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 (눅 9:57~62)

  • 잡초 잡초
  • 391
  • 0

첨부 1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 (눅 9:57~62)
 

시작하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한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도 우리가 모여 드리는 이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배를 기쁘시게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와 복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젊은 부부가 새 동네로 이사를 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식사를 하다가 옆집 아주머니가 빨래 너는 것을 보고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빨래가 저게 뭐야. 빨래를 제대로 할 줄 모르는군. 세제를 좋은 것으로 써야 하는데’(조세제를 써야하는데) 혀를 찹니다. 남편은 밖을 쳐다보며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웃집 여자가 빨래를 널 때마다, 그 새댁은 옆집 여자가 빨래를 잘 못한다 핀잔을 혼자 늘어 놓았습니다. 

약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에 옆집 빨래줄에 깨끗하게 세탁된 빨래가 널린 것을 보고 아내는 깜짝 놀라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여보! 옆집 여자가 오늘은 빨래를 제대로 했네.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 남편이 말했습니다. ‘응, 오늘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서 우리집 창문을 닦았지...’ 인생도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의 창문이 얼마나 깨끗한가에 따라 다른 사람이 다르게 보이는 법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시는 말씀도 먼저 깨끗한 내 마음의 창을 통하여 받아 들여야 허락하는 은혜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의 창을 맑고 깨끗케하시사 내려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 은혜가 넘치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며칠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제는 ‘나를 좇으라’하신 것입니다. ‘저는 좇으리이다.’ ‘좇는다’하는 말이 중요합니다. 영어로 follow. 원어로 ‘아콜루소’라 하는 이 말은 4복음서에 무려 79회 나타납니다. 이 말은 의역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배운다는게 아닙니다. 뭐 깨닫고, 감격하고, 동의하고, 지지하고...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몸을 기울여서 운명을 바쳐서 따르는 것입니다. 배우고, 본받고, 같이하고, 함께 죽고-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좇는다는것!’-하신 말씀을 몰라도 좋습니다.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좇으면 되는 것입니다. 함께 가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하시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아니 지금 주님이 나를 따르라, 나를 좇으라 하시는데 나는 어떡하고 있나? 자신을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몸 말

오늘 본문에 보면 세가지 사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열정형이고, 또 하나는 회의형이고 또 하나는 인정형입니다. 이 세가지 사람을 성경에 있는대로 보겠습니다. 첫째 열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좇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뿐입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좇겠다고 하는지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마는 예수님의 대답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보시자 그 마음을 벌써 읽으신 것 같습니다. 가만 보니 부잣집 아들입니다. 

고생이라고는 해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 비상한 결심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기 많으신 것을 보니 이 분 따라다니면 괜찮을 것 같다 싶어서 예수님을 따르려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딱 거절하십니다. 따르겠다는 사람을 놓고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58절) 하십니다. 나 따라 오면 고생한다-이말입니다. 고생이란 것도 소위 검증된 인격이라야 가능합니다. 마음만 가지고 되는게 아닙니다. 

한국 교회가 지금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들을 많이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미국 인디언들을 위한 선교사를 보내어 7년이 되었고, 내년에는 신동헌전도사가 아프리카 우간다 선교사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로 많이들 가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이는 1년 만에 병들어 돌아오기도 하고 우리가 돕던 루마니아 공재교선교사는 몇년만에 병들어 죽기도 하였습니다. 아무나 선교사 하는게 아닙니다. 

철저한 사명감은 말할 것 없거니와 적어도 선교사로 가려면 어렸을 때, 자랄 때부터 고생깨나 한 사람이라야 될 것입니다. 고생에 익숙한 사람이라야 될 것입니다. 고생을 체질적으로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검증된 결심이라야지 당장의 어떤 느낌에 따라서 ‘내가 주를 위해서 살겠습니다. 주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하고 손들고 나온다고 해서 그것 가지고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비상한 결심 그것만 가지고 안됩니다. 많은 경험을 거쳐서 강인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되어야 한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잣집 아들, 이 나약한 인간이 지금 감상적으로 ‘제자가 되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하고 나오니 ‘그만 두게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네. 오늘 밤 당장 노숙해야되는구만. 알겠나? 나는 십자가를 지러 가는 중이야.’ 그렇게 만류하십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가 주님을 좇겠다는 것도 이 부잣집 아들처럼 감상적이거나 인기나 축복만을 생각하며 나선 것은 아닙니까? 오히려 어렵고 힘든일이 올 수 있다는 것은 추호도 생각 없이 핑크빛 희망을 안고 나선것은 아닙니까? 지금 내가 겪는 고생과 아픔은 이런 나를 훈련시키시는 주님의 기다리심은 아닌지 돌아볼 일입니다.

둘째로 회의형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하십니다. 그러시자 ‘따르겠습니다’합니다. 아주 보기 좋습니다. ‘나를 따르라’ ‘따르겠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 그 뒷말이 마음에 안듭니다. - ‘그러나’하고 나옵니다. ‘따르겠습니다마는 부친을 장사하고 따르겠습니다.’ 부친 장사한다니까 당장 아버지가 죽어서 지금 장례식 하게 되는 것같이 생각되지만 그 얘기는 아닙니다. 

장차 이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그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 따르겠다 그말입니다. 이에 대하여 윌리암 바클레이라고 하는 유명한 주석가는 재미있게 예화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아프리카의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서 아프리카의 청년에게 전액 장학금을 주었습니다. ‘빨리와서 공부해라’했더니 이 청년이 회답을 보내는데 오늘 성경에 나오는 두 번째 사람과 똑같습니다. 

‘아버지를 장례하고 가겠습니다.’ 그래서 부친의 장례식이 언제인가? 했더니 ‘지금 아버지가 40살입니다’라는 회답이었다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 늙어서 죽은 다음에 장례식하고 오겠다. 이 사람 공부하게 되겠습니까? 아비에 대한 효도와 의무를 다 한다는 것, 중요한 얘기이긴 합니다. 가정에 대한 의무, 그 당연한 일이지만 이것에 매여서는 아무일도 못합니다. ‘그 의무를 다하고 언제? 할것 같습니까?’

어렸을 때 많이 들었던 얘기입니다. 옛날에는 묘살이라는게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죽고 나면 그 묘 아래다 천막을 쳐 놓고 3년을 묘지킴이를 하는 것이 효자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죽고 또 아들없는 장인이 죽고 장모가 죽고... 이 묘살이를 다하고 나니까. 마누라가 단산하더랍니다. 그래 대가 끊어졌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부모에 대한 그 의무 참 중요합니다마는 이것에 매여서 다른 일을 못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주를 따르겠습니다마는...’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하게 허락하옵소서.’ 될 말이 아니지요. 그래 예수님께서 아주 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은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저희들끼리 살도록 두라. 너는 하나님 나를 전파하라. 말씀하십니다. 더 중요하고 급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젊은이 몇이 둘러 앉아 지팡이용 나무를 어느 계절에 베어 내는 것이 가장 좋으냐 하는 문제를 놓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수액이 올라오는 봄에 베어내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였습니다. 봄에 베어낸 나무로 만든 지팡이는 튼튼하면서도 탄력성이 강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이에 다른 사내는 여름만큼 적당한 계절은 없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나무들이 자라 완전한 형태를 갖추는 때가 여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세 번째 사내가 나서서 두 사람 다 틀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지팡이용 나무를 베어내기에 가장 알맞은 계절은 가을이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가을에 이르러서야 수액이 나무를 완전히 성숙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다투고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완강하게 자신들의 생각을 고집하기만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자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나이 많은 농부에게 물어서 결판을 내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어르신, 지팡이를 만들 나무를 어느 때 베는 것이 가장 좋습니까?’ 그러자 지혜로운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느 때가 가장 좋은고 하니, 당신들이 마음먹은 바로 그때가 가장 좋소이다.’ 여러분 바로 ‘지금’이 가장 좋은 때입니다. 바로 지금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출발할 때입니다. 지금 출발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인정형 인간입니다.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하소서’ 이런 정도라면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그래 갔다오너라’하실 법한데 그러시지 않습니다. ‘가지말라’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 사람이 공처가거든요. 집에 가서 제 아내보고 ‘나 주님을 따라야겠소’하면 ‘가긴 어딜가!’ 이렇게 나올 것이고, 그러면 못나서는 것입니다. 인사하러 갔다하면 못 올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이 사람은 ‘인정형’입니다. 나약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십니다. 문자적으로만 생각하면 너무 박절해 보입니다. 뭐 그렇게까지, 인사도 하지 못하게 하시나 싶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인사도 그만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절차리다 일 끝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인사도 하지마라.’

제임스 마이크너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알래스카를 연구해서 알래스카에 대한 책을 많이 썼습니다. 그래 알래스카에 관한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알래스카를 한 번도 가보지 않았습니다. 많은 자료들을 참고해서 책을 썼을 뿐입니다. 40년을 그리했습니다. 40세부터 80세까지입니다. 그동안 그는 너무 추워 죽을까봐, 너무 고생 될 것 같아서, 뿐만 아니라 내가 거기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내 가족은 어떡하나 싶어서였습니다. 

가족 생각하느라 못갔습니다. 그렇게 80세가 되었습니다. 한 평생 알래스카를 연구하고 알래스카에 대한 책을 썼는데 알래스카를 못가본 채로 80세에 심장병이 걸렸습니다. 소위 By-pass 시술을 했습니다. 그리고 누워 있으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한 평생 알래스카를 연구했는데 알래스카를 못가보고 죽는구나. 아니다. 내가 여기서 일어나면 알래스카에서 죽더라도 알래스카를 갈것이다.’ 결심합니다. 수술을 받고 나와서 80세에 알래스카를 갔습니다. 에스키모족들하고 같이 잤습니다. 

연어잡이 하는 것도 봤습니다. 고래 사냥도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영하 52도의 추위에 고생을 치르면서 그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어째서 40년 전에 이러한 결단을 못했던고’ ‘이제야 내가 알래스카의 전문가가 되었다’ 그렇습니다. 말로만, 생각으로만이 아니라 뛰어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뛰어들어서 비로소 바른 지식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단순해야 합니다. 너무 복잡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가정도 여기서는 장애가 될 때가 있습니다. 가정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 순교 못합니다. 나 죽으면 저 아내 과부되는데, 저 아이 고아가 되는데... 이래서 순교 못한 사람 많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들은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배교한 그 아버지를 두고 사는 자녀라니 부끄럽다.’ 차라리 순교했으면 그 자녀들은 ‘우리 아버지는 순교자다’하고 당당하게, 훌륭하게 클 수 있었는데, 죽음이 두려워서 신앙을 배반하고 신사참배를 한 그 아버지를 놓고 그 자녀들은 몹시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는 것이 가정을 위한 것이고 자녀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집중적으로 그리고 행동으로 순종하고 헌신하는 그런 신앙의 사람이 될 때 미래도 얻고 현재도 얻는 것입니다. 현재를 위해서 미래를 포기하는 자는 미래도 잃어버리고 현재도 잃어버립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고 온전히 주님을 좇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무리하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허락하신 말씀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에 속한 사람인가? 지난 생을 생각해 볼 때 무엇 때문에 휘청거렸나? 무엇 때문에 후회하고 있는가? 돌아볼 것입니다. 80세에 알래스카를 향해 갔던 제임스 미아크너를 생각해봅시다. 비록 늦었지마는 다시 시작합시다. 단순한 마음으로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를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할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약속하신 능력과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목사가 임종을 맞은 그 사람을 방문했을 때, 그 사람은 목사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평생 교회를 위해 한 일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교회에 백만불을 헌금하면, 제가 천당에 갈수 있을까요?’ 그러자 목사가 말했습니다.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시도라도 한번 해보시지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출발하십시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게 주님을 따르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