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경의 예언은 무엇을 말하나? (고전14:1)

  • 잡초 잡초
  • 596
  • 0

첨부 1


성경의 예언은 무엇을 말하나? (고전14:1) 


타임머신, 주역, 점, 예언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미래를 알고 싶은 마음이다. 미래를 알고 싶은 마음이 이런 것들을 만들어 냈다. 사람들은 미래에 관해, 많은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 미래를 알고 싶은 마음은, 사람들의 오랜 소원이다. 

세상 사람들은 ‘내 소원이 이루어질까?’가 궁금하고, 하나님의 사람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궁금해 한다. 미래를 알고 싶은 마음에, 무당이나 철학관, 또한 영적인 세계를 접촉했다는 예언자를 찾게 된다. 우리 주변에 이런 분들이 참으로 많다. 그래서 철학관과 점치는 집들이 성행하고 있다. 

기독교인 중에도, 자신의 삶의 길흉화복을 알아보러,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한다. 또한 교회나 기도원에는,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미래나 운명을 말하면서 길흉화복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경은 예언과 점, 복술을 구분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단순하게 길흉화복을 말하게 됨을 점(שׁ󰖏󰗺), 복술(ם󰘖󰙌)이라 한다. 발람은 복술자였다(민22:7, 23:23). 그래서 모압 왕 발락에게 돈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저주하기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축복하도록 만드셨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차 쫓아낼 이방민족들의 습관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들은 (신18:14)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하였다. 

1. 예언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예언이라고 할 때, ‘미래를 알고, 미리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예언이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고 선포함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함을 말한다. (렘1: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 입에 두신 말씀을 전함이 예언이다. 

그래서 미래를 말하지 아니한,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한다(창20:7). 또 모세도 자신을 선지자라고 하였다. (신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하며, 나와 같은 선지자라고 하였다. 

(신18: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이 선지자는 마지막 날에 일어날 선지자인데, 신약 성경에서 이 선지자는 바로 메시아라고 했다.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예고한다.’(foretelling)말 보다는, ‘앞장 서 말한다.’(forth telling)는 말이 훨씬 가깝다. “앞장 서 말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예언된 계시의 말씀을 전하는 것 보다, 더 앞장 서 말하는 것이 어디 있는가?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하는 자가, 선지자요, 예언자다. 그런데 (신18:22)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는,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신18:20)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라면서 말씀이라고 전했다. 그런데 모세는 진짜 선지자인지, 가짜 선지자인지, 구별하는 방법을 말씀하였다. 말씀이 성취함도 없으면, 여호와가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는 자기 말을 한 것이니,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다(신18:22).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제 멋대로 살면 벌 받고 망하게 된다. 그래서 현재에 대한 말씀만 아니라, 미래에 관한 말씀도 있다. 에녹은 주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보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유1:14-15). 

하나님은 택하신 예언자에게 말씀을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말하도록 하신다. 그들은 미래를 구체적으로 내다보는 점쟁이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 받은 것을, 그대로 알려, 주님의 뜻을 전하는, 전달자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예고자”라는 의미보다, 말씀을 전하는 “전파자”라고 말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구약의 예언은 “여호와가 말한다.”고 하면서, 미래보다는 현재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는 심판을 당한다는 말씀이다 

요즘 큰 믿음 교회의 변승우 목사에 대하여, 이단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이 붙었다. 저도 이분의 책을 사서 읽어 봤다. 특별히 예언을 하도록 하라는 책이다. 이 분의 근거는 한 마디로, 다른 사람의 꿈과 환상이었다. 또한 예언의 내용이, 전부 자신은 위대한 종이라는 내용뿐이었다. 

꿈은 잠을 자는 동안 일어나는, 갖가지 영상과 생각이다. 꿈은 대부분 몸의 상태와 연관되어 있다. 심리학적으로는 무의식에서 기인한다. 대부분의 꿈은 전날에 있었던 사건과, 그때 들었던 생각들과 느낌을 반영된다. 꿈은 일반적으로 꿈을 꾸는 사람에게, 실제적인 메시지를 주지 않는다. 

(전5:3)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이와 같이 걱정이 많으면 꿈을 꾸는 법이다. 그 기원이 자연적이고, 영적인 중요성을 띠고 있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이 꿈속에서 메시지를 주시는 경우도 있다. 

구약 시대에는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없었기에, 꿈이나 환상을 통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신약 시대로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주셨다. 이보다 정확한 말씀은 없다. 이 성경 말씀을, 잘 풀어서 가르치고 전함이, 진정한 예언자이다. 

2. 꿈과 환상이 예언으로 위험한 이유 

그러면 어떤 사람이, 꿈과 환상을 잘 꾸는가?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다른 부분이 보상이 되어, 꿈과 환상을 잘 보게 된다. 

발달장애자 가운데,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 어떤 부분적인 천재가 있다. 다른 부분은 부족하지만, 달리는 것만 잘하는 경우나, 수학만 잘하는 경우, 피아노만 잘 치는 경우가 있다. 한번 보고 똑같이 그리는 경우 등이 있다. 이런 경우는 부족함이, 다른 부분에서 보상이 되어서 그렇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장함이 정상인데, 말씀을 잘 훈련받지 않으면, 다른 부분으로 열린다. 그러나 이렇게 꿈과 환상은, 예언으로 정확하지 않다.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꿈과 환상을 보고, 전달하려면 3가지 단계를 거치게 된다. 이 중에 하나라도 소홀이 여기면, 끔찍한 결과를 맞게 된다. 

(1) 올바른 꿈과 환상인가? 

영적인 일은 영적 감각이 더욱 민감해지기에, 때로는 사람의 영, 인간의 상상, 느낌, 심지어 사탄의 음성까지 성령의 음성으로 착각할 수 있다. 

정신병원에는 내적 음성과, 환청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그들 중에는 뇌질환 환자나 약물 복용으로, 뇌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도 많다. 그들이 듣는 대부분의 음성은 영적인 어둠의 세력들이 주는 소리다. 많은 사람들이 악령의 음성을 따라, 극악무도한 죄악을 저지른다. 

(2) 올바로 해석했나? 

꿈과 환상이 하나님이 주셨다면, 그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꿈과 환상은 상징적인 형태이기 때문에 해석이 정말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 머리 위에 있는, 촛불을 보았다고 하자. 

이를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양초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해석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있다고 해석할 것인가? 그 사람의 생일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빛이 되라는 말씀으로 해석해야 하는가? 

또 신을 신지 않은 어떤 사람을 떠올린다면, 이 영상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하나님이 새로운 신을 신겨 주시기를 원한다는 말인가?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움직일 준비를 하라는 말인가? 아니면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선 모세처럼, 거룩한 땅에 성 있다는 의미인가? 

(3) 올바로 적용했나? 

꿈과 환상의 출처가 분명하고, 이를 적절히 해석하였다고 해도, 적절히 적용할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 사람에게 비밀스럽게 전달해야 할까? 아니면 모든 사람이 다 듣도록 전해야 할까? 

시적표현이나 권면의 말씀으로 전해야 할까? 상담하며 전달해야 할까? 또 직접적으로 표현할까? 아니면 우회적으로 표현할까? 받은 꿈과 환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은혜롭게? 판단하듯이? 익살스럽게? 너무 많은 방법이 동원되어야 한다. 

어떤 예언자가 한 청년을 지목하여 예언을 했다.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검은 얼룩이 보이네요! 삶의 죄인 것 같습니다.” 해석도 잘 되었다. 그래서 청년의 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회개를 촉구했다. 그 환상은 정확했고, 해석도 정확했지만, 그 적용이 잘못되었다. 

그 청년은 도덕적으로 완전히 실패한 적이 있었지만, 이미 몇 년 전에 온전히 회개했다. 환상과 꿈과 해석은 정확했지만, 적용이 완전히 틀렸다. 하나님께서 그 환상을 주신 목적은, 이미 용서했음을 상기하라는 말이지, 회개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청년에게 필요한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증과 격려였을 뿐, 정죄가 아니었다. 이와 같이 꿈과 환상을 제대로 받았다고 하더라도, 올바르게 적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꿈과 환상이 얼마나 위험한가? 성경은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3. 특별히 예언을 하도록 하라. 

본문의 고린도 교회는, 초대 교회 안에서 큰 교회였다. 그러나 큰 교회만큼 문제가 많았다. 특별히 성령의 은사 문제로, 교인 간에 갈등이 생기고, 차별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흔들리고 뒤숭숭하였다. 이에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바울은, 교회 공동체를 위해, 성령의 은사들에 대해 (고전12-14장까지) 설교를 하였다. 본문에 의하면, 교회 공동체가 건강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모두는 다르다. 생각도, 취향도, 경험도… 다르다. 이렇게 다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드물다. 그것도 거의 자발적 모임이다. 강제 규정도 없다. 자기 좋아서 모이다가, 싫으면 말도 없이 떠나가는 공동체다. 이런 공동체가, 든든한 하나의 교회로, 서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건 사랑이다. 서로 이해하고 감싸주어야 한다. 따진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정과 불의를 덮어주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제 나름대로 신앙생활하며, 섬김과 봉사의 생활을 해 나갈 때, 조금 다른 것들, 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 이런 경우에 이해해 주고 감싸주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조금 부족하고, 조금 튀는 이를, 넓은 마음과 이해, 격려, 감싸주는 게 사랑이다. 어느 교회에는, 경찰 집사와 검사 장로가 있다. 그저 늘 교인들의 잘못과 실수를 적발하고, 떠벌리는 집사와 장로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 교회 교인들은, 늘 그들 눈에 띌까봐 긴장한다. 

그러니 누가 그 교회에, 계속 나가고 싶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이,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사회에선 실수를 용납 못해도, 교회는 그런 곳이 되어선 안 된다. 어쩌면 세상에서, 사회에서 눌려 살던 이들이, 가장 활개 칠 수 있는 곳이 교회 공동체다. 

그곳은 사랑을 추구하는 공동체, 사랑이 충만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실수를 해도 대대로 내려가는 흉이 아니라, 감싸주는 자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롬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믿음이 강한 자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이다. 

믿음이 강한 자들, 믿음이 좋은 자들을 향해, 믿음이 약한 자가 엉뚱한 소리를 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도, 그 자리에서 무시하고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 사랑, 저절로 되지 않는다.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고전14:1). 

‘우리 교회에는 사랑이 없어’ 하는 분을 가끔 보는데, 왜 사랑이 없는 걸까? 자신이 사랑을 좇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사랑을 즐기겠다는 자세 때문이다. 사랑을 추구하라. 이 교회 공동체 안에선, 모두 허물과 실수, 미움을 쫓지 말고 사랑을 좇아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예언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예언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풀어서 가르치고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도 역시 성령님께서 주시는 귀한 은사이다. 

그러니까 교회에서는 방언하는 은사를 받은 자들보다, 말씀을 잘 풀어서 가르치고 전하는 예언을 하는 은사를 받은 자들이 더 귀하다. 왜냐하면 방언은 알아듣는 자가 없기에 유익이 없지만,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달하기 때문에 덕을 세우며, 권면하고 위로하여 덕을 세우기 때문이다. 

방언을 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하면 소용이 없기에, 교회 전체에 유익을 끼치려면, 자기가 말하는 것을 통역할 수 있어야 한다. 통역을 하지 못하는 방언은, 아무에게도 유익이 될 수 없다.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될 뿐이다. 그래서 방언기도는, 혼자 할 때 기도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예언은 모든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풀어서 가르치고 전함으로써, 죄 지은 사람에게는 찔림을 주고, 슬픔을 당한 자에게는 위로를 하게 되고, 낙심한 자에게는 권면과 격려를 하게 되고, 모두에게 유익을 주어서, 교회적인 차원에서 덕이 된다. 그래서 예언에 힘써야 한다. 

그러나 예언은 길흉화복을 말하는 점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을 무시하지 말라.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생명이 넘쳐나게 된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생명의 길, 사는 길을 전하는 것이, 앞장 서 말한다는 것이다.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앞장 서 말하게 된다. 특별히 “예언하기를 힘쓰라.”고 했음은 방언도 좋다, 은사도 좋다. 그러나 그보다 복음 전함이, 더욱 좋다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는 영적인 권위의 분야로, 복음 전하는 데 큰 능력이 된다. 이 예언을 무시하지 말자.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