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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왜 화를 내느냐 (창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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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왜 화를 내느냐 (창 4:1~10)


사람이 살다가 보면 여러 가지 일을 만나게 됩니다. 그중에 하나가 화를 내는 것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네가 왜 화를 내느냐 물으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해 보셨는지요?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복 주시면서 나는 제외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가?’이런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것은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것 저것 안 되고, 어려운 일이 계속 될 때, 자신을 돌아보고 참아 기다리지 못하고, 답답해하고, 불평하고, 분노하고, 마침내 자신도 죄를 짓고, 남에게도 아픈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먼저 가인과 아벨에 대해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그런 사람이 나옵니다. 본문에는 ‘가인과 아벨’이라는 형제가 소개됩니다. 그중 ‘가인’은 최초의 범죄자, 살인자로 ‘아벨’은 최초 살인죄의 희생자로 죽어간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아담과 이브가 낳은 아들들의 이름 3명 ‘가인, 아벨, 셋’이 소개됩니다. 이것 때문에 ‘가인은 누구와 결혼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인, 아벨, 셋’ 이렇게 아들 3명만 낳았는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아담의 장남, 차남이라는 의미보다는, 아담과 이브의 대표적인 아들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아담이 가인, 아벨, 셋을 낳았다고 했을 때(창14:1-2, 25) 아담의 나이는 벌써 130세였습니다. 그 후에도 800년을 더 살면서 자녀(sons and daughters)를 낳으며 살다가(창5:4) 930세에 죽었습니다.(창5:5) 아담이 930세에 죽었다는 말에 ‘무슨 소리냐,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느냐?’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입으로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런 얘기를 하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미 과학자들에 의해, 노아 홍수(대홍수) 이전에 사람들은 오래 살았음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성경에 나오는 ‘장수’에 대해 논쟁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불신자들이나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는 분들은 서점에 가면 ‘성경 신비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라는 제목의 책이 있고 그에 관련된 책이 많이 있으니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과학은 보고 믿는 것이지만 신앙은 믿고 보는 것입니다’ 일단 한번 믿고 시작하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됩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은 당시 아담의 자녀들 중에 대표적으로 소개된 인물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짐승을 기르는 목축업을 했습니다. 이것도 당시 사람들의 대표적인 직업이었습니다. 어느 날 가인도, 아벨도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것은 받으셨지만,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아벨의 것은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을까요? 성경에서 하나님이 왜 가인의 것은 거절하셨는지 하나님이 왜 아벨의 것은 받으셨는지 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같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분도 있고 받지 않는 분도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예배를 받고 누구의 예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까?

3절에 보면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예물을 드렸습니다. 4절에 보면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가인은 그냥 추수한 것 중에서 드렸고, 아벨은 첫 새끼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생각해 보고, 잘 골라서, 정성껏’ 드렸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오늘 시간이 되었으니 드리는 사람하고, 철저하게 생각하고 준비되어 있는 모습으로 드리는 사람하고는 은혜 받는 것이 다르고 축복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그 시간이 낭비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11장에 잘 지적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제물이 있는 예배를 드렸고, 가인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 맘에 드는 제물이 있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2009년 7월19일 주일은 오늘 하루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예배에 정성을 드려서 드리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인과 같이 일상적이고 평범한 예배를 드리십니까? 아니면 아벨과 같이 정성이 담긴 예배를 드리십니까? 아벨의 정성이 담긴 예배처럼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마르다는 분주합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듣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분주하게 예배드리지 말고 정성을 다해서 드리시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고 우리에게는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 있는지?’ 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누가 무엇을 드렸느냐?, 요즘에 목사가 어떠냐?, 사모가 나서기를 좋아한다, 교회가 어떠냐?, 제도가 어떠냐? 고 이러쿵저러쿵’ 합니다.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기보다 ‘자신 이외의 일과 사람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이유를 핑계 삼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소홀히 하고, 함부로 한다면 결국 자신에게 손해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왜 손해 보며 예수를 믿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것을 생각해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자는 것입니다.


 2. 가인의 분노에 대해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분노는 왜 일어납니까? 가인은 자신의 잘못된 예배로 인해서 하나님께 거절당했습니다. 외면당했습니다. 그러자 가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창4:5절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잘못은 누가 했습니까? 가인 자신이 잘못해 놓고 분냅니다. 분내니까 안색이 변합니다. 여러분, 분을 내고, 안색이 변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물론 살다가 분을 내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화가 나고 분을 내면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하얗게 되기도 합니다. 

저도 분내고 얼굴색이 변할 때가 있습니다. 살면서 화를 낼 수도 있고, 얼굴색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엡4:26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잘못해 놓고는 자기가 분을 내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는데 가슴속에 묻고는 두고 보자고 한다면 오래 못삽니다. 가인은 분을 품고(분을 품었다는 것은 독을 품었다는 뜻입니다.) 독을 품었으니 그 속에서 나오는 말이나 행동이나 다 독입니다. 그 독에 동생이 죽은 것입니다. 그는 동생을 죽였습니다. 분내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분을 오늘 이 시간에 다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일찍 죽을려면 가슴속에 품고 있어도 됩니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 신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발표했습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맥박을 증가시키고 혈압을 상승시켜 협심증과 심근경색 등 돌연사와 직접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국민일보 5월 10일] 다시 말해서 돌연사의 주원인이 ‘스트레스’라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라는 말은 ‘강조, 중점, 압력, 압박, 긴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트레스의 대부분이 ‘분노’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분노는 인간을 비참하게 하는 죄 중의 하나입니다. 엄마의 젖을 빠는 아기도 화가 나면 젖을 빨지 않는다고 합니다. ‘분냄’은 자신의 삶의 방법까지도 포기해 버릴 수 있는 무서운 것입니다. 분노는 부부사이도 갈라놓고 심하면 가정을 파괴해 버립니다. 

분노는 사탄이 이용하는 가장 적절하고 쉬운 도구이기도 합니다. 분노는 신앙적인 질서를 무너뜨리고 교회에 등을 돌리게 하고 결국 하나님을 등지게 하기도 합니다. ‘원망과 분노, 분노와 원망’ 너무도 쉽고 편하게 짓는 죄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화를 내십니까? 지난 한 주간 동안에 몇 번이나 화를 내셨습니까? 우리는 차분하게 사는 듯해도 의외로 화를 많이 냅니다. 사람들 중에는 화를 내는 것 때문에 인생을 망치고, 비난을 받고, 친구를 잃어버리고,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화를 내는 것이 죄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분 내기를 더디 하라’했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만약 우리가 삶 속에서 저지른 죄나 허물을 보시고 그때 그때 분을 내셨다면 우리가 과연 ‘오늘을 살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해 감정이 상해 분노하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을 ‘한심하다’ 여기며 분노하는 것은 인생의 즐거움은 물론 수명까지 단축시킵니다. 

우리는 욕심 많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각과 말, 행동 그리고 기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가 무엇이라고 해도 스트레스 받지 말고 분을 가라앉히고 화목을 도모하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 요소가 있어도 주저하지 마세요.


 3. 방해에도 주저앉지 않은 바디매오 

막10:46-52절에 어느 날 시각장애인, 바디매오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기적을 행하신다는 분이 지나가신다는 소리에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바디매오가 전능하신 분이시니 다 알아들으시겠지 하며 작고 경건하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했을까요? 바디매오가 얼마나 시끄럽게 소리 질렀으면 주변 사람들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겠습니까? 

바디매오는 ‘잠잠하라’고 하며 예수님께 접근하는 것을 막아선 사람들의 힘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바디매오는 더욱 심히 소리 질렀습니다. 꾸짖는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소리 지른 바디매오의 간절함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도 우리 교회 기도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시고 우리 교회의 소원들을 하나씩 이루어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먼저 믿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서려는 사람들, 새로 등록 한 사람,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다 이사와 교회의 일원이 되려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온지 얼마 안 되었으니 ‘잠잠하라’고, ‘나서지 말라’며 막아섭니다.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그런 방해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주변사람들이 시끄럽다 잠잠하라고 했지만 바디매오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를 쳐서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처럼 그것을 뛰어넘는 신앙인으로 성숙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심각한 목사의 기도 제목입니다. 

기존의 교회 구성원이, 오래된 사람들이, 직분 가진 사람들이, 일 많이 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막지 않아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교회에, 부서에, 일에, 봉사하려고 다가서면 ‘조용히 있어. 온 지도 얼마 안됐으면 나서지 말어. 잠잠해’라고 하며 방해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해를 만나면 화를 냅니다. 불평합니다. 좌절합니다. 체념합니다. 포기합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으면,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세상에는 주어진 기회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바디매오는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해에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태도에, 다른 사람의 막아섬에, 다른 사람이 기분 나쁘게 함에 노여워하지 않았습니다.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바디매오와 같이 포기하지 말고 여러분의 달란트대로 힘써 봉사하시고 충성을 다하여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가져오기를 바랍니다.

자기 절제를 해야 합니다. 수많은 가인의 후예들은 쉽게 비교합니다. 쉽게 분노하고 쉽게 죄를 짓습니다. 자신의 허물, 자신의 잘못, 자신의 죄를 돌아보지 않은 채 다른 사람, 형제 같은 사람, 잘 된 사람을 미워합니다.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지 않은 가인은 아벨이 하나님께 사랑 받는 것까지 나쁘게 보고 아벨을 미워했고 애매한 아벨을 죽여 버렸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나쁘게 보고 나쁘게 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무조건 자기 느낌대로, 자기가 배운 대로, 자기 경험에 따라 함부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척 보면 알아, 내가 누구냐, 내 눈은 못 속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이런 말을 하는 분이 있다면 그런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지혜, 경험, 판단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레지던트 과정을 밟는 두 의사가 점심을 먹고 나서 병원 앞 벤치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남자가 두 다리를 모으고 안짱다리로 걸으면서 두 팔을 뒤틀고 고개를 기묘하게 꼬면서 걸어오는데, 얼굴에 인상을 쓰며 비오듯 진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한 레지던트가 말했습니다. ‘안됐어. 뇌성마비로군’ 그러자 다른 레지던트가 대꾸했습니다. ‘천만에, 편두통성 간질이야’그런데 잠시 후, 그 두 사람 앞에 멈춘 남자가 더듬더듬 물었습니다. ‘저, 화장실이 어디 있습니까?’ 화장실 가고 싶은 사람을 뇌성마비환자로, 간질환자로 만들기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 속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 판단이 ‘절대’라는 교만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힘들고 어려운 일 많습니다. 가슴 치고 탄식할 일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신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캄캄한 세상에, 우리가 있음으로 희망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함부로 말하고 쉽게 화내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르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 마음에 들지 못하게 살며 절제할 줄 모르면 가인처럼 되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 절제(self-control)를 합니다. 자기를 통제할 줄 압니다. 생각난다고 다 말해 버리면 안 됩니다. 입맛이 당긴다고 다 먹으면 탈납니다. 힘이 있다고, 칼이 있다고 마구 휘두르면 안 됩니다. 불러 준다고 아무데나 다 가면 안 됩니다. 갈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분별하는 것이 자기 절제입니다. 속도가 빠를수록 브레이크가 잘 들어야 안전하듯이 사람도 자기 통제를 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삶에 지치고, 쉽게 분노하고, 남의 탓만 잘하며 사는 우리를 향해 물으십니다. 마치 가인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네가 왜 화를 내느냐?’며 잘못을 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그러셨듯이 우리에게 오늘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며 회개하면 용서하십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하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되게 해 주십니다.

가인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동생 아벨에게만 신경을 썼습니다. 옆의 사람(동생)이 어떤가, 옆의 사람(동생)이 어떤 복을 받았는가에 신경 쓰며, 자기와 비교하며 분노하였고, 살인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6절 ‘네가 왜 화를 내느냐, 네 얼굴색이 변함이 어찜이냐’ 7절 ‘네가 좋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어찌 얼굴을 들지 못하겠느냐’, 8절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10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반복적으로 물으시면서 가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화만 냈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고,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유지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가인처럼 ‘되는 대로, 적당히, 아무렇게나’ 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날 때 첫 새끼 양을 고르는 정성을 보인 아벨처럼 ‘보다 나은’ 섬김이 되기 위해 ‘보다 나은’ 드림이 되기 위해, ‘보다 나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있는지 확인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충 대충 했던 가인은 결국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분을 내고, 살인까지 저질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왕에 신앙생활 할 바에야 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외면당하는 자가 아니라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 받는 자리에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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