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의 우회 (요 4:5~10)

  • 잡초 잡초
  • 282
  • 0

첨부 1


예수님의 우회 (요 4:5~10) 
 
 
❚현대인의 갈증

요즘 동해안 이상저온으로 여름답지 않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지만 더운 여름 땀이 많이 나고 목이 마르면 시원한 음료수 한 잔 간절하게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콜라, 사이다 같은 탄산음료나 포카리◯◯◯ 같은 이온 음료 한 잔 시원하게 마시면 좋겠다 싶지만 실제로는 시원한 냉수 한 잔이 최고지 이런 음료수에는 고농도의 포도당이나 설탕이 들어있기 때문에 마신 후 갈증이 더 심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마를 때 이런 청량음료를 마시면 그 순간은 시원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오히려 갈증이 더 심해지는 것입니다. 현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병은 인생의 갈증입니다. 인생에서 느끼는 허무함, 공허와 왠지 모를 삶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현대인은 청량음료와 같은 것을 찾습니다. 즉 순간적으로 공허와 갈증을 해갈(解渴)해주는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중독입니다. 음란 중독, 성 중독, 쾌락과 과소비 중독, 도박이나 마약 중독 등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중독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들을 접하는 순간 너무도 짜릿하고 순식간에 모든 공허와 갈증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오래 못 갑니다. 곧 다시 공허와 갈증이 오는데 이전보다 훨씬 더 한 갈증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점점 더 센 것, 점점 더 강한 것을 찾다가 현대인들이 유난히 중독에 많이 걸리지만 문제는 이 중독이 결코 근본적으로 내 인생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인의 갈증을 해결해주는 또 하나의 방법은 종교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도 가장 중독성이 크고 짜릿한 것은 정통 신앙이 아니라 이단이나 사이비입니다. 일반 교회에서 밋밋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보다 이단이나 사이비 교회는 훨씬 뜨겁고 짜릿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훨씬 더 매력을 느끼고 깊이 무섭게 빠져드는 것입니다. 문제는 마치 마약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처럼 이렇게 짜릿한 맛을 한 번 보고 깊이 빠져들고 나면 거의 헤어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보 광고에도 나왔지만 우리 자녀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이단에 한 번 깊이 빠져들고 나면 헤어 나오기 어려운 것이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이단에 깊이 빠지는 사람이 무식하거나 이상한 사람들이냐?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단에 깊이 빠지는 사람들이 절대 무식하거나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의외로 똑똑한 사람들, 번듯한 사람들, 잘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 왜 그토록 이런 잘난 사람들이 빠지는가? 그 이유가 바로 인생의 갈증과 공허입니다. 똑똑할수록, 잘났을수록, 성공했을수록 인생의 공허와 갈증이 큰 법입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출세도 하고 성공도 했지만 늘 공허하고 외롭습니다. 

그런데 이단 교회에 가면 너무 잘 해줘요. 너무 나를 사랑해주니까 공허도 갈증도 느끼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 마약중독처럼 나를 파멸로 끌고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도 수많은 현대인들이 잘못된 중독이나 죄악으로 혹은 이단 사이비로 빠져 들어가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맙니다. 모두가 인생의 깊은 갈증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갈증

오늘 이 공허와 갈증의 깊은 수렁에 빠진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살던 한 여인입니다. 성경에는 이 여인의 이름도 나이도 안 나옵니다만 본문을 통해 이 여인의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그는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이요 남자도 아닌 여자였습니다. 부자라면 종을 시킬 텐데 직접 물 길러 온 것을 보면 가난한 여인입니다. 게다가 6절에 보면 여인이 물 길러 온 시간이 여섯 시, 우리 시간으로는 정오입니다. 

남들은 보통 시원한 저녁에 물 길러 오는데 남들 안 오는 정오 12시, 뙤약볕에 물 길러 온 것을 보면 뭔가 남들의 눈을 피해야 할 사정이 있는 사람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여인은 그 동네에서 행실이 난잡하기로 소문난 여자였던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지금까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라는 것을 보니 남의 첩으로 사는 모양입니다. 다섯 명의 남편과 모두 사별하지는 않았을 테니 아마 이혼도 몇 번은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정식 부인도 아닌 남의 첩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기의 미녀라고 하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정말 이뻐요. 세상에서 두 번째로 예쁩니다)는 결혼을 여덟 번 했다는데 그렇다면 이 사마리아 여인도 세기의 미인이었을까요? 아니면 세기의 바람둥이였을까요? 천대 받던 사마리아 여인, 가난하고 다섯 번 결혼하고도 지금은 또 다른 남자의 첩으로 살고 있는 행실 난잡한 여인...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지금까지 이 여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기의 미녀인지 세기의 바람둥이인지는 모르지만 틀림없이 이 여인은 인생의 갈증과 공허를 누구보다 많이 느끼며 산 여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이 너무 공허해서 그 허전함을 달래려고 결혼을 다섯 번이나 했지만 결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인생이 너무 목마르고 갈급해서 수많은 남자를 찾아 전전했지만 그 누구도 그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세기의 미녀 배우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일곱 번째 결혼하고도 또 실패하자 상담가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저의 운명은 왜 이럴까요?” 그러자 상담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열 번 아니라 백번 결혼해도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 17살 때 호텔 왕 힐튼 가의  상속자인 닉 힐튼 주니어와 결혼하면서 재산과 부를 움켜쥐었다고 생각했지만 이 결혼은 여섯 달 만에 파경에 이르렀고, 이후에도 친구의 남편까지 빼앗아가면서 당시 제일 잘 나가던 미남 배우 리처드 버튼과 결혼했고, 또 상원의원과도 결혼했지만 모두 파경에 이르고 맙니다. 

세기의 미녀는 갑부, 미남 배우, 상원위원 등 돈과 명예와 외모를 좇아 결혼했지만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아니,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녀의 내면 깊숙이 숨어있는 공허와 갈증을 갑부도 상원의원도 미남배우도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덟 번이 아니라 열 번, 백 번을 결혼해도 결코 행복하거나 만족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요. 

지금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30번의 크고 작은 성형 수술과 수면제 과다 복용, 극심한 다이어트에 따른 스트레스와 약물 중독, 노인성 비만으로 예전의 아름다움은 다 사라지고 78세의 쭈글쭈글한 할머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한 말이 있어요. “나는 평생 화려한 보석에 둘러싸여 살아왔어요. 하지만 내가 정말 원하고 갈구하고 열망했던 것들은 이런 보석 따위가 아니었어요. 내가 평생 동안 원했던 것은... 내가 평생 동안 가지고 싶어 했던 것은... 누군가의 진실한 사랑과 마음, 변하지 않는 열정, 그것뿐이었어요.”

수가 성에 살던 이 사마리아 여인도 세기의 미인이나 세기의 바람둥이라서가 아니라 가슴 속 저 깊이 자리 잡은 인생의 공허와 갈증을 해결하려고 그토록 발버둥을 친 것입니다. 그녀가 택한 방법이 여섯 명의 남자였는데 그 여섯 명으로도 만족이 안 되는 공허, 너무나 뿌리 깊은 공허와 갈증 때문에 지금은 그 누구보다 고통 받고 있는 불쌍한 인생인 것입니다. 지금 그녀가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자기를 만족시켜 줄 또 다른 남자도 아니고, 보석이나 재산이나 명예도 아니고 자기 내면에 자리 잡은 그 깊고 깊은 공허와 갈급의 수렁에서 구원해 줄 그 누군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우회

바로 이런 문제를 겪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예수님은 수가 성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예수님이 절대 여기 계시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절대로 사마리아 지역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나온 3절을 보면 예수님이 유대 지역을 떠나 다시 갈릴리 지역으로 가시는데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절대 이 가장 빠른 길로 가지 않고 일부러 먼 길을 빙 돌아 요단 계곡을 통해 갔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더러운 혈통 아닙니까?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후 이방인과 피가 섞여 태어난 혼혈아들 아닙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더럽다고 멸시했습니다. 지난주 설교 때 설명한 것처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사람 취급 안 하고 개 취급 했습니다. 그러니 이 더러운 개 같은 인간들이 사는 더러운 땅을 지나가면 안 되잖아요? 그 더러운 사마리아인 만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가장 가까운 지름길인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을 놔두고 일부러 먼 길을 빙 돌아 간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유대인인 예수님은 왜 사마리아를 통과하신 것일까요? 왜 다른 유대인들은 더럽다고 절대 안 오는 사마리아 수가 성에 와서 지금 야곱의 우물가에서 이 사마리아 여인, 안 그래도 더러운 사마리아인인데 남편이 다섯이고 지금 같이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 이런 더러운 행실로 유명한 여인을 만난 것일까요? 물론 성경에는 그 이유가 안 나옵니다. 

워낙 바빠서 할 수 없이 지름길을 택하셨을까요? 아니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이곳에 오셨을까요? 바빠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다른 유대인들은 안 가는 사마리아에 가신 것입니다. 일부러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 찾아가서 일부러 그 더러운 행실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것입니다. 일부러 만나러 가신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우물가로 그 여인이 오는 것을 보고 자리를 피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이 어떤 여인인지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 더러운 여인을 대면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틀림없이 주님이 일부러 이 사마리아 땅에 와서 일부러 이 여인, 인생의 깊은 공허와 갈증에 시달리는 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 모든 사정과 아픔을 다 아시기에 일부러 그 여인을 찾아가서 그녀의 영혼 깊숙이 뿌리박은 인생의 갈증을 해결해 주시려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길이 어떤 길인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마리아 행은 일부러 이 여인을 만나 그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거룩한 우회’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우회(迂廻)란  반드시 거리상으로 먼 길을 돌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거리상으로는 가깝고 빠른 길이라 할지라도 남들 다 피하는 길, 일부러 안 가는 길을 일부러 가는 것도 거룩한 우회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로 가십니다. 다른 유대인들 더럽다고 절대 안 가는 그곳으로 일부러 갑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그를 돕고 그의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단 한 사람의 여인을 만나려는 목적으로 가십니다. 이렇게 남들 안 가는 길, 남들 피하는 길을 일부러 가신 것이기에 오늘 예수님의 사마리아 행도 거룩한 우회인 것입니다.

❚생수를 마시라!

그렇다면 오늘 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려고 일부러 거룩한 우회를 하신 주님이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9절부터 24절까지 나온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사이의 대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대화에서 여인에게 두 가지 해결방법을 주십니다.

첫 번째 사마리아 여인의 공허와 갈급을 해결해주는 방법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생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실까요? 사마리아 수가 성에는 야곱이 팠다고 하는 야곱의 우물이 있는데 바로 이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오자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물 좀 달라”고 말을 건네십니다. 

당시 남성이 물 길으러 온 여성에게 물 좀 달라고 하는 일은 흔한 일입니다만 사마리아인을 인간 취급도 안 하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하자 몹시 황당해 합니다. 하지만 이 때 예수님은 ‘물’이라는 접촉점을 통해 여인에게 다가가신 것입니다. 

전도에도 접촉점이 중요합니다.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보고 무조건 “예수 믿으라”고 하면 전도효과가 높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불신 지옥,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협박조로 전도하면 뺨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방법 말고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접촉점을 찾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가령, 자녀 문제로 애태우고 있는 사람에게는 자녀라는 접촉점을, 건강 문제로 힘들어 하는 분에게는 건강이라는 접촉점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관심을 끌고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물’이라는 접촉점을 통해 여인에게 다가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은 보통 물이 아닙니다. 13~14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지금 네가 나에게 물 한 그릇을 줄 수 있지만 그 물은 마시고 나면 곧 목이 마르게 된다. 하지만 나는 너에게 이런 물 말고 한 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연히 여인은 신기해하면서 그 생수를 자기에게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생수는 그냥 물이 아니라 바로 성령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인이 길러 온 우물의 물은 그저 내 육신의 목마름을 잠깐 해갈시켜 줄 물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生水)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물, 영적인 물입니다. 한 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되는 생명수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수가 바로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인생은 누구보다 공허와 갈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갈증을 해갈하고자 여인은 여섯 명의 남자와 결혼도 하고 첩살이도 해보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마치 목마를 때 음료수 한 모금이 잠깐 갈증을 해소해주지만 곧 더욱 목말라지는 것처럼 그 남성들과의 만남이 그녀에게 아주 잠깐 즐거움과 행복을 주었을 뿐 결코 그녀의 공허와 갈증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이전보다 더 공허하고 목마른 삶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공허와 갈증을 해결하고자 우리가 빠지는 음란, 쾌락, 과소비, 도박, 마약 중독이나 이단 등 모든 방법은 우리에게 아주 잠깐 목마름을 해결해 줄 뿐 그 순간이 지나면 오히려 우리 인생을 더 목마르고 공허하게 만듭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의 내면에 있는 깊은 영적 갈증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럴 때 우리가 그 공허와 갈증을 해결할 방법은 사마리아 여인처럼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그분으로부터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생수, 성령을 선물로 받는 방법뿐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다시는 인생의 갈증에 시달리지 않게 됩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 성령님을 모신 사람이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결코 낙심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꿋꿋하게 다시 일어나고 실패해도 또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부유하고 성공하고 잘 나가도 사마리아 우물가의 주님을 못 만나고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영원히 인생의 무거운 짐과 공허와 갈증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를 드리라!

두 번째 사마리아 여인의 공허와 갈급을 해결해주는 방법은 참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생수, 즉 성령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은 곧바로 여인에게 예배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마신 후에는 반드시 참된 예배, 올바른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바로 만나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오직 예배의 장소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에서 보면 오른편에는 그리심 산이, 왼편에는 에발 산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심 산을 축복의 산으로, 에발 산을 저주의 산으로 규정하고 있기에(신 11:29)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의 거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할 수 없게 되자 이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하나님께 예배한 것입니다. 

따라서 20절에 보면 이 사마리아 여인도 “예배는 어디서 드려야 하나요? 우리 조상들은 이 산, 즉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에서 예배했는데 당신들 유대인들은 아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라고 하는데 어디서 예배하는 것이 맞나요?” 하고 장소 문제에만 관심을 갖고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디에서 예배하는 것이 맞다” 하고 장소 문제를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라 예배를 누구에게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예배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1절에서 “이 산에서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오직 아버지께 예배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배의 장소는 문제가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오직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은 23절과 2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주 유명한 말씀이지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무슨 뜻입니까?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 바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시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께 바로 예배하려면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만 참된 예배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이 예배 문제는 앞서 첫 번째로 설명한 생수(生水) 문제와 연관이 됩니다. 즉 참으로 예수님을 만나 주님으로부터 생수, 즉 성령을 받은 자만이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의 예배,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새 인생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는 인생의 공허와 갈증을 해결하지 못해 오늘도 고뇌하고 방황하는 수많은 심령들이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세상적인 방법이나 잘못된 신앙을 통해 이 갈증을 해결하려 하지만 결코 해결 받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갈증과 고통에 빠지게 되고 심지어 파멸의 길로 달려가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겠습니까? 지난주일 설교처럼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그냥 보고 피해 가서는 안 됩니다. 사마리아인처럼 보고, 불쌍히 여겨, 도와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마리아인처럼 내가 손해를 보고 내가 희생을 해야만 가능합니다.

오늘 예수님도 인생의 공허와 갈증 가운데 신음하고 방황하던 한 여인, 그것도 천하고 더럽다 여긴 사마리아 여인 오직 한 사람을 돕기 위해 남들 절대 안 가는 길을 가셨습니다. 친히 사마리아의 수가 성 야곱의 우물가까지 찾아가셨습니다. 위대하고 거룩한 우회(迂廻)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을 만나 여섯 명의 남성도 해결해 주지 못하고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해결 받을 수 없었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 생수, 성령을 받으라! 그리고 성령 받은 자답게 영이신 하나님께 영과 진리의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바로 만나고 하나님을 통해 너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 받으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고뇌와 모든 문제는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이 사실을 깨달은 사마리아 여인은 즉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물동이는 이전까지의 삶을 뜻합니다. 물동이는 잠시밖에는 내 목마름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세상의 물을 뜻합니다. 물동이는 주님 만나기 전 온갖 갈증과 공허로 가득한 내 인생을 뜻합니다. 이제 주님 만났으니 이 물동이는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이제 참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만났으니 이 물동이는 버려야 합니다. 주님 만나서, 생수를 마셔서, 하나님을 만나서 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고, 갈증이 영원히 해갈되고, 새 인생을 찾았으니 이제는 주님을 위해, 주님을 증거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놀라운 일입니다.

이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난다.” 우리 교회가 이런 좋은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 와서 하나님 만나 모든 인생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는 그런 좋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난 예수님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들, 인생의 깊은 고뇌와 갈증으로 힘들어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예수님처럼 기꺼이 손해 보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기꺼이 먼 길을 돌아가는 거룩한 우회(迂廻)를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다섯 주간 계속된 ‘거룩한 우회’ 시리즈 설교를 마치며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처럼 한 영혼을 위해 기꺼이 거룩한 우회를 선택하는 좋은 성도 되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