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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영이 임하시면 (겔 36: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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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영이 임하시면 (겔 36:22~27)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는 자는 것이 믿음입니다. 
연신내 산자락 밑에 한국기독교 수양관이 있습니다. 그 수양관 식당 벽에 여러 점의 그림이 있는데 유독 저는 한 그림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 그림은 노도광풍과 싸우며 배의 키를 잡고 서있는 선장 뒤에서 선장의 어깨를 감싸고 계시는 주님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저는 저의 미래에 무슨 일이 있을지 전혀 알 수가 없지만은 제 미래가 누구의 손 안에 있는지 누구의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감사하며 안도할 수 있습니다. 내 미래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그 손을 바라보고 그 주님께 내 인생의 전체를 위임하고 위탁하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시편 25:1~2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도 슬픔과 아픔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개인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홀로 주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맷돌은 천천히 돌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같이 보일 때가 많이 있지만, 하나님의 맷돌은 곡식을 곱게 빻아 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했기 때문에 BC 598년 여호야긴 왕 때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이 대군을 몰고 와서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왕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3차에 걸쳐서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발 강가 버드나무 가지에 거문고를 걸어놓고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70년간 눈물을 흘리면서 울었습니다. 

때가 이르고 하나님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파사의 고레스를 일으켜서 바벨론을 멸망시켰습니다. 하나님이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서 고국으로 돌아가라고 명령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 24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에스겔 36:24)

마치 지난 주간에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이북에 가서 자국민인 두 여기자를 찾아서 데리고 미국으로 들어간 것과 흡사한 장면입니다. 그 클린턴 대통령의 행보를 보며 우리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색이 너무나 초라해서 또 슬펐습니다. 에스겔은 36:24에 기록된 역사를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이렇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시편 126:1~2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믓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시편16:1~2)

큰 일, 곧 대사를 행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해방이라는 대사를 행하심과 아울러서 네게브 사막에 물이 흐르듯이 그들이 걸어가야 할 사막 가운데로 시온의 대로를 열어놓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큰 은혜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큰 일 행하심을 우리가 또 영적인 측면에서 조명해보면,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성경에 말씀하시는 것처럼 죄를 지은 모두가 마귀가 이끄는 대로 지옥을 향해서 끌려가고 있습니다. 이 절망적이고도 비참한 행보 앞에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세우시고 당신의 아들을 거기에 매달아 우리에게 속죄의 거룩한 은택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6:18보니까 ‘이제는 십자가 때문에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도다’라고 기록합니다. 어떻게 이같은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그 사건에 대해서 이사야 53:4~6에 이렇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4~6)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심’ 이것이 바로 대속사건인 것입니다. 이 대속이라는 말에 의해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과 위상의 변화를 받아서 만군의 하나님을 ‘아바 아바지’로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우리가 갖게 됩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내 더러운 모든 죄가 예수에게 전가되는 것이고, 예수의 거룩한 의가 나에게 옮겨 와서 내 죄와 예수의 의를 바꾸어 놓은 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로 의인이 된 사람은 성령으로 굳은 마음이 변화됩니다. 
성경이 의인이 된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새 영을 부어주겠노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이 새 영은 성령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 이 권능이라는 말은 ‘두나미스’란 말입니다. 이 두나미스란 말에서 다이너마이트란 말이 나왔습니다. 이 권능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돌같이 굳은 마음이 깨져서 살 같은 마음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마음 즉 자신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기의 사람의 마음은 굳은 마음인 것입니다. 굳은 마음은 죽은 마음인 것입니다. 

이 굳은 마음이 어떤 마음들인가 오늘 성경에 에스겔 25절에 보면 ‘굳은 마음’이라는 단어 앞에 아라비아 숫자 1이 작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각주를 따라 아래에 보면 ‘돌’을 뜻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이라는 말의 각주에는 ‘혹은 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돌 같이 굳은 마음이 새 영에 의해서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함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굳은 마음은 인색한 마음입니다.

마음이 굳었다는 말은 사랑의 범위가 자기가 자기 가족에 국한되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 등장하는 부자와 거지의 비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부자는 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있습니다. 고운 베옷은 그 가격이 그 당시 동일한 무게의 금보다도 배가 더 비쌌던 직물입니다. 그렇게나 비싼 옷을 입고 앉아서, 호화롭게 매일 매일 파티를 열고 있는데, 나사로라는 거지가 대문 앞에서 온 몸에 피부병이 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나사로가 부자의 밥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었다고 합니다. 그 부스러기가 무언가요? 그 당시에 부자들은 말랑말랑한 빵을 찢어서 손을 닦고 입을 닦아서 마당에 뿌렸습니다. 이것이 부스러기입니다. 입 닦고 손 닦은 그 더러운 빵 조각을 주워 먹고 이 나사로는 굶주린 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앞의 이 거지에게 이 부자는 빵 한 조각 주었다는 말이 없고 물 한 모금 마시게 했단 말이 없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태복음 5:46)

그 당시에 죄인의 대명사가 세리와 창기였습니다. 그런 더러운 죄인들도 그 정도는 다 하고 있다고 주님께서 책망하고 있습니다. 


굳은 마음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굳은 마음은 자기의 범위에 갇혀있는 마음입니다. 신앙적으로 자기 부정이 없는 마음입니다. 자기 부정이 없으면 하나님에 대해서 긍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인간적으로 보면 굳은 마음은 배려하는 마음이 없는 마음입니다. 

“남의 짐을 지고 슬픔 위로하면 주가 상급을 주시겠네” (찬송가 377장 3절)

남의 짐을 지고 슬픔을 위로하는 사람 배려하는 마음에 하나님께서 하늘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로마서13:15에도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9:4에는 ‘예루살렘에서 행해지는 가증한 일로 눈물 흘리면 우는 사람의 이마에다가 인을 치라’고 합니다. 인을 치는 행위는 ‘그건 내 백성이다.’라는 뜻입니다. 동정하며 타인의 슬픔을 위로하는 사람이 진실로 성령 충만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유명한 찰스 L. 알렌이 쓴 『12가지 인생비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지옥을 갔습니다. 지옥 가보니까 너무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위를 보니까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 여기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렇게 간구하니까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살아생전에 좋은 일 한 것이 무엇이 생각 나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번뜩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몇 달 전 자기가 물가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물 위에 거미 한 마리가 떨어졌어요. 그래서 무심코 막대기로 거미를 건져준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 거미 한 마리를 구해줬다고 하니까 그 순간 하늘에서 금줄이 주루룩 내려왔습니다. 그걸 타고 천당으로 가려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도 좀 같이 가자’고 그의 발을 붙들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자기의 오른발 왼발을 붙든 사람들을 발로 차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차버린 그 순간에 자기에게 내려왔던 금줄이 뚝 떨어졌답니다. 

칼 바르트는 사람의 마음에서 마지막으로 무너져야 될 벽은 에고(ego, 자아)라고 말합니다. 그 벽을 무너뜨려야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벽 속에 갇혀서 교만해져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는 폐물이 되어가고 맙니다. 

굳은 마음은 수용성이 없는 마음입니다.
굳은 마음의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고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인간관계가 다 깨지고 말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큰 극장에서 쇼가 막 벌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웃으면서 손뼉을 치고 있는데 극장 지배인이 급히 무대에 올라와서 마이크를 잡고 극장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말도 쇼인줄 알고 박수치면서 웃고 앉았다가 다 타죽었답니다. 

굳은 마음은 문제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사람입니다. 
10월 달만 되면 잠실 종합운동장에서 고대 연대가 붙어가지고 고연전, 연고전을 시작합니다. 수만명 젊은 사람 모여서 떠나갈 듯이 노래 부르는데 꼭 안 빠지고 부르는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이장희씨가 부른 ‘그건 너, 너 때문이야’ 하는 노래입니다. 

그건 ‘너 때문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은 트러블 메이커입니다. 그건 ‘나 때문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은 피스 메이커입니다. 주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거울이 나보다 먼저 웃는 것을 보셨습니까? 내가 웃어야 거울이 웃습니다. 문제원인을 남에게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일평생 문제를 자꾸 확대시키는 문제인물이 될 것이고, 문제를 원인을 나에게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문제를 줄어들게 하고 결국 문제를 소멸시켜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굳은 마음은 시기하는 마음이고 질투하라는 마음입니다. 

가인이 자기의 제사는 안 받으시고 자기 동생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니까 그 마음속에 불같은 시기심이 나서 들에서 일하고 있는 동생의 뒤로 가서 동생을 쳐죽였습니다. 시기심 때문에 그랬습니다. 사울왕은 참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앙과 마음 씀씀이가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무엘을 시켜서 그 머리에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물멧돌로 골리앗을 물리치고 난 다음에 승리하고 돌아 올 때 많은 여인들이 양 길가에서 서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사울 왕이 일평생 그 시기심을 마음에서 뽑아내지 못해고 칼을 들고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따라 다녔습니다. 

이같이 마음에 새 영이 임하면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서 다이나마이트가 바위를 폭파시키는 것 같이 굳은 우리의 마음을 깨뜨리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부드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부서진 마음입니다. 깨어진 마음입니다. 상처난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재산은 받으시고 가인의 재산은 왜 거부하셨는가? 창세기에 아무리 봐도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레위기2:4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 (레위기2:4)

반드시 곡식으로 드리는 소제물을 그 곡식을 고운 가루로 만들어서 기름과 함께 드리리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고운 가루가 무엇입니까? 이 가루가 방아 속에 들어가서 껍질을 홀랑 벗어야 되고 그 다음에 이 하얀 육질부분이 더 부서질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부서지는 것 그것이 고운 가루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내가 껍질을 벗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고운 가루가 된다는 것은 내가 준단 말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는 좋은 훌륭한 제물이 될 수가 있고 사람에 대해서는 좋은 음식물이 될 있는 것입니다. 부서져야 되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으로 응답받는 삶을 살아갑시다.

요즘은 이사 갈 때 포장이사도 하고 참 이사하기가 편한 세상이지만은 옛날에 이사 갈 때는 전부다 소, 말이 끄는 수레에다가 짐을 싣고 이사를 갔습니다. 옛날 어느 노 목사님이 다른 교회로 이사를 가시는데 이 수레에 짐을 잔뜩 싣고 그 다음에 놋으로 만든 요강을 실었습니다. 그 요강은 이 노 목사님이 방에서 소변그릇으로 사용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수레에서 요강이 떨어져서 그만 금이 쭉갔어요 물을 부어보니까 물이 줄줄 세서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장로님 가운데 유기공장을 하시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그 장로님이 목사님 사택을 돌보다가 마루 밑에 보니까 왠 요강이 하나 있어서 받아왔습니다. 장로님이 가져가셔서 그 요강을 다 깼습니다. 완전히 깨고 용광에 넣고 녹여버렸습니다. 녹여서 보니까 쇠가 너무 좋아서 요강으로 만들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밥그릇과 국그릇을 만들었습니다. 더러운 오물을 담아두던 요강이 완전히 깨어지고 녹은 다음에 장인의 손에서 밥그릇이 된 것이 변화입니다. 이 달라진 것이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변경된 것 그것이 성령의 역사에서 일어난 중생사건이라고 합니다. 

중생의 사람이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될 것입니다. 그 기도는 다 반드시 우리의 모든 영역 위에 응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하면 구할 것이고, 찾으면 찾게 될 것이고, 두드면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중생의 사람에게는 반드시 닫혀 있던 문도 열리게 될 것입니다. 부드러운 마음, 중생의 마음을 가진 여러분들이 영적인 문과 육신적인 문과 경제적인 문이 활짝 열리는 은총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자비하시며 사랑이 풍성하신 만군의 하나님, 주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감사하며 찬송을 드립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오옵소서. 굳은 부분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시고 다 깨뜨리셔서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부드러운 마음, 살 같은 마음으로 새롭게 태어나서 우리가 드린 모든 기도가 주 앞에 상달되고 기억하신바 되었다가 은혜로운 응답받는 은총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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