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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지지 않는다 (벧전 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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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지 않는다 (벧전 5:6~11)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로 자기를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권세가 영원히 하나님께 있기를 빕니다. 아멘.]

• 일어선 사람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베드로가 아닙니다. 이 서신이 집필될 당시 베드로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 책이 베드로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권위 있는 누군가의 이름을 의지하여 글을 쓰고 출판하는 일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5장 12절에는 실루아노의 손을 빌어 이 편지를 썼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는 비록 베드로가 쓴 것은 아니라 해도 베드로의 정신은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베드로를 생각할 때마다 인간적인 친밀함을 느낍니다. 그는 투박하고 성급하지만 단순하고 정직한 영혼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주님의 부름에 선뜻 응답하고, 풍랑이 이는 갈릴리 호수 위를 걷다가 물에 빠지고, ‘주님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는 즉시 주님의 길을 막고,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결국 주님을 부인하고, 그 때문에 목 놓아 우는 사람…. 주님은 일찍이 그에게서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반석을 보아내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고 성령을 체험한 후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두려워 숨어있던 골방 문을 박차고 나와 사람들 앞에 당당히 용서의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일깨웠습니다. 그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힘은 돈도 권력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경험적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수로 말미암아 척박한 역사의 대지를 딛고 일어선 사람이 되었습니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그는 기어코 반석과 같은 사람으로 거듭났고,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회의와 시련 속에서도 주님을 떠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신앙은 일어서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조각가인 자코메티는 “인간은 직립해 있을 때 아름답다”고 말했습니다. 하늘을 머리에 이고 하늘의 뜻을 읽을 줄 아는 직립의 사람이 참 사람이라는 말일 겁니다. 일어선 사람 베드로는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 걸인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말합니다. 

산헤드린 공의회가 사도들을 소환해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며 위협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행4:19)라고 응대합니다. 정신적 압제에서 벗어난 사람의 신앙적 독립선언입니다. 저는 가끔 이걸 베드로의 4.19 혁명이라고 생각하며 웃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일어선 사람 베드로의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취사선택이란 말이 있듯이 뭔가를 취한다(取)는 것은 다른 것을 포기해야(捨) 하기에, 선택은 늘 어렵습니다. 우리는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어느 길이 더 안전한지, 어느 길이 더 유리한지를 계산합니다. 

그동안의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해 더 나은 듯싶은 길을 택하지만 결과가 늘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원의 순례자인 우리에게 ‘좁은 길’을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택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일어선 사람 베드로는 또 다른 기준 하나를 일러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로 자기를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6-7)

이것이 베드로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체득한 삶의 진실입니다. ‘프리메로 디오스’(Primero Dios), ‘하나님을 첫 자리에’라는 뜻의 스페인어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면 무슨 일어 벌어지든 결국은 다 잘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보다 낫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길을 택하는 것이 결국은 안전한 길이요 유익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별명은 ‘염려하지 않는 자’였답니다. 내 뜻을 이루려 한다면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 두 마리의 개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불안과 회의의 풍랑에 휘말릴 때가 많습니다. 바른 길로 잘 가다가도 어느 순간 어쩌면 이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갑자기 짙은 안개에 갇힌 것처럼 당혹감을 느낍니다. 정신적으로 다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탄이 다가서는 것은 이때입니다. 사탄의 유혹은 은근하고 달콤합니다. 그래서 뿌리치기 어렵습니다. 

사탄은 마치 먼지가 쌓이듯 우리의 존재에 내려앉습니다. 그는 우리의 부풀려진 자의식을 숙주로 해서 우리 속에 침투합니다. 성경에서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이고 ‘이간질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는 님’이라면 사탄은 ‘가르고 나누는 자’입니다. 

에베소서는 사탄을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2:2)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육신의 정욕대로 살게 합니다. 한마디로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파악하고 조정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사탄이 힘을 발휘하는 곳은 불모의 땅으로 바뀝니다. 사탄에게 우리 마음을 내주면 우리는 무정한 사람, 사나운 사람, 교만한 사람으로 변하고 맙니다.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사로잡힌 이들이 있는 곳에는 불화가 생겨납니다. 한 순간입니다. 행여라도 나의 허물보다 남의 허물이 크게 보이거든 소스라쳐 놀라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외쳐야 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지 않으면,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사탄의 먹이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물은 받으시고 자기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자 가인은 질투심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무고한 동생을 해칠 궁리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경고가 그에게 내립니다.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4:7b)

여기서 우리는 고대인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죄라고 번역된 이 단어 ‘yetzer ha-ra’는 ‘죄의 충동’ 혹은 ‘이기심에 따라 움직이는 본능’을 일컫는 말입니다. 죄의 충동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마음으로 누군가를 처벌하며 삽니다. 그 대상은 눈빛이 불량한 젊은이들로부터, 보행자를 배려하지 않는 난폭한 운전자,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이런 충동은 분명히 인간성의 일부이기에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충동대로 움직인다면 세상은 지옥으로 변하고 말 겁니다. 그 충동을 다스린다는 것은 들어도 못 들은 척, 보아도 못 본 척하고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를 파괴적인 행동으로 내모는 그런 충동을 직시하고 저항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느 인디언 추장이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내적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내 속에는 개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둔하고 사납습니다. 다른 하나는 순하고 착합니다. 그런데 둔하고 사나운 개는 툭 하면 순하고 착한 개에게 시비를 겁니다.” 듣고 있던 이가 어느 개가 이기더냐고 묻자, 추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자주 먹이를 주는 개가 이기지요.” 여러분은 지금 어느 개에게 먹이를 주고 있습니까? 성경은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와 맞서 싸우라고 말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둔하고 사납고 야비하고 교만한 충동을 일깨우고 부추기는 악마와 맞서 싸울 때 우리의 속사람은 든든해져 갑니다.

•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잘 해보려고 하지만, 잘 안 됩니다.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는 동안, 우리는 영혼의 소리를 무시할 때가 많습니다. 그 결과는 공허함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을 만나도, 일에 집중하고, 레저를 즐겨보아도 내적인 공허함은 극복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공허감을 숨기려고 혹은 잊으려고 술과 약에 의존하고, 쇼핑이나 천박한 오락거리에 정신을 팔곤 합니다. 타락이란 원본(original)로 태어나 복사판(copy)으로 살아가는 것이랍니다.

우리가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생이란 영원한 영광으로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길’이라고 고백합니다. 문제는 고백에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참 삶의 길이라고 백 날 고백한다 해도, 그 길을 내 발로 걷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이를 수 없습니다. 길의 보람은 고백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따라 마땅히 가야 할 길로 누군가가 걸어가는 데 있습니다. 

예수를 길이라 하는 이들은 많지만, 그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은 적어지고 있습니다. 주일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지만 주님의 외로움은 깊기만 합니다. 당신의 길을 찾는 이가 적으니 말입니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울면서라도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섬기고, 나누고, 돌보는 길이야말로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이니 말입니다. 

혼자서 그 길을 간다면 너무 외롭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행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다가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동료가 있다는 것, 우리가 외로울 때 우리를 맞아주고, 연약할 때 기운을 북돋워주고, 길을 잃었을 때 우리를 찾아와 줄 이가 있다는 것처럼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공동체를 뜻하는 ‘community’는 ‘서로 함께com’ ‘선물munus’이 되는 이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우리 인생 속으로 걸어 들어왔을 때 그가 만나게 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속에서 교만하고 이기적인 존재와 마주친다면 그는 더 큰 상처를 입고 돌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서 주님을 만난다면 그는 평화와 기쁨을 맛보면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 삶이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있겠습니까?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짓는 까닭이 포식자들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이듯이,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악마의 유혹에 함께 맞서기 위해서입니다. 

• 고난을 통한 기쁨 

오늘의 본문은 고난과 시련 속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멋진 계획을 들려줍니다. 잠시 겪는 고난은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경한 것이고,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겪는 고난은 더 큰 유익의 밑거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풀무를 통과한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우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십니다. 

로맹 롤랑은 <베토벤의 생애>를 ‘고난을 통한 기쁨’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음악가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청각을 잃어버렸지만, 베토벤의 내면의 귀는 더욱 밝아졌고,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런 고난이 없었다면 ‘환희의 송가’도 없었을 것입니다. 

오산학교를 세웠던 남강 이승훈 선생은 일제가 민족 지도자들을 붙잡기 위해 날조한 105인 사건(테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사건, 1911년)으로 3년 7개월간 옥살이를 하며 온갖 고문을 다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옥중에서 신약성경을 백독해 내면의 신앙을 반석에 세웠습니다. 그에게 기독교는 ‘의(義)’의 종교였습니다. 

거짓이나 분열이나 게으름이나 도적질이나 죄는 의가 아니며, 자기만 잘살려 하거나 자기만 높아지려고 하거나, 자기의 이익만 노리는 것도 의가 아니며 권모술수나 이기심도 의가 아니라 여겼습니다. 그는 감옥생활을 통해 더욱 분명한 입장을 가진 사람이 되어 나왔습니다. 그는 1915년 감옥을 나오면서 “감옥이란 이상한 곳인 걸. 강철같이 굳어져서 나오는 사람도 있고, 썩은 겨릅대(껍질을 벗긴 삼대)처럼 흐느적거리면서 나오는 사람도 있거든”이라고 말했습니다.(조현, <<울림>> 중에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산다 해도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줄기를 흔드는 바람이 있기에 뿌리 또한 깊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작고한 오규원 시인은 <만물은 흔들리면서>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튼튼한 줄기를 얻고/잎은 흔들려서 스스로/살아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흔들리면서도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우리 신앙의 지향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기어코 아름다운 존재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홀로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위해 땀 흘리는 사람,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바람 부는 광야에 나선 사람, 땅 끝에 내몰린 사람들의 설 땅이 되어주기 위해 다가서는 사람, 외로움에 지친 이들이 기댈 언덕이 되어 주기 위해 마음을 여는 사람, 우리는 그들을 가리켜 성도라 부릅니다. 

우리가 같은 꿈을 가지고 산다면 악마는 우리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어깨를 겯고 나아갈 때 우리는 결코 질 수 없습니다.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걸으십시오.”(히12:12-13a) 우리는 주님 안에서 일어선 정신적 독립군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웃들과 피조 세계를 향해 주님의 사랑을 품고 나아가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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