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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켜야 될 명예는? (막 6: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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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야 될 명예는? (막 6:14~29)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예전의 경험에 대해 반응하게 마련입니다. 우리 몸도 그렇습니다. 어떤 음식을 먹고 체했다고 하면 다음에는 그 음식을 먹기만 하면 여전히 속이 안 좋거나 거부 반응을 일으킬 때도 있습니다. 어느 정소에서 안 좋은 기억이 있다고 한다면 그 장소는 애써 피해가는 것이 또한 우리네 삶입니다. 그걸 극복하고 이겨야지 하면서도 여전히 거기에 매입니다. 그래서 첫 인상이 중요하고 첫 경험이 중요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에 대한 헤롯의 평가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열두 제자를 부르십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둘씩 둘씩 보내셨는데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습니다. 이에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의 이름이 알려지게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역사들에 대해 듣게 된 헤롯왕이 깜짝 놀랍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얼마 전에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에 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 장면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려주시지 않고는 예수를 바로 깨달을 수 없고 따라서 바로 고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모든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보고는 예수를 아합 왕 때 큰 능력을 나타냈던 엘리야가 다시 세상에 오신 것이라고도 하고 또는 아니다 저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헤롯은 자기가 한 일이 있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죽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자기 스스로 마음에 뜨끔합니다. 그저 길을 가다가 경찰만 봐도 슬그머니 피해갑니다. 그건 자기가 지은 죄를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전에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은 이제는 죗값을 치르고 자유롭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런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 슬그머니 피하려고 하다가 피식 웃습니다. 이제는 내가 그럴 이유가 없는데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피해가고 있는 자신이 그렇게 마음에 아플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헤롯은 왕이라는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 전혀 죽임을 당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요한을 죽인 것이 아닙니까? 물론 자기가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한 것이 잘 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말을 들을 때 암만 그래도 내가 왕인데 하는 마음 때문에도 그렇고 더 이상 사람 앞에서 수치스런 자신의 모습을 떠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요한을 잡아다 감옥에 가두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거기까지는 그런대로 봐줄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요한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건 일종의 직권 남용입니다. 자기도 어쩔 수 없이 요한을 죽였다고는 하나 마음에 아픔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 그 마음에 감추어두었던 아픔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느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잊고 살았던 것이 어느 날 다시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아니 애써 잊으려고 했던 지난날들의 아픔이 다시 떠오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이 참으로 아픕니다.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마음도 들고 더 잘 할 수도 있었는데 하는 마음도 듭니다. 한데 사실은 그런 마음이 들 때가 또 한 번 나를 더 좋은 방향으로 세워나가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미 지나간 날들입니다. 그 날들을 다시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훈을 삼을 수는 있습니다. 

잘 할 수 있었는데 기회를 놓친 것이라면 지금 그 기회를 다시 살릴 수도 있을 것이요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 싶으면 그걸 교훈 삼아 지금을 더 알차게 만드는 계기로 삼으면 됩니다. 지난 날 잘못한 일이 있어 그 날들이 마음에 아프게 다가온다면 이제 그런 아픔이 다시없도록 나를 세워나가면 됩니다. 지난 날 잘 한 일이 생각난다면 그 날처럼 오늘도 계속해서 모든 것을 잘해나갈 수 있도록 내 마음에 다짐하면 됩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때가 늦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물론 그 날들은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날들이 있기에 지금을 더 멋진 날들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건 내 있는 모습 그대로 충성을 다하는 것이요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때 이렇게 좀 여유를 가지고 베풀었으면 참 좋았겠다 싶으면 그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분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수고하면 됩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밑바닥에 놓여 있다 싶어도 그러면 더 이상 추락할 곳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밑바닥으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탈출하면 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할 수 있는 힘은 내가 다 합니다. 모자라는 부분은 하나님이 채워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면서 내 할 도리를 다 하면 하나님이 그 마음을 받으십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도움이 더해집니다. 왜요?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나는 네 하나님이다. 네가 너를 도와주겠다.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겠다. 이 약속을 굳게 믿고 붙드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나의 구주요 나를 돕는 자 내 곁에 함께 계신자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믿으심으로 오늘 우리 자신을 새롭게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헤롯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선지자가 이런 말을 할 때는 목숨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왕을 비난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시만 해도 왕의 말이 곧 법인데 거기에 대해 누가 뭐라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를 대적하게 되는 것은 곧 하나님과 대적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헤롯 자신이 잘 알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래 한편으로는 세례 요한을 보호하면서 마음으로는 괴로워하면서도 그 말을 달게 들었습니다. 

결국 헤롯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자기도 압니다. 그렇지만 대놓고 너 나쁜 놈이라고 할 때 그 말이 듣기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상대방보다 약한 입장이라면 아무 말도 못하고 잘못했다고 하겠지만 내가 그 사람과 대등한 위치에 있다거나 아니면 더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할 때는 그 말을 인정한다고 해도 마음에 좋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말 마음으로부터 그래 내가 진짜 잘못했어 하고 용서를 구하고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도 돌아서 그 말이 들려질 때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 우리네 마음이 아닙니까? 그때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비겁하게 앞에서는 아무 말도 안 하다가 뒤통수를 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앞에서 대 놓고 말하면 어떻습니까? 오히려 그게 더 홀가분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어서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 나서 그러는데 하고 반발을 살 수도 있고 그런 것 때문에 서로 등지게 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요 잘못된 사람이 눈에 띄거든 조용히 그를 만나서 그를 바로 잡아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든지 인간관계에서 나의 잘못을 누가 이야기한다고 할 때 그 말이 듣기 좋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에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어쨌든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었다는 것은 그래도 기본은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기본이 되어 있다는 것이 곧 그 사람이 바로 살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주변 여건이 그 사람을 바로 살도록 놔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헤로디아라는 한 여인으로 인해 헤롯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두렵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들의 비난이 더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한 말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비난이 저는 더 두려웠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분이 아닙니다. 그냥 어음과 같다면 자기를 지금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길은 현금과도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비난은 나중 이야기이고 우선 발등의 불부터 꺼야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뒤에서 뭐라고 하던 그건 나중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하실지 모르지만 그것 역시 나중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더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우리네는 다릅니까?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떻게 사랑만하면서 살 수 있느냐고 하겠습니까? 어떻게 좋은 말만 하면서 살 수 있겠느냐고 하시겠습니까? 마음으로 누구를 미워하기만 해도 그것이 살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단지 그냥 외면할 뿐이라고요? 하지만 원수도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는 것도 주님의 명령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못한다면 그것 역시 주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요 이것 역시 살인죄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해야 할 두 가지 일, 용서와 용납을 통해 화해를 이루는 것과 중보하며 축복하는 이 일이야말로 우리가 결코 등한시해서는 안 될 우리들의 지상 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또 계명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하셨고 그래야 너희가 참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십니다. 

결국 문제는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화해와 축복이라는 이 과제를 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진흙 구덩이에 넘어져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었다고 합시다. 칠칠치 못하게 이게 뭐냐고 야단만 하고 있겠습니까? 사람이 살다보면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넘어질까 두려워서 아니면 옷을 버릴까 두려워서 빗속에는 나가지도 못하고 진흙 구덩이 근처는 가지도 못한다면 그거 어떻게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세상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도록 만들지 마십시오. 아니 나 자신부터 세상을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두려워한다면 함부로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도 또 외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니 내 발등의 불이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비난 받을까 두려워서 더 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을 것이요 내가 바르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한 자격이 내게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될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헤롯이 목숨 걸고 지켰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었나 하는 것입니다.
헤롯은 그 날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자기의 생일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기의 아내가 된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헤롯도 그와 함께 앉은 자들도 다 기뻐했습니다. 그래 너무 기분이 좋아서 한 마디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심지어는 맹세까지 하면서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헤로디아의 딸이 요한의 목을 쟁반에 담아서 달라고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기 딸을 이용해서 요한을 죽이라고까지 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결국 스스로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진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자기 어머니에게 들어가 상의하고 나오더니 하는 말이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는 것이 아닙니까?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습니다. 

순간적으로 모두가 숨을 죽입니다. 헤롯 역시 자기가 맹세한 것이 생각나는 것과 더불어 그 앉은 자들이 놀라서 눈이 토끼 눈처럼 되어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는 안 된다고 했다가는 자기가 아주 우스운 꼴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하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만약 헤롯이 요한을 죽이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죽이지 않았다면 정말 비겁한 자요 자기 맹세한 것조차 지키지 못하는 옹졸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까요? 오히려 더 용기가 있는 정말 바른 왕이라고 오히려 칭찬과 존경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건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정말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은 세상 사람들의 평이나 비난이 아닙니다. 그건 순간의 명예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하실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합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행동하려고 합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너에게 두지 말라고 했는데 마치 내가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판단하고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내 생각에 옳은 대로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화목 화해라는 것은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보십시오. 내 뜻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먼저입니까? 내 삶이 먼저입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모습이 먼저입니까? 

헤롯 그는 결국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진짜 지켜야 할 것은 자기 맹세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명예를 먼저 생각하기에 앞서서 하나님을 먼저 생각했어야 합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경우에 합당한 것이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니라면 과감히 나를 버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헤롯보다 더 나쁜 사람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 헤롯에게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달라고 했던 헤로디아의 딸입니다. 나는 단지 어머니의 말을 따랐을 뿐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럼 어머니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은 어떻게 하고요? 가장 나쁜 사람은 헤로디아입니다. 저는 살짝 뒤로 숨고 자기 딸을 내세워서 결국 자기가 목적으로 삼았던 요한을 죽이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뒤로 숨는다고 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을 오늘 우리들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뒤로 숨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욕보이고 그러면서도 나는 바르게 살고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결코 숨지도 말고 도망가지도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떳떳하십시오. 그건 다름 아닌 화해와 축복입니다.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의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우리의 삶이 분주하고 여유가 없을지라도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자신의 일에 취하여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세상이란 벽에 자신을 걸어놓고
불안에 빠져 있지 않게 하소서.

수많은 일들로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에도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시간을 내어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멀어졌던 발길을
한걸음씩 더 다가가게 하소서.
막연한 이해를 바라기보다 함께하는 시간을 통하여
건강한 사랑을 만들게 하소서.

서로에 대하여 무관심의 소외가
얼마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는지 알게 하소서.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더 깊이 깨닫게 하소서.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마음을 같이하지 못하면
모든 것을 다 갖추어도 절망이 보이니
서로의 만남을 감사하게 하소서.
삶의 세세한 생활들을 주고받으므로
서로가 믿고 신뢰하며 살아감의 중요함을 알게 하소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늘 준비되어 있지 않으니
서로가 관심을 갖고 사랑의 통로를 만들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늘 건강하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늘 행복하게 하소서.
우리의 사랑이 힘 있고 아름답게 피게 하소서.

우리의 삶이 분주하고 여유가 없을지라도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자신의 일에 취하여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세상이란 벽에 자신을 걸어놓고
불안에 빠져 있지 않게 하소서.

수많은 일들로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에도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소서.
시간을 내어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멀어졌던 발길을
한걸음씩 더 다가가게 하소서.
막연한 이해를 바라기보다 함께하는 시간을 통하여
건강한 사랑을 만들게 하소서.

서로에 대하여 무관심의 소외가
얼마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는지 알게 하소서.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통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더 깊이 깨닫게 하소서.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마음을 같이하지 못하면
모든 것을 다 갖추어도 절망이 보이니
서로의 만남을 감사하게 하소서.
삶의 세세한 생활들을 주고받으므로
서로가 믿고 신뢰하며 살아감의 중요함을 알게 하소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늘 준비되어 있지 않으니
서로가 관심을 갖고 사랑의 통로를 만들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늘 건강하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늘 행복하게 하소서.
우리의 사랑이 힘 있고 아름답게 피게 하소서.

이 아름다운 기도문처럼 사랑 안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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