는 ‘왜 나에게 이런 것이 없느냐?’면서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왜 나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지?’ ‘왜 내게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이 없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신앙의 제대로 된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느냐?’,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상호교통으로서의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입니다.

3.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나?

오늘 본문은 신앙이 형식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참 신앙의 회복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1절부터 9절 상반절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허물, 즉 그들이 잘못하고 있는 일, 그 죄를 나팔을 불듯이 크고 분명하게 알려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말의 속어로서 ‘나팔(나발)을 분다’는 말은 ‘말을 이리저리 옮기고 다니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은밀하게가 아니라 아주 우렁차고 분명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죄를 알려주라고 하십니다. 그 죄는 무엇입니까? 요약을 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편으로는 경건한 척하면서도 다른 쪽으로는 자신의 욕심과 쾌락을 위해 다투는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2절,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 도다.” 하나님을 찾는 일,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 그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 “금식하는 날”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정기적으로 정한 날에 금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당시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의 뜻 알기를 즐겼습니다. 새벽 기도회를 했는지, QT를 했는지, 아니면 가정 예배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그들의 신앙생활이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날마다 성전에 모여 하나님을 찾고 그 뜻을 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다가 정기적인 금식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금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단순히 살을 뺄 생각으로 한 끼를 굶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기도원에라도 가서 금식하려고 해 보십시오. 가장 민감한 것이 음식 냄새이고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도 음식들입니다. 금식이 끝나면 먹을 음식 목록 정하는 것이 금식 기도 중에 하는 중요한 일이 되기도 하지요. 이렇게 힘든 금식을, 어쩌다 날 잡아 하는 것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행했다는 것을 보면 이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내면과 삶의 다른 부분이 그와는 전혀 딴 판이었다는 것입니다. 4절,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도다.” 6절, “흉악의 결박”, “멍에의 줄”, “압제 당하는 자”, “모든 멍에” 등의 표현은 앞에서 그들이 보여 주었던 신앙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열심인 척 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상당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금식기도를 한다면서 서로 다투었습니다. “너는 금식을 며칠 했는가?” “나는 1주일”, “나는 40일”, “나는 40일을 세 번.” 이런 식으로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사람들을 부당하게 옭아매고 압제하고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또한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지 않았고, 집 없이 떠도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이지 않았으며, 헐벗은 사람들에게 옷을 입혀 주지 않았고, 심지어 어려운 친척이 찾아오면 피해 다녔습니다(6). 그리고 또 9절을 보십시오.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 즉 그들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일삼고 있습니다. 비방하고 저주하고 무익한 말을 늘어놓았던 것입니다. 또 13, 14절에는 그들이 안식일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서 제 마음대로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신앙적으로 대단히 열심히 있는 것 같고, 또 신앙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금식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온갖 오락과 쾌락을 찾아다니면서 즐기고(3),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엉망이었습니다. 누가 금식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의롭게 보이고 열심 있고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보이려고 금식을 선언하고서는, 다른 쪽으로는 더 정욕적이고 더 이기적이고 다른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경건한 척 금식하지 말든지, 아니면 아예 마음껏 욕심대로 자신이 ‘땡기는 대로’ 살든지 할 것이지, 뭐한다고 이렇게 이중적으로 살아갑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찾기를 즐기고, 하나님께 인생의 길을 묻고, 날마다 성전에 모이고, 정기적으로 금식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앞의 사람들과 뒤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잘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전에 부목사로 있던 교회에서 <전도 폭발 훈련>을 실시했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이 훈련은 1시간 정도 강의를 듣고, 시범을 본 후에, 직접 현장에 나가서 전도를 실습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는 전체 진행과 강의를 하면서, 연세 드신 집사님 두 분을 맡아 훈련시켰습니다. 이 훈련의 어려운 점은 매주 전도를 실습할 대상자를 물색하여 미리 연락을 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주엔가 교회 내에서의 강의와 시범을 다 마치고서, 조원이었던 집사님의 친구 되시는 다른 교회 권사님의 부탁으로 그 며느리에게 가서 전도 실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며느리는 이미 시어머니의 연락을 받고서는 시어머니의 친구와 함께 온 목사에게 예의를 다 갖추어 영접을 했습니다만, 정작 복음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대화가 계속되면서 ‘아, 이 분은 처음부터 마음을 닫고 있었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겉으로 인사 잘하고, 잘 들어주는 것 같아도, 속으로는 아예 마음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설명하다가 멈추고 “교회, 기독교, 교인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또 “왜 시어머니가 교회 다니는 권사님인데도 며느리가 교회에 나가지 않느냐?”고도 물었습니다. 그제야 자기는 ‘시어머니가 다니는 교회는 다닐 수 없다’, ‘시어머니를 보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교회에서나 교인들 간에는 훌륭한지 몰라도 자기가 볼 때 시어머니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분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고, 또한 우리 모두의 문제도 이것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보이는 모습과 사람 앞에서 혹 다른 어떤 곳에서 보이는 모습이 동일합니까?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지금 살아갈 것과 미래에 대해 하나님께 묻고, 그리고 주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정말 열심히 교회 다니고, 봉사도 제법 합니다. 때로 금식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쉽게 할 수 없는 헌신이나 헌물이나 헌금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진실하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원한을 살만한 행동을 하는 것 역시 사실이지요.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을 돕지 않으며, 어려운 이웃을 돌보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온갖 말의 전달자가 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두고두고 그 말이나 그 누군가에 대해서 이리저리 비방하고 다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이중적인 신앙을 지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저와 여러분의 모습을 直視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식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상대자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없습니다. 그 상대와의 상호교통이 별로 의미 있지도, 중요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이고, 신앙생활이 별 재미가 없고, 교회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사는 성도에게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한다는 깨달음과 체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이렇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재미도 없고, 열정도 없고, 간증 거리 하나 없는 무미건조한 모습은 아닙니까? 여러분의 종교, 여러분의 신앙은 텅 비어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이 정도면 되었다’, ‘이 정도면 평균치는 된다’, ‘이 정도면 적당하다’고 하는 스스로의 기준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이제 그런 자리를 벗어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알지 못하고, 성령의 충만이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삶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것인지를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부르짖고, 즉시 그러한 삶에서 떠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의 상호교통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상호교통이 회복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❶ 먼저 9절을 보십시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우리가 정말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그 분의 음성 듣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은 곧바로 응답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즉 바른 신앙을 회복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어거스틴’은 참된 신앙을 찾으면서 고뇌하던 중, 옆집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남자인지 혹 여자인지 모를 음성으로 “집어 들어 읽으라. 집어 들어 읽으라”는 노래 소리를 들었고, 그때 읽게 된 성경이 바로 로마서 13장 13, 14절이었으며, 이 성경 구절이 그의 삶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달라스 윌라드가 지은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책에 소개된 실화입니다. ‘로버트 맥팔레인’은 LA 지역의 유명한 사업가였습니다. 1970년, 그는 부도 직전에 있는 한 보험회사의 경영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원치 않는 일이었지만 자신이 투자한 돈을 조금이라도 건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긴장과 스트레스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경영에 나선지 3년째 되던 해 봄, 끊임없는 실패의 위기, 불철주야 계속 되는 수고, 좌절의 연속, 재정적인 위기, 회사의 부도를 막기 위하여 하루하루 안간 힘을 쓰는 일, 이런 것에 지쳐서 그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차를 돌려서는 고속도로를 막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그에게 어떤 저항할 수 없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차를 길 가에 세워라.” 그는 마치 그 말이 차 앞 유리에 적혀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고 후에 말했습니다. 차를 세우고 앉아 있는 그에게 그 음성은 계속 되었습니다. “내 아들은 네가 평생 알지도 못하는 긴장 속에서 살았다. 그런 긴장이 찾아 올 때면 그는 나를 찾았다. 너도 똑 같이 하면 된다.” 이 말은 들은 맥팔레인은 운전대에 앉은 채로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믿고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음성을 들려주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난 후, 그는 차를 돌려 사무실로 갔습니다. 그가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그 동안 풀지 못하던 22건의 未決 件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원들과의 갈등이 해소되었고, 고객들이 보험회사를 바꾸려던 것을 철회했고, 고객들은 연체된 거액의 보험료들을 납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리빙바이블(The Living Bible)의 저자인 ‘켄 테일러’ 박사는 아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문자적인 번역이 아니라 뜻을 살리는 번역”에 대한 음성을 들었고, 그래서 리빙바이블을 제작할 수 있었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친정어머니로부터 파란색의 예쁜 펜을 선물 받은 한 여 성도는 그만 그 펜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에게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 남편을 비롯한 식구들을 다 동원하여 찾았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그 펜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얼마나 소중한지 아시죠? 그러니 찾게 해주세요.” 기도하는 중 그의 마음에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사무실 화장실 안에 있단다.” 그녀가 그렇게 찾던 것을 정말 화장실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어느 목사님은 초행길이라 그만 길에 자신감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잠시 멈추어서 기도했습니다. 그때 그에게 조용히 들려온 음성이 “아들아, 너는 지금 바른 길로 가고 있단다”이었습니다. 

외국 여행을 가서 이른 아침 조깅을 하던 어떤 부부는 그들이 조깅하는 코스에 있는 큰 공장의 경비원이 눈에 띄었고, 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강한 생각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하려 했더니, 그 경비원은 “얼마 전부터 기독교 복음을 알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같은 코스로 조깅을 하고 있는데 바로 앞에서 달리고 있는 남자에게 말을 건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말을 건네었더니 그는 그 동네 사람으로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어제 그들이 전도한 경비원을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는 말씀이 그대로 이뤄진 예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과 상호 교통하기 위하여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바로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그 음성 들려주시기는 기뻐하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❷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소통이 회복되면 다음과 같은 일들도 일어납니다(8, 10~12). 8절,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번영을 의미합니다(욥11:17). 따라서 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한 자에게 하나님은 풍성한 번영의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신적이며 육체적 상처, 곧 전인적인 상처를 치료하실 것입니다.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그 사람을 행복, 번영, 평화의 길로 이끄는 선봉장 역할을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라는 말은 영광의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이 그를 지켜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광야 이스라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말이지요(출 14:19, 20).

그 다음으로 10절,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지금까지 불투명하고 암담했던 삶이 분명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삶의 어려움과 시련들이 이제부터는 풍성한 번영이 이어질 것입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지금까지는 인생살이의 강열한 햇살에 노출되어 말라버릴대로 말라버린 삶이었으나, 주님과의 상호교통이 회복되면 “물 댄 동산”, 즉 당시 근동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뜻하는 이 말처럼, 또 시리아역(Syriac) 성경이 이것을 “천국”으로 번역하듯이 천국과 같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즉 삶의 어떠한 기근에도 결코 마르지 않고 항상 솟아나는 샘과 같은 삶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삶이 정말 멋있고 아름답고 풍성한 삶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마지막 12절,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그 사람과 그의 자녀들이 장차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그 땅을 다시 세우고 복구하고 보수하는 사명을 감당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상호교통이 있는 성도가 받을 복입니다. 

4. 하나님과의 상호 교통,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삶

두란노에서 출판한 『하나님 당신을 갈망합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토미 테니’라는 미국 목사가 지은 것인데, ‘토미 테니’ 목사는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면서 살아 온 사람인데요. 그는 항상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이렇게 하나님과의 상호 교통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에 경청하신다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인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음성 들려주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당신의 음성을 듣고 당신의 뜻 가운데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평안과 확신 가운데 흔들림 없이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음성 들려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더 많이, 더 깊이, 그리고 친밀하게 알아 가도록 음성 들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실 뿐 아니라, 다양한 은혜와 은사들로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소통의 방법은 정말 다양합니다. 때로는 성경 말씀으로, 때로는 실제 들을 수 있는 음성을 통해서, 때로는 꿈으로, 때로는 환상으로, 그리고 때로는 사람들이나 환경을 통해서 교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한 생각, 희망,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내려놓으십시오. 
여러분이 웬만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장 좋은 생각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을 먼저 들으려고 하십시오. 

사탄을 대적하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을 비인격적이고 상호 교통이 없는 미신의 차원에 머물게 만들려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죄악과 싸우시고 죄를 멀리 하십시오. 
성령님에 대하여 민감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기대하십시오. 
그러면 말씀하실 것입니다. 
소통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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