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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경의 은혜(2) (히 12: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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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은혜(2) (히 12:6~13 )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브리서 12:6-13)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인생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습니다. 갑자기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의 찢어지는 가슴, 지난번 신체검사에서는 괜찮았으나 이번 검사에서 나타난 질병,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남편을 잃고 남은 인생을 혼자 살아가야 하는 아내, 실직, 이처럼 인생은 눈물의 홍수입니다. 인생 자체가 눈물의 바다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려운 일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언제라도 닥칠 수 있습니다. 

화요일 오전에 목회자들의 기도모임이 있습니다. 사역 중에 일어난 수많은 기도제목들을 보면서 어쩌면 이렇게 인생에 고난이 많은가, 숨이 막힐 때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난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 어디를 읽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인생이 쉬울 것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환란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환란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나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바로왕을 만나 “내 인생에 고난이 많았다, 모든 것이 나의 적인 것 같았다”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면 누구나 힘이 듭니다. 그리고 의문이 생깁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기나?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시나? 혹시 나를 벌하시는 것은 아닌가? 나를 싫어하시는 것은 아닌가? 이런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때때로 시험에 들거나 하나님과 멀어지기도 합니다. 시련의 이유는 다양합니다.

죄의 결과로 겪는 시련이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나 실수로 시련을 겪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시련이 그런 경우입니다. 연세가 많은 분이 운동을 평소보다 2배나 하는 바람에 병원신세를 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자초한 시련이지요.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고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담배는 남편이 피우는데 간접흡연으로 아내가 폐암에 걸리는 것입니다. 자연법칙에 따른 재난이 있습니다. 홍수나 지진이 그런 경우입니다. 또 자기를 위해서 하는 고생이 있습니다. 젊을 때 열심히 공부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공부해서 남 주나”하는 말이 있는데 요즘은 “공부해서 남 주자”고 하더군요. 고3학생들의 엄마들은 자식을 위해 고생하지요. 사명이나 목적을 위해 고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 독립투사들이 나라를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순교자들은 복음을 위해 고생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고생이 있습니다. 욥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잘못이 없는지 자꾸 묻습니다. 정의의 하나님이 잘못도 없는 사람을 그렇게 고생 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을 두둔하시고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고생도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생과 시련이 항상 우리의 죄 때문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하나님이 너를 싫어해, 모든 게 너 때문이야”라고 이간질 하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만듭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방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뜨거운 물에 손을 넣었는데 만약 고통을 모른다면 큰 일이 나겠지요. 고통을 느끼고 소리를 질러야 엄마가 달려와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통증을 느껴야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통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고통은 우리가 더 큰 상처를 입지 않게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역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6절) 

이 말씀을 적극적으로 믿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어느 말썽꾸러기 소년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이가 잘못을 할 때마다 번번이 매를 들고 엄하게 다스렸습니다. 아들이 “엄마, 제가 엄마 아들이에요. 제발 봐주세요”라고 할 정도였답니다. 엄마는 아이가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징계를 한 것입니다. 그 아이는 성장해서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그 강인한 사랑(tough love) 덕분에 갖가지 어려운 도전들을 이길 수 있는 강인한 사람이 되었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잘 되라고 채찍질하지 않겠습니까. 인간 부모도 그렇거늘,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시련과 역경을 통해 우리가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역경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여기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많이 계신데 오랜 세월 역경을 헤치며 살아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앞으로 갈 길이 멀어요. 누구든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미리미리 역경의 의미를 배우고 깨닫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남은 일생을 거뜬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역경을 당하면 적극적인 믿음과 적극적인 인내로 맞서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4절에서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즉 인내를 완성하라고 했습니다. 시련은 언제나 있기 때문에 시련을 감당할 훈련을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극적인 인내를 하면 큰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불평하면서 마지못해 참으면 속이 터져버리지요. 옛날 할머니들이 “내 가슴에 큰 돌덩이가 들어있다”는 이야기를 잘 하셨지요. 엑스레이를 찍어도 안 나오는 응어리에요. 모든 시련과 고난이 결국 나를 더욱 성숙시킬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적극적인 믿음과 적극적인 인내가 있어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7절). 저희 부부가 젊었을 때 저는 아내를 터프하게 만들려고 애를 썼습니다. 저는 광야에서 살아 온 남자요 아내는 온실에서 자란 여자이잖아요. 운전을 가르치고 나서 혼자 못 간다고 하는 사람을 고속도로 시내를 다녀오라고 그냥 내보냈습니다. 아내는 돌아와서 머리가 아파서 아스피린을 먹고 드러누웠어요. 아파서 드러누울 것을 제가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 하고 혼자 내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하더니 네 번째는 혼자 가겠다는 것입니다. 훈련이요 연단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고속도로 같이 어려운 길이라서 적극적인 믿음과 인내로 대처하는 강인한 사람이 되어야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시련을 통한 훈련이 우리에게 세 가지 점에서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첫째,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10절). 

부모는 자기 마음대로 자녀들을 징계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고 역경을 허락하시는 것은 반드시 우리의 유익을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유익이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지금의 어려움이 내 죄와 상관이 없는 것임에도 혹시 내가 뭔가 잘못해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 나쁜 습관, 말 잘못한 것 등 우리의 잘못을 살피고 회개를 합니다. 시련은 이처럼 우리를 회개하게 만들어 거룩하게 합니다. 

만약 우리의 잘못이 고난과 직결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에게 생각나게 하시는 잘못이 있다면 숨기고 변명할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의 언행심사를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라고 하실 때는 여러분이 회개하고 훈련받고 깨끗해지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역경은 유익이요 거룩해지는 축복입니다.

둘째, 의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게 한다고 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11절). 하나님께서 채찍을 드실 때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셔서 채찍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깨닫고 회개하고 거룩하게 되도록 하옵소서”라고 하면 우리 속에 평화의 열매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더라도 시련은 닥칩니다. 우리가 미리 준비하고 훈련하고 연단하지 않으면 작은 시련만 닥쳐도 걱정이요 고민이요 밥도 못 먹습니다. 그러나 시련이 올 때마다 한 가지씩 배우고 또 배우면서 삶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은 웬만한 시련에는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감이 생기고 마음이 편안합니다. 

제가 이번 ‘평목원’ 강의를 위해 ‘고난의 신학’을 주제로 책을 썼습니다. 그 서론에 이런 내용을 담게 되었습니다. 저의 고난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공산 치하의 평양에서 교회 다닌다고 대나무자로 맞고 몽둥이로 맞았습니다. 중학교 입학 구두시험에서는 주일에 학교에 안 나온다는 문제로 선생님께 혼이 났습니다. 선생님은 “너같은 아이는 공부할 필요가 없어. 나가!”라고 하셨어요. 피난을 와서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어린 시절에는 이모집에서 자라면서 외로움과 싸우느라 참 힘들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홀로 서울에 올라와서 앞으로 60년 동안 할 고생을 그 3년 동안 다해버렸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이 없어 헤매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밤에는 갈 곳이 없어서 가방을 들고 남산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수많은 불빛이 내려다보였지만 내가 잘 집이 없는 것입니다. 졸업하는 날조차도 춥고 아무 것도 없는 친구방에 얹혀있었습니다. 그 때는 참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얼마나 강하게 훈련을 받았든지 그 이후로는 인생이 너무나 편안했습니다. 이미 훈련을 다 받았기 때문에 웬만한 일에는 눈도 껌뻑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학생이 된 후로는 일사천리요, 세상에 어려운 것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어렵다 해도 고등학교 3년 동안 겪은 고생과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저에게 왜 그렇게 행복해보이냐고 묻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제 가슴에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철저히 훈련을 시키셔서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남들이 어렵다고 해도 저에게는 어렵지 않습니다. 역경을 통해 미리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시련과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여러분이 훈련 받고 자신감을 얻어 인생을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훈련을 잘 받으면 유익합니다. 그러나 훈련을 잘 받지 않고 낙제를 하면 합격할 때까지 계속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시련이 올 때마다 그것이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로 여기는 적극적인 믿음으로 그 시험에 합격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려움을 많이 겪고 훈련을 거치면 삶에 평화의 열매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깁니다. 심장이 약해지고 시력과 청력도 약해지고 손가락도 아프고 노쇠 현상이 나타납니다. 겉사람은 어쩔 도리가 없지만, 사도바울의 말처럼 속사람은 계속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암 투병을 하던 어느 분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암이 제멋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암은 사랑을 병들게 할 수 없다, 희망을 깨뜨릴 수 없다, 믿음을 녹슬게 할 수 없다, 평화를 앗아갈 수 없다, 자신감을 파괴할 수 없다, 우정을 죽일 수 없고 추억을 지워버릴 수도 없다, 용기를 없앨 수 없고, 영혼을 침범할 수 없고, 영원한 생명을 축소시킬 수 없다, 성령의 불을 끌 수 없다, 부활의 능력을 약화시킬 수 없다.” 

그 분은 비록 몸은 상했으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영원한 소망 때문에 그 속이 강해져서 이런 멋진 글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강한 자, 연단 받은 자, 가치를 아는 자, 믿음이 있는 자, 적극적인 인내가 있는 자, 시련이 유익하다고 믿고 그것을 경험하는 자만이 쓸 수 있는 글입니다. 

여러분도 어려움을 당할 때 훈련을 받음으로써 내면이 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불치병이라도 여러분의 영혼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하십시오. 몸은 심한 고통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확실히 믿으면 치료 중에도 영혼만은 계속 강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련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면 어떤 시련도 우리를 낙심시킬 수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보면 힘이 솟아오릅니다. 그 손은 나를 괴롭히는 손이 아니라 사랑의 손입니다. 약해진 내가 새 힘과 용기를 얻어 몸과 마음과 영혼이 강건하도록 만듭니다. 우리가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우리의 힘 없이 쳐져있던 손을 올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12절) 시련을 당하면 기운이 빠져서 손이 쳐지고 다리가 흔들거리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 용기가 생깁니다. 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어 몸이 연약해지면 우리 영혼은 하나님을 더욱 더 바라보게 됩니다. 젊었을 때는 하나님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건강하지요, 자기 능력과 머리로 뭐든지 다 할 것 같지요, 세상의 꼬리를 잡아 흔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젊은이 여러분,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우리가 연약해질 때 하나님이 잘 보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그 손길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연세 많으신 분들,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도착할 날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지나간 시간이 남은 시간보다 많습니다. 오늘의 역경은 잠시요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픔도 눈물도 고통도 한숨도 없는 그 영원한 나라를 향해 계속 전진해나갈 것입니다. 

훈련을 해야 됩니다. 몸을 쳐서 복종을 시켜야 됩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켜 훈련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습니까? 여기 앉은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사도바울처럼 고생을 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매를 많이 맞았습니까. 어떤 때는 사람들이 바울을 때리고는 죽으라고 그냥 성 밖에 던져버린 적도 있습니다. 굶기도, 헐벗기도 많이 했습니다. 바울의 몸은 바울에게 항의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이봐요 바울 선생, 내가 얼마나 두들겨 맞고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제 제발 은퇴하세요. 나는 이상 더 못가겠어요.” 그러나 바울은 고난을 통해 자기 몸을 복종시키고 단련해서 복음의 종을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전 세계가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역경의 유익을 우리는 적극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어떤 종류의 역경이든지 역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독수리처럼 날게 만드시려는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좀 덜 사랑해주시면 좋겠는데…’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경은 우리에게 유익이 있기 때문에 강력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믿음, 적극적인 인내, 이런 적극성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힘을 주고 우리를 살립니다. 

뉴욕 타임즈에 어느 심장병 전문가가 쓴 글이 있습니다. “낙관주의는 심장병 환자에게 생명이다. 그러나 비관주의는 죽음이다. 건강한 인생관은 심장병을 낫게 한다.” 역경에 대해 어떻게 믿고 어떻게 참느냐 하는 것과 역경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를 잘 이해해서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역경은 우리에게 축복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파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역경을 통해서 마치 용광로 속에 들어갔다 나온 순금처럼 거룩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힘을 얻어야 됩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앞에 놓인 인생의 경주를 인내로 힘껏 달려서 승리자로 골인하기를 바랍니다. (김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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