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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픔과 치유의 공감대 (막 5: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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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과 치유의 공감대 (막 5:25~34)

 
상담의 기본 원리는 듣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별로 사람의 말을 많이 들으신 것 같지는 않아요. 물론 예수님의 대화 내용을 다 기록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또 예수님은 모든 사람과 대화 하시기에는 너무 바쁘셨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받는 인상은 첫째는 예수님은 사람의 긴 말을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허리를 자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스타일은 직설적이고 그리고 돌발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사람들의 겉치레라든가 포장이라든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을 예수님은 별로 환영하지 않으셨습니다. 거의 무시하셨습니다. 사람의 말은 그들의 진실보다는 포장과 겉치레가 많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말만 가지고는 진실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일반 언어예절보다는 예수님은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실 때가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실망할 때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네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아마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누가 나를 너희 재산 나누는 재판관으로 삼았느냐’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결코 점잖은 대화는 아닙니다. 그러나 열매가 있는 대화요 변화를 일으키는 대화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예수님은 사람들을 거듭남으로 이끄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 사교적인 분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사교적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사귀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어울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교클럽을 나간다든가 동창 모임에 나간다든가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사교적으로 사람들을 만나셨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연하지요. 사람들이 평소에 하는 일 중에 예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일이 몇 개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사람들과 같이 술을 마시겠습니까, 포커를 하시겠습니까, 잡담을 하시겠습니까, 남의 험담을 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과 같이 할 수 있는 게 많이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마는 그럼에도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사람들이 몰려왔어요. 쇠붙이가 자석에게 끌려가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계신 곳으로 끌려왔어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끌려왔느냐. 이것은 쇠붙이가 자석에 끌려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종이나 나무나 가죽은 자석에게 끌려가지 않아요. 동질의 요소가 있는 것이 끌려갑니다. 동질의 요소. 삭개오와 같은 죄인은 오히려 바리새인보다도 예수님과 동질의 요소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삭개오같은 사람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 같은 사람도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님과 너무 다른 종류의 사람이에요. 이방인이지요, 행실이 단정치 못하지요, 남자의 사랑에 목말라하는 여성이지요, 사회에 동화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는 예수님과 동질의 어떤 것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끌려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열 두해 혈루병 걸렸던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적으로 봤을 때 이 여인은 예수님과 비슷한 면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쇠붙이가 자석에 끌려가는 것처럼 예수님께 끌고 가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동질의 요소가 무엇이냐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를 문화적으로 인류학적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이 동질의 요소가 문화와 인간의 이런 속성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에 계셨던 어느 전도사님이 과거에 어느 지방 신학교의 문을 두드렸더니 그 지방 목사님이 ‘자네는 이 지역에 연고가 있느냐.’고 물어보시더랍니다. 그래서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이 지역 출신이 아니면 이 지역에 발붙이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시더랍니다. 그건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지역에 연고가 있으면 성공이 보장된다는 얘기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현재 우크라이나의 가장 큰 개신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님은 나이지리아 아프리카 사람입니다. 영적인 요소가 인간적인 요소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이 동질의 요소가 무엇이냐. 그것을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몸의 병이냐 병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갔느냐. 그렇게 볼 수도 있어요. 

그러나 모든 병자가 예수님께 간 것도 아니고 또 병자만 예수님께 간 것도 아닙니다. 그럼 인생에 아픔이 있는 사람만 예수님께 끌려갔느냐. 그렇게 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인생에 아픔이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 간 것은 아닙니다. 물질적인 가난함이냐. 가난한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갔느냐.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가난한 사람이 예수님께 온 것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예수님께 온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물질적인 요소를 마태는 심령의 가난함이라고 불렀고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불렀고 그리고 오늘 본문의 저자인 마가는 아마 믿음이라고 부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도 한 여인에게만 예수님의 능력이 전달됐다는 사실은 그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진 것은 그냥 만진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만진 것이다 이런 의미가 여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 가지 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좀 더 포괄적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가질 수 있는 동질적인 요소 이 세 가지가 다 있을 것입니다. 심령의 가난함, 하나님의 예정 그리고 믿음. 그렇기 때문에 이 여인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이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인데 아무튼 이런 요소가 갖춰졌더니 이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과 그 여인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지도 않았습니다. 대화하지도 않았어요. 통성명하지도 않았어요. 그런 상황에서 벌써 치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이 여성은 남들보다 뭔가 빠른 것입니다. 약발이 잘 듣는 것입니다. 응답을 쉽게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받는 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배가 시작하기 전에 벌써 울기 시작하고 또 초청하기 전에 벌써 거듭나고 기도받기 전에 벌써 낫습니다. 옛날에 캐서린 쿨만 여사가 인도하는 집회에 어떤 남자가 병자가 병을 고쳐달라고 그 집회를 찾아갔는데 예배가 시작하기도 전에 다리가 떨리기 시작하더랍니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본인도 당황스럽고 소리가 나니까 당황스러운데 다리가 떨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캐서린 쿨만 여사가 그 남자를 바라보더니 ‘하나님이 지금 당신을 고치시고 있습니다.’ 그러더래요. 예배가 시작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벌써 고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이라면 빨리 받아야지요. 신구약 66권을 다 쏟아 부어도 변화가 없는 사람은 그게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새들이 먼저 날아간다고 하는 것처럼 그들은 빨리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면으로는 둔할지라도 영적으로는 민감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 면으로는 늦더라도 영적으로는 빨라야 됩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빨라야 됩니다. 하나님의 움직임을 간파하는데 늦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으로 뒤지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기가 어려워요. 남들보다 이 면에 있어서만큼은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됩니다. 영적인 훈련을 받아야 될 필요가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상담의 원리를 말할 때 전가라는 개념을 말합니다. 영어로 하면 transference. 이건 상담가와 병자가 만났을 때 상담가의 건강이 병자에게 전가돼서 병자가 건강해진다는 원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대의 결과가 일어날 수 있는 위험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상담가의 건강이 전가되는 게 아니고 병자의 병이 상담가에게 전가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나 섣불리 상담하면 안됩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그 사람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고쳐주셔야 되는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질병, 이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지혜가 있어야 되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병자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공감대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공감대. 아픈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고. 이 동정이라는 뜻을 가진 sympathy라는 말은 헬라어로 함께 느낀다는 말 공감이란 말이 그것이지요. 함께 아파한다, 함께 고통한다 라는 뜻인데 월드컵 경기 할 때 응원팀이 붙였던 슬로건을 보셨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너희와 함께 숨쉰다.’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선수들이 그걸 보면 얼마나 격려를 받겠습니까. 

우리는 너희와 함께 숨 쉰다, 우리를 제일 감동시키는 말은 너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다. 너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다, 이런 말입니다. 아기가 아플 때 엄마가 하는 말이 ‘아가야, 너 아픈 것 다 엄마에게 다오.’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것이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내가 누구의 아픔을 나눈다고 해서 그 아픔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기가 자기의 병을 엄마에게 줄 수도 없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병이 낫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눈다고 해도 그것이 아픔 자체를 치유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위로가 될 수는 있지만 낫게 하는 것은 아니에요. 여기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만나셨을 때 함께 그 병을 앓아주지 않았습니다. 열 두해 혈루병 걸렸던 여성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함께 그 병을 앓지 않았어요.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만나셨을 때 함께 죄인이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슬픈 사람을 만나셨을 때 함께 슬퍼하지 않았어요. 그럼 나사로 무덤 앞에서 우신 것은 왜 우셨느냐. 예수님이 슬퍼서 운 것이지 마리아와 마르다의 슬픔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그걸 알아야지요. 그럼 성경에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라는 말씀이 있지 않느냐. 그건 상식의 차원입니다. 그렇다고 화내는 사람과 같이 화내겠습니까. 

악한 사람과 같이 악해지겠습니까. 그건 아니지요. 선으로 악을 이겨야지요. 악한 사람과 같이 악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화내는 사람과 같이 화를 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건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고 생명으로 죽음을 이기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지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너무 함께 낮아지고 함께 고통을 받는 것을 덕목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게 하게 되면 세상에 슬픈 사람만 많아집니다. 세상에 고통당하는 사람만 많아집니다. 

예수님이 없는 동정, 예수님이 없는 공감대는 사람을 구원해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동정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상황에 모셔 들여야 됩니다. 우리의 죄의 현실에 예수님을 모셔 들여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람들끼리 서로 나누고 사람들끼리 슬퍼하는 것이 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과 사람의 생각의 차이점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참된 예수님의 역사를 발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기독교 ․ 예수님이 없는 윤리 ․ 예수님이 없는 구제 ․ 예수님이 없는 사랑, 그것은 결국은 인본주의가 됩니다. 사랑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없는 사랑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내가 병이 들어 아플 때 누가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이 위로가 될 수 있지만 그러나 내가 필요한 것은 이 병에서 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이 없는 사랑은 helpless love-도움을 줄 수 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동정, 예수님이 없는 공감대, 예수님이 없는 사랑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혈루병 걸렸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을 때 그 여인의 병이 예수님께 전가된 게 아니고 예수님의 능력이 그 여인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병이 든 게 아니고 그 여인이 예수님과 함께 건강해진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원리에요. 죄인이 예수님께 다가갈 때 예수님이 그 사람의 죄를 지시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이 죄인이 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은혜가 죄인에게 전가돼서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갈 수 있는 원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천국갈 수 있는 이유는 의로운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에요. 우리의 의로움을 쌓아놓아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을 때 능력이 예수님으로부터 나갔느니라 라고 한 것처럼 죄인이 예수님에게 다가와 손을 댈 때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 그들을 돕는 길은 그들의 상황에 끌려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끌려 들어가면 위로는 줄 수 있겠지만 그 문제를 해결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 그들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끌어가야 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여기서 육이라 함은 인간적으로 하는 모든 것을 통틀어 하는 말입니다. 인간적인 동정 ․ 인간적인 위로 ․ 인간적인 노력 ․ 인간적인 철학 ․ 인간적인 종교, 결국은 무익하니라, the flesh counts for nothing-육은 무익하니라. 살리는 것은 영이니-The Spirit gives life, 예수님이 주신 말씀이 곧 생명이요 영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없는 동정을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이끌고 가는 것이 그 사람을 돕는 길이에요.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원리이고 생명이 죽음을 이기는 원리이고 우리의 죄보다 더 큰 주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 우리의 죄를 다 씻었네’ 그 찬송가의 영어 원어 가사를 보면 ‘grace, grace, God''s grace, grace that is greater than all our sin-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 내 죄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 grace that is greater than all our sin-모든 죄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 이게 기독교의 메시지에요. 

이것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 죄보다 더 큰 주님의 은혜, 내 병보다 더 큰 주님의 능력, 주님에게 갈 때만이 그것이 우리에게 전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바라는 것이요, 이것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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