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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랑은 (호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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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은 (호 3:1~5)


2주일 전입니다. 사무실에 있는데 전화가 한 통 걸려왔습니다. 7년 전에 피치 못하게 교회를 떠난 집사님이었습니다. 찾아뵈려고 하는데 시간이 괜찮냐고....그래서 괜찮다고 했더니 잠시 뒤에 작은 딸 아이를 데리고 사무실로 왔습니다. 

그 동안 살았던 이야기를 하는데 남편집사님과 이혼을 했었답니다. 그리고 남편은 중국 상해로 떠나서 거기서 일을 하게 되었고 이 여 집사님은 아이들을 데리고 살고 있었답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제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입니다만 모르는 척하고 다 들어 주었습니다. 큰 아이가 중3남자아이고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들한테는 이혼한 사실을 숨기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큰 아이가 눈치를 차렸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방황하더랍니다.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고민하다가 방학 때에 아들을 제 아버지가 있는 상해로 보냈습니다. 

그 곳에서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사랑이 깊어지고 아들도 제 자리로 돌아오고 해서 이번 며칠 전에는 부인 집사님이 딸아이를 데리고 상해로 다녀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가정을 잘 꾸려보자 하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남편 집사님이 옛날에 우리 교회에 나올 때 건축헌금을 작정한 게 있는데 그것을 여태껏 드리지 못해서 중국에서도 마음이 불편했노라고 하면서 가서 꼭 목사님께 전해주라는 부탁을 받고 왔노라하며 3백만 원 건축헌금을 하고 갔습니다. 그 얘깁니다. 

같은 사랑인데 전에는 그게 사랑으로 여겨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아이들과 아버지 사이에도 전혀 몰랐던 사랑의 힘이 떨어져서 살아보고 헤어져 있다가 오랜만에 만나보니까 다른 사랑의 의미란 게 있더라는 것이지요. 사랑하면서 서로 계산하고 타산이 안 맞으면 너무 쉽게 못 살겠다 하고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해서 군림하려고 하고 상처를 감싸 안아 주려하지 않고 파헤쳐서 또 다른 상처를 내고...어쩌면 이게 일상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여간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이 일이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이야기합니다. 이게 제대로 된 것입니다. 아이들까지 생각하는 사랑이 늦게 깨달아진 것이지요. 왜 헤어지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야 어떻든 이제는 그것마저도 감싸 안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 이유가 되었던 일로 상대방에게 다시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받아서도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기도를 해 주고 돌려보냈습니다만 잘 살겠지요.

사실 이 세상에 상처를 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실이지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이해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사랑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이게 사랑의 위대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존 오토나 휴]라고 하는 분이<영혼의 동반자>라고 하는 책에서 상처 입은 사람을 만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말합니다. 그 첫째가 상처를 직접적으로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냥 알아차린 것으로 충분하지 절대로 상처를 언급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잘난 척하고<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는 영화 제목처럼 먼저 그에게 상처가 되는 이야기인지 아닌지도 생각하지 않고 막 떠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은 잔인한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그를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그 사람이 상처를 잊고 기억나지 않게 해야 진정한 사랑이지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게 무슨 사랑입니까? 사람에게 아픈 상처가 기억이 나면 이보다 더 괴로운 일은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기억 때문에 괴롭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부러 기억나게 한다면 그것은 잔인한 것이지요. 물론 남의 상처에 대해서는 비방하지도 말고 지적하지도 말아야 됩니다. 지적해서 상처를 고치겠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이 간혹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상처 받은 사람을 만나는 두 번째 요령은 상처로부터 물러나라고 말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를 사랑함에 있어서 그가 받은 상처를 생각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려고 마음먹었으면 그 사람의 상처에서 완전히 물러서야합니다. 지금상황을 그 상처와 연관 시키지 말고 병들었으면 병든 대로 잘못 되었으면 잘못된 대로 지금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사랑의 기회를 만들라고 말합니다. 좋은 기회가 올 때마다 상처받은 사람을 적극적으로 사랑함으로 사랑의 빛을 비추어서 그 사랑 안에 스스로 치유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그를 사랑할 수 있을 때 그 사랑의 기회를 잘 활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은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들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참 사랑의 극치인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을 유심히 읽어야 합니다. 3장 1절을 보면“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 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그랬습니다. 

이것을 전제로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합니다.“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놀라운 말씀입니다. 호세아에게는[고멜]이라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고 살다가 다른 남자를 만나서 사랑하게 되어 집을 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집나간 아내를 찾아와서 다시 살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경우에 쉽게 순종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그렇게 합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한편의 사랑이야기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자, 먼저 현실적으로 호세아라는 사람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 봅니다. 일단 호세아는 사랑에 실패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처가 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랑하는데 왜 실패를 할까요? 사랑에도 실패가 있을 수 있나요? 혹시 여러분은 사랑의 실패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도 사랑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 사랑에 실패하였는지를...그러면 아마 답이 나올 것입니다. 반드시 실패에는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실패하는 사랑을 살펴보면 대부분 실패의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가 사랑할 대상을 골라서 헤매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내게 주어진 사랑을 하는 것보다 내가 사랑할 만한 사람이 누구일까를 찾아서 하려고 합니다. 내 입맛에 맞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정작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이게 실패입니다. 

대부분 우리의 사랑은 마치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에서처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누가 내 이웃이 되겠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말하자면 내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를 생각하고 내가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찾아 헤매는 겁니다. 말하자면 자기의 사랑은 고상한 사랑이고 이 사랑은 아무에게나 줄 수 없다는 식의 교만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사랑을 하면서 보상을 원하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내가 이 정도의 사랑을 전하면 그도 나에게 무엇인가 해주겠지 아니 해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만큼만 나도 사랑해야지 합니다. 그런데 보상을 원하는 마음이 깔려있는 한 그 사랑은 속되고, 무언가 얻으려고 하는 한 그 사랑은 거짓되고, 희생한 만큼의 대가를 바라는 그 사랑은 환멸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실패한 사랑입니다. 

세 번째는 사랑의 결과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때로는 사랑을 실패하게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그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지나친 기대감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내가 이렇게 사랑해서 이렇게 도와주면 당연이 그 사람은 잘 되어야 하고 그 결과 때문에 나는 그를 사랑한다.’라고 생각한다면 결과가 안 좋으면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 부모로서 자식을 사랑하는데 그 자식이 다 잘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성공할 것 같지 않아도 자식이기에 사랑합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 충실히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이야깁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아들이 강둑을 걷다가 실수해서 아들이 물에 빠집니다. 아들은 허우적거리는데 아버지는 수영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가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뛰어 들어갑니다. 

자, 결과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들어가면 같이 죽습니다. 결과는 뻔합니다. 하지만 같이 죽는다는 결과보다 뛰어 들어가는 지금 아버지의 사랑이 먼저더라 말입니다. 왜 입니까? 죽는다는 결과 따위는 생각에 없습니다. 이것이 당연한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결과 때문에 사랑하고 안 하고를 결정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가 내 아들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참 사랑의 속성과 그 의미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너무 결과에 대해서 계산적으로 따지지 말아야 됩니다. 사랑하는데 있어서 계산하고 이해타산을 따지고 들면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사랑에 충실 하는 것이지요. 

오늘 하나님께서[호세아]와[고멜]이라고 하는 한 부부의 사랑이야기를 하시는 이유를 잘 새겨야 합니다. 주어진 현실이 어떠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려니 하고 그냥 사랑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기가 좀 어려운 상황이지만 받아들여야 할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을 배워야합니다. 

처음부터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장가들라고 하시면서 직접 중매를 하십니다. 그런데 길거리에 있는 창녀하고 결혼하라는 겁니다. 하고 많은 여자들 중에 왜 하필이면 창녀입니까? 쉽게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런데 대단한 것은[호세아]가 정말[고멜]이라는 창녀를 데려다가 씻겨서 지극하게 정성을 다해 자기 아내를 삼고 열렬히 사랑하며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까지를 보면서 호세아가 이 정도의 사람이라면 고멜도 감동을 받고 변화가 되지 않았을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고멜이 다른 남자를 사귀더니 아예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본문 3:1절에“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되었다.”는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또 다시 옛 직업을 찾아서 창녀로 나가버렸다는 말씀인 듯합니다. 참 해도 너무 하지요. 하지만 한편으로 상식적인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잘 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런 여자하고 어떻게 더 살 수 있겠습니까? 제 발로 나갔으니 얼마나 잘 된 일입니까? 모르긴 해도 표현은 안했지만 호세아도 차라리 앓던 이 뽑은 것처럼 속 시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시 데려 와서 살라는 것입니다. 아, 제 발로 집 나간 여자 그냥 두면 어떻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이 의도를 우리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일입니까?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정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 이제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랬을 것 같습니까? 물론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생활 자체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뜻은 바람난 여자처럼 수시로 죄 속에 빠져 사는 이스라엘이지만 반드시 구원하고 끝까지 사랑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중을 전달하고자 호세아라고 하는 선지자를 직접 사용하셔서 그 뜻 나타내시는 것입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호세아 개인으로 봤을 때는 참으로 황당하고 너무나 억울한 일 아닙니까?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자, 그런데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데는 깊은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네가 저 여자와 살면서 아이를 낳았지 그러나 잘 생각해 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저 여자를 변화시키지 못했느냐? 사랑은 기적을 낳는 것이요, 사랑은 능력인데 네가 사랑한다고 했지만 결국 저 여자를 바꾸어 놓지 못하고 사람을 만들지 못했으니 너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러니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 보세요. 기도하면서 기다리라는 게 아닙니다. 가서 행동으로 적극적으로 그것도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사오라는 것입니다. 그냥 데려오라 해도 시원찮은데 값을 지불하고 사와서 다시 살라고 합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말이 3절에 나옵니다.“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러하리라.”고 말하랍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호세아가 이래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랍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나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있지만 사랑해야지 하면서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럴 수 있습니까? 도무지 변화가 되지 않습니다. 내 사랑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미운 짓만 골라 합니다. 나에게 오히려 해를 입히고도 모자라서 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제는 도저히 사랑하려고해도 더 이상은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더 적극적으로 네가 다가가서 사랑하라. 값을 치르고라도 사랑하라.”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방법이요,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자, 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사랑에는 변명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사랑하기로 작정했으면 그의 과거, 그의 허물 나아가서 그의 죄까지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의 그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랑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을 발견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위하여 치르신 값입니다. 우리가 그 소중한 값을 치르고 바꿀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느냐 하면 부끄러움밖에 더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 또한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로 서로 만났으면 미워하는 일보다 우선적으로 사랑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살라고 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미워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이해하고 도와주어야합니다.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랑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사랑하십시오. 실패한 사랑이지만 하나님께서 또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주실 때 사랑하란 말입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도무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사랑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결과는 창조요,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랑으로 나를 사랑했다면 나 또한 그 사랑으로 저를 사랑해야 되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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