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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출 13: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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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출 13:17~22)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가수가 되고 싶어 오디션을 보았는데 떨어졌습니다. 본인은 열심히 연습을 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는데 떨어졌습니다. 오디션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자그마치 18번이나 떨어졌습니다. 떨어진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못생겨서 떨어졌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쌍꺼풀이 없어서 떨어졌답니다. 그는 떨어지고 또 떨어졌기에 포기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서 계속 오디션을 보았습니다. 마지막 19번째 그는 오디션에 합격을 했습니다. 

오디션에서 그를 뽑은 기획사 대표가 자신을 뽑은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지금 그를 뽑아주지 아니하면 죽을 것만 같더랍니다.’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을 단 한마디로 표현해주는 말입니다. 바로 이 사람은 한국과 아시아를 뛰어 넘어 세계적인 가수로 발돋움하고 있는 가수 비입니다. 비가 이런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잠을 자면 꿈은 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잠을 자지 않고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연습에는 장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죽을 만큼 노력하자. 안심하면 무너진다. 그런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는 노력하고 또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뉴욕타임스가 뽑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사람으로 뽑혔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전세 항공기를 타고 세계를 누비는 월드스타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 오디션에서 합격했다면 지금의 비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세르반테스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일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단 한번의 사건으로 성공한 사람은 단 한번의 실패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만나는 고난을 참고 인내하고 그것을 극복하며 사는 것을 인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눅8장에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아무리 좋은 땅에 씨를 뿌렸다 하더라도 인내없이는 결실을 거둘 수 없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고 견디는 것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4).’ 인내와 연단 없이 소망을 이룰 수 없음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지개를 보고 싶다면 비가 오는 것을 참아야 하고, 비온 후에 땅이 굳어지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먹는 패스트 푸드, 금방 먹기에는 좋은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사실 우리 몸에 좋지 않습니다. 슬로우 푸드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몸에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먼저 본문 17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다는 겁니다. 출애굽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의 길로 향하면 3-4일이면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혹 전쟁을 경험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직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아무리 비가 쏟아지더라도 그릇을 엎어 놓으면 그 그릇에 물을 담을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없는 은혜를 주셔도 내 마음을 닫아 놓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축복으로 알지 못하고,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합니다. 감사하지 아니합니다. 만족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평불만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3가족이 사는 가정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직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어머니는 그것을 쪼개고 아껴서 가정을 꾸려갑니다. 그리고 대학교 다니는 아들이 있습니다. 누가 돈을 가장 용감하게 쓸까요? 그것을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제일 용감하게 돈을 쓰는 사람은 자식입니다. 아무리 용돈을 줘도 부족하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을 안 벌어봐서 모릅니다. 이 만한 돈을 벌기 위해 얼마나 땀을 흘리고 수고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학교 졸업하고 직장생활하면서부터 돈 귀한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은혜를 주시고 축복을 주셔도 귀한 줄 몰라요. 머리로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경험하면서 머리에 있는 것이 가슴으로 내려와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기 시작하면서 은혜를 받기 시작하고 은혜를 받아야 입술을 통해 감사와 찬양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까운 길이 아니라 멀리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인지, 축복이 축복인지 알면서 입술로 감사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18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가까운 길, 빠른 길이 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성경에는 광야 길이라 했지만 사실은 길이 아니라 그냥 광야일 뿐입니다.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걸어가는 곳이 곧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광야 길로 인도하셨을까요? 

광야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풀한 포기 나지 아니합니다. 여름에는 얼마나 더운지 모릅니다. 광야에 홀로 남겨지면 일사병으로 죽기 십상이요 저녁이면 기온이 뚝 떨어져서 추위로 살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게다가 먹을 것도 없습니다. 마실 물도 없습니다. 거처할 그늘도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시면 조그만 물웅덩이가 생겨나고 여기저기서 물 포기들이 자랐다가 비가오지 않으면 또 말라죽습니다. 광야는 한마디로 온전히 하나님의 처분대로 살아야 하는 곳입니다. 주시면 먹고 마시고, 거두시면 굻어야 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이 곳보다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기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광야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광야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 되게 하는 곳이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게 하는 곳입니다. 내 뜻대로 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처분대로 되는 곳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만 이루어지는 곳이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눅15장에 나오는 탕자는 재물만 있으면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될 줄 알았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될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받아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의 품을 멀리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그 즐거움도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인생의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있는 재물 다 탕진하고 남의 집에 더부살이 하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돼지를 치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워가며 힘든 날을 보냈습니다. 그는 인생의 광야에 홀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축복인지 깨달으며 그는 자신이 죄인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결국 아버지 품으로 돌아옵니다. 

인생의 광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사랑의 사람으로, 용서의 사람으로, 겸손의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곳입니다. 광야에 홀로 서 있으면 이제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내 생애를 인도하시고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 붙드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여러분 내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아니하면 기도안합니다. 이제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오기 시작하면 수험생 학부모들이 얼마나 열심히 기도 생활하는지 모릅니다. 지금까지는 내 힘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애썼는데 시간이 다가갈수록 확신이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결정권은 하나님이 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마다 금요일마다 시간마다 기도하는 학부모들이 많아집니다. 자녀들의 진로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것은 학부모들뿐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어렵고 힘든 고난의 문제가 내 앞을 가로막지 아니하면 기도안합니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기도가 나옵니까? 안나옵니다. 기도해도 그냥 입술에서만 나오는 기도일 뿐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면 절박한 기도가 나옵니다. 눈물의 기도가 나옵니다. 금식하며 밤새워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주님을 붙듭니다. 왜냐하면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4:6)’ 

저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를 읽을 때마다 한나의 마음이 제 마음속에 저며 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한나로 하여금 잉태치 못하게 하셨습니다. 출산하지 못하는 아픔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아무리 남편이 잘해주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도 그 아픔을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동서 브닌나가 자식없다고 자신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하나님 앞에, 마음이 괴로워서 통곡하며 ‘하나님 나에게도 아들을 주세요.’ 간절히 간구하는 한나의 기도.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여성들을 많이 만나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 한나의 절실한 기도가 자신의 기도가 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응답해주신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잉태하고 출산하는 여성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생의 광야를 종종 경험합니다. 그 곳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고 보잘것없는 없는 존재인지. 하나님 앞에 깨어지고 부서져야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합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행합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자기 뜻대로 삽니다. 자기가 제일 똑똑한지 압니다. 자기가 노력하며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릇행하며 살아갑니다. 고난당하지 않으면 우리는 교만해집니다. 어느 정도 교만해지느냐 자신이 교만한지 모를 정도로 교만해집니다. 하지만 교만한 사람의 앞길에 어둠이 내립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망하는 첫 번째 길은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교만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당하면서 겸손해집니다. 겸손해지면 낮아지고 낮아지면 수용성이 좋아집니다. 산골짜기의 개울물이 흘러 흘러 마지막 가는 곳이 바다입니다. 왜 바다에 모입니까? 바다가 가장 낮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받아들입니다. 

사람이 고난당하면서 겸손해지고 겸손해지면서 낮아지고 낮아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면서 말씀을 가까이 하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면서 복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고난당하는 것이 유익이라 노래하는 것입니다. 고난당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못합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부귀영화를 누렸던 인물은 솔로몬입니다. 자그마치 처첩만 천명에 달했습니다. 게다가 그가 먹고 마시는 그릇은 다 금이었고 은을 돌같이 여겼습니다. 더 이상의 부귀영화를 말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살았던 그가 전도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는 전도서를 다음과 같이 마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사람됨의 목적이요 행복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혜도 가졌고 부귀영화도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음을 후회함으로 전도서를 마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배우게 깨닫게 되는 곳이 바로 광야 길입니다. 우리는 광야 길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내가 인생의 광야 길에 홀로 서 있다면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향해 손을 내밀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21절로 2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고 지켜주셨다는 이 말씀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내가 의지할 누군가 나와 함께 걸어주고 빛을 밝혀준다면 아무리 깊은 산 어두운 밤이라 해도 걸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어떠한 여건 속에서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나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북적거리는 군중 속에 내가 있다 하더라도 정작 나와 함께 해주는 이가 없다면 우리는 군중속의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풀 한포기 나지 않고 마실 물웅덩이도 없고 황량한 광야라 할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그 곳은 복 있는 곳입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그 길은 축복의 길이며 형통의 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9).’ 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양과 소가 없어도 좋습니다.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기에 내가 기뻐할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구원의 하나님 바라보면 주님이 나의 힘이시오 능력이시오 나의 만족이 되십니다. 사람을 보면 만족할 수 없고 만족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바라보면 만족하며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함께 해주고 인정해주고 박수를 보내는 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길이라면 그것은 불행의 길입니다. 

저에게는 어렸을 적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습니다. 5-6살 때 아빠 엄마 그리고 형들의 손을 잡고 깜깜한 새벽에 새벽기도를 다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온 가족들이 새벽기도회로 가면서 찬송을 부르던 그 기억은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겁니다. 깜깜한 새벽이지만 부모님이 함께 있고 형제들이 함께 하고 그리고 찬송을 부르며 교회를 향해 가는 그 길에는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기쁨의 길이었습니다. 

하물며 한 평생 사는 동안,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나의 삶에 구름 기둥이 되시고 불 기둥이 되시는 주님께서는 늘 나와 함께 하시고 지키시는 나의 선한목자가 되십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어려운 상황과 처지에 있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동행하시기에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나의 힘으로는 너무나 힘들고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계시기에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나의 손을 붙드시기에 어둠의 터널을 지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부모님의 지극한 보살핌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건강한 사람으로 살 수 없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애를 키워보니까 돌 지나서 아장아장 걸을 때, 뭐가 뭔지 모릅니다. 뜨거운 물에 손을 집어넣으려 하고, 날카로운 칼을 덥석 집으려 하고, 좀 더 커서 손에 젓가락을 들고서 벽에 이상하게 생긴 구멍에 자꾸 집어넣으려 하는데 부모님은 안 된다고 막습니다. 말 안 들으면 때려서라도 넣지 못하게 합니다. 아직 겁이라고 하는 것을 모를 때니까 높은 곳에서 막 뛰어내리려 합니다. 아마 이런 세심한 부모님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될 수 없었는지 모릅니다. 

하물며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보살핌이요 인도하심입니다. 지금 내가 어떤 처지에 있다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기에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1:31)’ 지금 내가 고난 중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안으시고 이 곳까지 인도하셨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게 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사44:21).’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을지언정 주님은 우리를 늘 가슴속에 품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도 자기가 낳은 자식이 어디에 가 있더라도 눈에 선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이 자신의 품을 떠나 있는 자식에게 늘 가 있습니다. 그것이 부모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가 물건을 살 때 귀한 것일수록 많은 대가를 지불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잊고 주님의 품을 떠나는 일이 있을지 몰라도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잊지 못하십니다.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포기하기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 지불하신 대가가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소중하고 귀한 존재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 중에 이 말씀이 너무나 가슴에 와서 닿습니다. ‘떠나지 아니하니라.’ 주님은 떠나지 못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깝고 편안한 길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오히려 우리를 광야 길로 인도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광야 길에 참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축복의 하나님이 오늘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광야 길에 서 있는 우리와 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방충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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