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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장 민감한 사랑 (요 13:1~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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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민감한 사랑 (요 13:1~7,12~14)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사랑이라는 단어입니다. 사랑은 인류가 최초로 발견한 가장 아름다운 단어이고 정신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노래도 연속극도 주제가 사랑이 아니면 소재가 성립이 안 됩니다. 

삶의 이야기도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각종 사건도 싸움도 행복도 모두 사랑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 세계에도 너무 일찍 이 사랑이 찾아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도 여자 아이들의 수가 적어 남자아이들이 짝을 찾지 못해 야단입니다. 짝을 찾은 아이들은 좋아하고 짝을 찾지 못한 남자 아이들은 우울해 합니다. 

5살짜리 여자아이와 7살짜리 남자 아이가 놀다가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여자아이가 갑자기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러냐”고 정색을 합니다. 그러자 남자이이가 “왜 이래 어린애도 아닌데“라고 말했습니다. 

조금은 과장된 듯한 느낌은 들지만 오늘 아이들 세계에도 이 정도로 발전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이렇게 홍수를 이루고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진정한 사랑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사랑은 있는데 그 사랑에 부작용이 심각한 것입니다.     

본문은 진정한 사랑을 제시하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가 가까왔습니다. 그때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기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은 “진정으로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말로만 아니고 사랑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내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 

14).” 여기 발을 씻어주었다는 말은 “내가 행동으로 표현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여기 예수님의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에는 몇 가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무조건적 요소 

이 세상은 매사가 조건부입니다. 무조건적인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할 때 가장 가까운 사랑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모의 사랑을 하늘보다 높고 바다 보다 넓다고 칭송합니다. 그런 부모의 사랑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자식을 버리는 부모도 있습니다. 자식을 버릴 때는 거기에 무슨 조건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어떤 가치가 주어져 있는 아이였다면 어떤 경우에도 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에는 조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 입니다.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 과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후에는 겟세마네 산으로 가야 합니다. 가서 밤새도록 피땀을 흘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십자가의 고난이 시작됩니다. 그 밤에 예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주셨습니다. 발을 씻어주었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을 말합니다. 

몸에서 발은 가장 부정한 지체입니다. 그래서 가장 부정한 남의 발을 씻어주려면 먼저 내 마음에서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익어 있어야 가능합니다. 가식으로 또는 연극으로 발을 씻어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오래 못가고 자주 변합니다. 죽더라도 함께 하겠다고 말하고 뜨겁게 사랑을 말하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어떤 분은 60세가 넘었는데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울며 같이 죽겠다고 난리를 떨었습니다. 사람들이 간신히 말렸습니다. 마지막에는 노래나 한곡 부르겠다고 하더니 “한 많은 이 세상”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죽고 6개월이 지나자 어느 날 립스틱 짙게 바른 여자를 데려오더라고 합니다. 어느 남편은 부인에게 못할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습니다. 술주정을 하고 아내 속을 무던히 썩이고 구타를 일삼았습니다. 온 동네가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그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관식을 할 때 그 남편이 나도 같이 묻히겠다고 울며불며 뛰어 들어갈 것 같이 날뛰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그를 말렸습니다. 그러자 이 남편이 “나를 말리지 말라, 나도 같이 묻히겠다”고 소동을 피웠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하관식 예배를 인도하고 있던 목사님이 “그럼 같이 묻히라”고 구덩이로 떼밀었습니다. 그러니까 구덩이에 떨어진 남편이 곧 바로 뛰어올라오더라고 합니다. 

인간의 사랑의 한계는 너무 깊이가 얕습니다. 그나마 또 계산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마음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이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사랑을 봅니다. 


상대 배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중에는 가룟유다도 있습니다. 유다는 지금 예수를 배반하려는 계획을 다 짜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유다는 배신자입니다. 두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 표리부동한 사람입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손이 덜덜덜 떨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유다의 발을 다른 제자들처럼 다 씻겨 주셨습니다. 그때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발을 척 내 맡기는 유다를 볼 때 속에서 치가 떨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머지 제자들에게 눈치 채지 않게 초연하게 다 씻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상대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으면 무례하게 됩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고 막말을 하고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배려를 하게 되면 말도 행동도 처신도 조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상대방에게 배려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배려가 없습니다. 그래서 온갖 피해를 입히고 무례하고 감정적으로 대하게 됩니다. 말을 무례하게 함부로 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입니다. 그것들이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일방적으로 명령하지도 않으십니다. 우리의 문화를 무시하거나 박탈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개성을 무시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형편도 무시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들이 죄를 짓고 잘못을 저지르고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나님은 오셔서 당장 심판하시고 정죄하시고 벌하지 않으십니다. 그대로 인정하시고 참으시고 이해하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상대방에게 배려하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그런 사랑을 보게 됩니다. 사랑은 상대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이 배려하는 마음이 더 강해지면 상대방에게 민감해지게 됩니다. 민감하다는 말은 상대방의 입장을 깊이 헤아리는 마음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서 지나칠 만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얼굴을 얼마나 사랑하고 배려하고 가꿉니까. 돈을 많이 들여 가꿉니다. 얼굴뿐 아니고 손톱에도 발톱에도 너무 지나치게 민감하게 대합니다. 왜냐하면 내 몸을 가꾸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이웃에게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마지막 시간까지 유다를 기다리셨습니다. 발을 씻겨 주셨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다는 천연스럽게 행동하며 회개의 기미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다를 지적하셨습니다.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하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 하면 그의 영혼을 사랑하셨고 그의 내면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내 영혼이 멸망하는 것이 두려운 만큼 네 영혼이 멸망당하는 것도 두려운 일이기 때문에 지적하여 주신 것입니다. 

멸망의 길을 가는 유다를 배려한다고 끝까지 말을 안 하신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돌이키지 않는 유다를 보시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냥 놔두면 유다가 멸망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외면하고 모른척하는 것은 그의 영혼의 죽음을 외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를 배려하고 상대에 민감하게 되면 그런 염려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민감하면 그냥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길을 가다가 유리조각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에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습니다. 그냥 놔두면 아이들 누군가 다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 유리조각들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내가 치웠다고 선전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 내 행위에 누군가로부터 칭찬을 받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냥 누군가를 위해서 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민감한 사랑입니다. 지구 반대편 어떤 나라에서 대형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까.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저 북녘땅에 있는 백성들이 지금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뉴스를 들을 때 마다 밥을 먹을 때 가슴이 아픕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감추어두신 사랑의 마음이 밖으로 탈출되고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상대방에게 민감한 사랑입니다. 

민감하지 않으면 그 모습을 보면서도 무감각해집니다.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타고 언덕을 땀을 흘리며 힘겹게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때 뒤에서 내가 조금 도와주었더니 그가 아주 쉽게 올라갔습니다. 시골 노모가 서울에 올라와서 길을 헤매다가 내게 길을 물어 가르쳐 주다 보니까 아무래도 시골 노모가 길을 찾지 못할 것 같아 아예 그 노모를 모시고 그 집까지 모시고 갔습니다. 그것이 상대방을 배려하는 민감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목숨을 바치고 집을 팔고 피를 흘려서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만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아주 민감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작가 펄벅이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중국과 가까운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갖고 살다가 마침내 한국을 다녀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설을 쓰면서 서설에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보석과 같은 나라다.” 

1960년10월 한국을 방문해서 자동차를 타고 안동에 갑니다. 가다가 갑자기 차를 세우고 밖의 신비한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밖에 지게를 진 농부가 소를 끌고 같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보는 광경인데 이 이국인 펄벅은 그 모습이 진풍경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지게를 진 농부가 자기 지게에 볏단을 지고 소는 그냥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신비롭게 보였던 것입니다. 

미국인 같았으면 소가 밭을 갈고 힘들건 말건 지게도 볏단도 사람까지 소 등에 올라타고 갈 것인데 한국의 농부는 소의 짐을 덜어주고 자기가 볏단을 지고 그 소와 함께 걸어가는 그 모습에서 짐승을 배려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칭송을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민감한 사랑입니다. 

옛날 동네에 가난한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의 아버지가 아파서 누웠습니다. 겨울이 되었는데도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자 그 모습을 누군가가 눈치 채자 그 이야기가 온 동네에 파져나갔고 사람들은 너나없이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가 나무 한 짐씩 해서 그 집의 텅 빈 광을 채워 주었습니다. 그것이 이웃에 대한 배려이고 민감한 사랑입니다. 그 때는 먹을 것이 없었던 때인데도 감나무 가지에 감 열매 몇 개는 남겨두어 누구든 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것이 배려이고 사랑이고 예민한 마음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한 국민의 마음에서 펄벅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은 엄청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아주 민감한 마음을 갖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신을 초월하는 것 

사랑은 자신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어야 비로소 발휘될 수 있습니다. 초월하려면 두 가지를 선행하여야 합니다. 하나는 “내 안에 쳐 놓은 울타리를 걷어내는 일”입니다. 내가 스승인데, 내가 어른인데, 내가 선배인데 하는 이 마음이 극복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울타리를 치고 살아갑니다. 바리새인들은 마음에 사마리아인은 상대하면 안 된다는 장벽과 울타리를 굳게 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대화도 그 땅을 지나가는 일도 거부했습니다. 그 땅에도 성결한 사람, 자기들보다 훨씬 더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울타리를 쳐 놓으니까 그들과 대화가 단절되었던 것입니다. 

또 당시 사람들은 “세리는 모두 나쁜 사람들”이라는 마음에 줄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세리를 만나면 얼굴을 돌리고 지나갔습니다. 그 당시 세리들 중에도 양심적인 세리들이 없었겠습니까. 삭개오가 예수님 앞에서 자신 있게 떼먹은 것이 있으면 4배를 갚겠다고 한 것은 “떼먹은 것 4배를 갚겠습니다”라는 말이 아니고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부정한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는 떼먹은 놈이라고 인정했지만 나는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4배를 갚겠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도 마음에 이런 편견이나 줄을 쳐 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대를 그대로 보지 않고 선입견을 가지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배려도 민감함도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마음에 집착을 버리는 일”입니다. 사람은 어떤 한 가지에 집착하게 되면 다른 것은 눈에 안 보이게 되어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남녀의 사랑입니다. 아이들이 어떤 상대에게 집착을 하게 되면 결혼을 하겠다고 우깁니다. 주변에서 볼 때 그리고 부모가 볼 때는 그 아이는 짝이 아닙니다. 얼마 못가서 깨질 것이 분명합니다.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집착하게 되면 눈이 어두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아들이 결혼하겠다고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여자 친구가 눈이 애꾸였습니다. 아들은 우기며 고집을 부립니다. 그래서 “아니 눈이 애꾸인 것이 안 보이느냐, 그래도 좋으냐”고 물으니 “그 애꾸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모습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집착을 버릴 때 객관적인 눈이 뜨이고 거기로부터 해방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계속 집착하고 우길 때는 자꾸 반대하면 안 되고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가면 객관적인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내 마음속에 처 놓은 이 집착을 버려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스승이라는 마음의 장애물을 치웠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배반하려는 제자의 발도 거리낌 없이 씻겨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닮아가는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닮아가야 예수의 제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분부를 존중해서 따라야 합니다. “내가 행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라.” 누구의 발부터 씻어주어야 하는가 하면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의 민족이고 그 다음이 세상의 사람들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교회에, 우리의 이웃과 민족에 평화가 찾아와 주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닮아가고 주님을 흉내 내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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