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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고보의 증거와 결론 (행 1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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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의 증거와 결론 (행 15:12~21)


야고보의 증거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12)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13-14)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15-17)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18)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19)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행15:20-21)


회의의 진행

베드로의 발언이 있고 나서 바울과 바나바의 간증이 이어졌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12)   아마 베드로 사도가 증언한 내용, 즉 이방인들이 예수만 믿으면 얼마든지 구원 받고 성령 받고 정결해진다는 사실을 구브로와 소아시아 전도 현장에서 체험한 결과로 증거 했을 겁니다.  

베드로와 바울의 발언을 듣는 청중들은 조용해졌습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12)  :  “And all the multitude kept silent,” 적막할 정도로 조용해졌습니다.  이런 표현은 청중들이 할 말을 잃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청중들 대부분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조용해진 것은 그들이 예상한 것과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증거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예수 믿으면 할례도 받고 모세의 법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증언은 정반대였습니다.
  
이어서 야고보가 등장합니다.  야고보는 주님의 아우 되신 야고보입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야고보란 이름 중에 뛰어난 두 인물이 있습니다.  첫째는 세배대의 아들로써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입니다.  이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목 베임을 당하여 12 사도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행12:1)  

둘째는 예수님의 아우이신 야고보입니다. 그는 본래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못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미친 사람 취급할 때에 그와 가족들 역시 염려스런 눈초리로 형님 예수를 붙들러 다녔습니다.(막3:21)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복음 전파에 앞장섰습니다.  신약 성경의 야고보서는 그가 기록한 서신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회의 당시에 그의 위치는 최고의 지도자 반열에 있었습니다.  
  
야고보의 발언은 회의의 내용을 최종 결론짓는 중요한 발언입니다.  야고보의 발언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로, 베드로의 모두 발언 내용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복음이 이방인을 향하게 된 것은 선지자가 이미 예언한 것임을 밝힙니다.  셋째로, 복음을 믿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유대인과 이방인)의 생활 지침입니다.  

야고보의 증거

그러면 구체적으로 야고보의 발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그는 베드로 발언을 응원하고 지지합니다.  그는 베드로라 하지 않고 시므온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모인 청중 대부분이 유대인인 점을 감안한 표현입니다.  즉, 이런 의도입니다.  “베드로 사도나, 바울과 바나바나, 나 야고보는 다 당신들과 같은 유대인이다!  유대인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고 발언하고 있다!”  이방인을 위해 특별히 편파적일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준다는 의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베드로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특히 베드로 사도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고넬료 가족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합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복음을 여시는 하나님 역사의 시작이란 것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선지자의 예언을 특별히 인용합니다.  선지자들은 복음이 이방인을 향할 것을 이미 예언했습니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15-17)  야고보는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을 구약 70인경에서 해석적으로 인용합니다.  

아모스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9:11-12)  야고보가 인용한 것과 아모스서의 내용 상 차이점은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설명을 생략합니다.  
  
예언의 핵심은 다윗 왕국입니다.  즉, 멸망한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리라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짓고(ajnoikodomevw ,rebuild), 파괴된 것을 다시 지어(rebuild) 일으키리라.(ajnorqovw ,restore)  무너진 다윗의 집은 곧 다윗 왕국을 의미합니다.  다윗 왕국이 언제 세워지고 언제 무너졌습니까?  기억하기 좋게 대략 연대를 보면 이렇습니다.  BC 1000년 경, 다윗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다윗 왕국이 시작되었습니다.  40년 후 BC 960년 경,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합니다.  

다시 40년 후 BC920년 경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왕국이 둘로 분열됨으로써 다윗 장막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북왕국 10지파가 떨어져나가 이스라엘 왕국이 되었습니다.  남왕국 2지파(유다, 베냐민)가 남아 유다 왕국이 되었습니다.  BC 722년, 북왕국은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했습니다.  BC 586년, 남왕국이 바빌론에게 멸망당했습니다.  이로써 다윗 왕국은 소멸되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11-16)  가장 중요한 약속은 다윗 왕조가 영원하리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다윗 왕국은 무너졌고 두 번 다시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당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 왕국은 과연 회복 될 것인가?  회복 된다면 언제 회복되고 어떻게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가?  
  
바빌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로소 선지자들의 예언을 생각해 냈습니다.  선지자들이 한 예언의 내용이 무엇인가?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당했다가 다시 회복하리라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예언의 내용들을 그들 나름대로 해석했습니다.  장차 메시아가 올 것이다.  그 메시아는 유대인을 해방시키고 예루살렘에 유대인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종말적으로 유대인들은 세계 열방을 지배하고 이방인들은 유대 나라에 편입될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기대하는 다윗 왕국은 세상 종말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기대하는 구원관입니다.  
  
유대인들의 구원관은 분명 잘 못 된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유대인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만민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나님 나라 구성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입니다.  육적 선민이 아니라 영적 선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에 세워지는 게 아니라 천상에 세워집니다.  지상 나라가 아니라 천상의 나라입니다.  영원한 다윗의 왕권은 곧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오시면 유대인만을 구원하시는 게 아니라 전 세계 만민을 구원하십니다.  세계 만민을 유대인에게 편입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도 세계 만민 중에 부름 받는 사람의 일원일 뿐입니다.  영원한 다윗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요?  그들은 참 메시아를 오히려 배척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안목이 현세와 물질세계, 육적 세계에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유대인과 뭐가 다른가요?  우리 역시 영적 세계보다는 육적 세계, 물질세계, 현실 세계에 매여 있지는 않은가요?  그래서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가 피부에 와 닿지 않아서 무관심하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될 왕국은 세상 왕국이 아니라 그리스도 왕국 영적 왕국입니다.  오늘 어떤 집을 다시 세우려고 하십니까가?  육신의 집 무너진 것은 느껴지는데 영혼의 집이 무너진 것은 무감각 하지 않습니까?  

아파트, 땅, 부동산 무너진 것, 돈 잃은 것은 슬퍼 죽겠는데, 영적 재산 날아간 것은 전혀 슬프지 않습니다.  세상 소유가 사라진 것은 눈에 보이는 데 영적 소유가 사라진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큰일입니다.  최근 중국 광동성 포산시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61세 된 여인을 중심으로 일가 13명이 검찰에 구속되거나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손자 모두가 소매치기에 종사했습니다.  현찰 수입이 좋으니까 집도 사고 꽤 괜찮은 생활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직업이 될 수 있습니까?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도 안 되는 직업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매춘도 세금만 내면 직업이고, 국가도 도박장을 지역 산업이라고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로또 복권, 경마, 경정, 경륜, 온갖 사행성 오락을 산업이라고 내세우고 있습니다.  돈만 된다면 형제도 없고 부모 자식도 없는 파렴치한 일들이 매일매일 버젓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내게 무너진 집이 영적인 집인지 물질적인 집인지 살펴 보세요.  과연 물질적인 집만 다시 세우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지 심사숙고 하세요.  
  
오늘 우리는 영적인 집을 먼저 세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혼의 집을 먼저 재건(REBUILD)하세요.  영혼의 주인을 결정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영생을 회복하세요.  주님을 따라 양심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가치관, 사상, 생각, 사고방식이 하나님 자녀답게 변해야 합니다.  

배금의 가치관, 세상적 가치관, 현세 중심 가치관, 인간적 처세술을 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먼저 영혼이 잘 되어야만 합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영적인 것이 우선입니다.  
  
영적인 집을 다시 세우지 않으면 멸망 그대로 영원히 몰락합니다.  현세가 끝나는 것과 함께 지옥으로 직행입니다.  두 번 다시 구원의 기회가 없습니다.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부자 청년은 돈 때문에 영생을 놓쳤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소산물이 늘어날 때에 창고만 늘렸습니다.  그는 그날 바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화려한 생활로 일관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잣집 대문에서 구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는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서 물 한 방울이 안타까워 애타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품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영혼의 집을 지은 사람과 육적 집에 매달린 사람의 차이입니다.  
  
요즘 노후 문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심지어는 20대 30대 젊은이들까지 노후 대책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불행한 세대입니다.  저는 전후 아버지 없이 자랐지만 참으로 행복한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학교 가기 전에는 완전히 free lancer 였습니다.  어머니가 장사 나가시면 내 맘대로 가고 싶은 데 가고 놀고 싶은데서 놀았습니다.  

바다든, 강이든, 산이든, 위험한 데, 온갖 모험 가득한 곳에 자유분방하게 다니면서 즐겼어요.  그래서 제가 톰 소여나, 허클베리 핀을 좋아합니다.  초등학교를 아홉 살에 들어갔지만 공부 때문에 머리 아픈 일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초등학교 시절의 이 행복을 과연 중학교에 가서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 고등학교 역시 즐거웠습니다.  대학 시절도 마찬가지구요.  제 기억에 노후 문제를 앞당겨 걱정한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렇게 풍족한 시대에 노후 걱정에 매달려 사는 게 얼마다 우스운 일입니까?  다 영적인 집이 세워지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영적인 집이 잘 세워져서 평안하십니까?  아니면 세상 재산, 돈, 건강 때문에 걱정이 태산입니까?  어디서 무슨 집이 무너졌는지 돌이켜 보시고 다시 지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육적 다윗 왕국이 아닌 영적 다윗 왕국, 그리스도 왕국에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야고보의 결론

이제 야고보의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야고보는 이 회의에서 의장 격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최종 결의문으로 정리하여 제안합니다.  “내 의견에는”이란 말은 단순한 의견 제시가 아닙니다. “ejgw; krivnw”(에고 크리노)란 말로, “my sentence is”(KJV), “I judge”(NKJV), “my judgement”(NIV) 등으로 해석됩니다.  의장으로서, 일종의 재판장으로 제시하는 법정적 판결문 격입니다.  야고보의 제안에 따라 이의 없이 결의문이 채택되었습니다.  야고보의 제안은 크게 둘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께 돌이키는 이방인을 괴롭게 말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19)  예수 믿는 것으로써 구원 받는 조건에 충분합니다.  예수 믿는 것에 다른 것을 요구한다면 불필요한 짐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할례를 받으라, 음식을 가려 먹어라, 절기를 지켜라, 하는 따위는 이방인들이 하나님 자녀로 부름받는 일에 고통만 줄 뿐입니다.  

“괴롭게”(parenoclevw)란 말은 영문 성경에 TROUBLE(KJV, NASB), MAKE DIFFICULT(NIV)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누구든지, 과거의 어떤 신분, 행적, 능력을 불문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 한 가지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여기에 어떤 토를 단다면 불필요한 트러블일 뿐입니다.  
  
둘째로, 삶의 몇 가지 지침입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행15:20-21)  “to abstain from food polluted by idols, from sexual immorality, from the meat of strangled animals and from blood.”(NIV)  여기 언급 된 네 가지 내용은 반드시 지켜야 될 계명이 아니라 권고 사항입니다.  

“멀리하라”(ajpevcw, to abstain from)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항구적 명령이 아니라 과도적인 삶의 지침이란 뜻입니다.  여기에는 계명적인 것도 있고, 건덕 상의 문제도 있습니다.  우선 네 가지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우상의 더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주로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를 말합니다.(고전8:1-13, 10:23-33)  “eating meat sacrificed to idols,”(NLT)  당시 그리스 로마 사회는 제우스를 비롯한 각종 우상 숭배가 극심했습니다.  사방에 신전이 있었고 신전마다 황소와 같은 동물의 제물들이 바쳐졌습니다.  사제들은 이런 제물들 중 상당부분을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시장에서 파는 제물은 단순한 음식일 뿐 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고전8:8)  신앙 안에 굳건히 선 사람은 무엇을 먹든지 상관이 없습니다.(고전10: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 제물을 멀리하라고 한 것은 우상 숭배에서 돌이킨 初信者들 때문입니다.  이들은 우상 제물 먹는 것을 우상 숭배의 일부로 알았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우상 제물을 먹는다면 예수 믿으면서 우상도 섬기는 줄로 오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오해를 일으키지 않게 하려고 삼가라고 한 겁니다.     
  
둘째, 음행입니다.  “sexual immorality”(NLT,NIV) “fornication”(KJV,NASB)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십계명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서 이 계명을 특별히 언급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보편적으로 성이 문란했습니다.  남녀 간의 난잡한 성생활은 물론 동성애 같은 일도 다반사였습니다.(롬1:27)  성전에서는 종교를 빙자한 신전 매춘도 성행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성문화에서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집니다.  

세상은 성문화가 개방적입니다.  형법상의 간통죄도 사라지고 성인들의 성관계는 상관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예전 같으면 부끄러운 단어였던“SEXY”라는 말이 이제는 모든 매체에서 “매력” 정도로 사용됩니다.  그만큼 성이 상품화 되고 개방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의 표준이 바뀐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간음은 간음이고 동성애는 동성애입니다.  

하나님께 벌 받을 죄악입니다.  인간 법정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법정에서 판결 받는 것이 문제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성적으로 문란하다면 하나님의 명예를 크게 훼손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예를 위해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처음 탄생된 초대교회의 이미지는 세상과 다른 성결과 경건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르지 않다면 굳이 교회원이 되어야 될 필요가 뭡니까?  성도들은 세상 사람을 향한 그리스도의 편지요, 향기라고 했습니다.  좋은 이미지의 편지들이 되고 향기들이 되어야 합니다.(고후2:15, 3:3)  
  
셋째와 넷째는 목매어 죽인 것과 피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금기시 하는 부정한 식품입니다.  목매어 죽인 짐승은 피를 빼내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피를 먹는 것과 똑같이 부정한 식품으로 분류됩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을 먹는 것을 곧 제물을 먹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정한 음식을 먹어야 했고, 그것은 그들의 평생 과제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 중에 상당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조상 대대로 혐오스런 식품으로 여겨 오던 것을 당장에 먹으라고 한다면 가치나 계명 문제를 떠나서 모욕적인 일로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야고보가 이를 멀리하자고 한 것은 유대인과의 화합을 위한 제스처입니다.  
  
이상 야고보가 말한 네 가지 삶의 지침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배려라는 점입니다.  우상 제물 문제는 믿음이 약한 초신자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음란 문제는 초신자는 물론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목매어 죽인 것과 피는 유대인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비록 그것이 계명이든지 아니든지 교회를 화합시키는 데 방해가 된다면 일시적으로나 항구적으로 금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 삶의 지침입니다.  

여러분, 저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습니다.  술과 담배를 먹었다고 예수 믿는 사람이 지옥에 떨어질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교회 담임목사님이 담배를 피우신다면 성도들이 은혜를 받겠습니까?  “와!  우리 목사님 담배를 다 피우시네.  참 멋지시네!” “와, 우리 목사님 소주 한 잔 잘 하시네.  감동 받았네!”  그렇습니까?  그것 때문에 성도들이 실족한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지겠습니까?  

오늘날 개고기를 먹는 문제나 혐오 식품을 먹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화합을 깨뜨린다면 굳이 먹지는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3-24)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은 불변하는 구원 진리입니다.  여기에 단 한 가지라도 더하거나 덜 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족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유인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 외에 어떤 율법이나 정죄에도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범사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으로 절제(SELF CONTROL)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 회의에서 내려진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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