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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남은 자, 다니엘 (단 6:10~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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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 다니엘 (단 6:10~12, 16)


오늘은 64년 전, ‘잃었던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광복’을 회상하면서, 감사로 예배하는 주일입니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야욕에 찬 전의로 그 끝이 보이지 않던 때입니다. 그런 일본의 전쟁의지를 안 미국은 일본에 원폭투하라는 중대 결정을 내립니다. 

8월 6일과 8월 9일 두 차례 걸쳐, 당시 일본 군수산업의 중심지였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원폭을 투하됩니다. 원폭투하로 戰意를 상실한 일본이 백기를 들자,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던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항복으로, 일본식민통치에 신음하고 있던 우리나라에도 광복이 주어졌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서 우리나라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생하러 났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고생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나온 사람과 같다.” 아시는 대로 4천년 넘는 우리나라의 역사는 태평시대를 알지 못합니다. 삼국시대 이후만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100여 번이 넘는 전쟁에, 내란은 그만두더라도 外侵만 5, 60회나 되는데 그것도 전국가적으로 전쟁에 시달렸던 전쟁이 30회나 됩니다. 그 대부분의 전쟁이 이기지 못한 패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부터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부끄러워한다 하지 않았습니까?(국가적인 전쟁을 하다 講和條約을 맺을 때 남의 땅에 가서 맺어야 하는 데, 우리 땅의 城 안에서 맺는다면 진 전쟁이라는 이야기지요) 우리 역사를 보면 성하지맹 아닌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땅은 자꾸 줄어들기만 했습니다. 삼국시대 이후, 나라 땅을 한 치도 넓힌 것은 없고, 늘 빼앗기기만 했습니다. 그런 수난의 역사 중에서도, 우리나라의 최고수난의 역사는 ‘일제36년 식민통치’입니다. 나라의 주권을 통째로 빼앗긴 채, 36년을 지냈습니다.

▶ 그러나 고난은(그것이 어떤 고난이라 할지라도) 정의情意(참 된 뜻) 없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잔혹한 운명의 장난도 아닙니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아이러니(모순과 부조화)를 가진 나라와 도시는, 이스라엘 나라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성이라는 말인데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평화의 도시인 예루살렘에는 정작 평화가 없었습니다. 주전 1,000년 경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지금까지 내려왔지만, 예루살렘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주전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패망 한 뒤, 주인이 무려 스무 차례나 바뀌었습니다. 10여 차례나 완전히 폐허가 되기도 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제외하고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5,000년 역사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이스라엘 평화와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의 참 평화는 오직 ‘야웨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파란만장한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명맥’을 이어온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들은, 고난의 역사 한복판에서, 고난의 의미(이유)를 되묻던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신학적인 표현을 쓰자면 ‘남은 자(the remnant)’들입니다. 이들은 고난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뜻을 되묻던 자들입니다.

우리나라가 당한 지난 역사의 고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되묻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너진 나라의 주권을 도로 찾게 하셨습니다. ‘십자가十字架’라는 시를 기억하시지요?

쫓아 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려 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尹東柱(1917-1945), 1941—

일본식민 치하 막바지, 그때까지 잘 견디던 웬만한 사람들조차도 변절해가던 고난의 절정에서도, 젊은 시인 윤동주 선생님은 끝까지 십자가 지는 신앙인으로, 애국하는 국민으로 서겠다는 결의가 절절이 묻어나고 있는 시입니다. 

▶ 본문에 나오는 ‘다니엘’이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국가가 패망하고, 포로로 잡혀가서, 국가의 존재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던 그 패망의 한복판 시대를 산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 때문에 절망하기 보다는 고난의 이유, 의미를 되묻던 자입니다. ‘남은 자’를 말합니다. 남 왕국 유다말기에 예언했던 이사야에게 주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성읍들이 황폐해지고,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토지는 황폐하게 될 것이고,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황폐하게 되리라. 포로로 잡혀가지 않은 사람조차도 황폐하게 될 것이라. 그러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그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 11-13). 다니엘이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본문의 다니엘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말씀의 주인공이요, 그루터기요, 거룩한 씨요, ‘남은 자’입니다. 본래 다니엘은, 남 왕국 유다의 왕족입니다.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이, 제1차 예루살렘 정복전쟁을 했을 때(B.C. 605년), 유다가 완전히 패망하기 19년 전이지요, 10대 소년의 나이 때 가장 먼저 잡혀간 포로입니다(여호야김 왕 시대, 그 때까지 남 왕국 유다는 애굽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바벨론을 섬기기 시작함). 605년 이후부터 남 왕국 유다는, 급전직하의 패망의 내리막길에 섭니다. 여호야긴, 시드기야 왕을 거치면서 주전 586년에 바벨론 제국 느부갓네살 왕에게 완전히 패망합니다(예루살렘 성전 훼파, 함락). 

본문에 나오는 다니엘은, 10대 소년 때 포로로 잡혀 와서 80 나이를 훌쩍 넘긴 때의 그의 믿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70여 년 사이, 다니엘을 포로로 잡아갔던 바벨론은, 페르시아 제국에게 패망한 때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을 섬기다가 페르시아를 섬기게 되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제국이 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이 패권을 잡게 될 것을, 이미 다니엘을 통하여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느부갓네살’이 그 역사의 변천을 꿈으로 보았습니다). 

꿈에서 본대로 바벨론 제국은 90년 역사를 이어가지 못하고, 페르시아 제국에 패망했습니다. 그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온 세상의 통치자, 주권자, 왕은, 하나님 한 분이시다는 겁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아, 네가 세상의 왕이냐? 아니다. 나 야웨가 온 세상의 주권자요, 왕이다󰡕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던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이 이것을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풀무 불 시험 앞에 섰을 때, 한 말이 있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 17-18).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풀무 불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들을 풀무 불에 던진 자들은, 풀무 주변에서도 타 죽었지만, 정작 풀무 불에 던짐 받았던 세 사람은,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했고, 겉옷의 빛깔도 변하지 않았고, 불 탄 냄새조차도 없이 구원받았습니다(단 3, 27).

본문의 다니엘 보십시오. 80이 넘은 고령의 노인입니다. 페르시아 제국 다리오 왕 때입니다.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무척 신임했는데, 그것이 시기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을 궁지에 빠뜨리려는 계략이 꾸며졌습니다. 삼십일 동안, 다리오 왕 이외에 다른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이라도 구하는 자는, 사자 굴에 넣기로 하고, 왕의 조서에 御印을 찍어 금령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사실을 알고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단 6, 10). 그 일로, 다니엘은 모사꾼들에 의해서 사자 굴에 던져집니다. 다리오 왕도 그 일로 근심합니다.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급히 사자 굴로 가서, 다니엘이 든 굴에 가까이 가서 슬피 소리 질러 다니엘에게 묻습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사자 굴에 있는 다니엘이 아룁니다. “왕이여 원하건대 왕은 만수무강 하옵소서.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나이다”(단 6, 19-22). 결국 다니엘을 참소하던 자들이 사자 밥이 되었습니다.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려 명령하지 않습니까?(단 6, 26-27).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 다니엘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유다백성들에게는 물론이고, 이미 패망한 바벨론 제국에게, 바벨론을 패망시키고 패권을 잡은 페르시아 제국과 그 왕들에게, 그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며 주권자시며 왕이시라는 겁니다. 다니엘은 평생 이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을 때에도, 10대 소년 때 바벨론에 붙잡혀 갔을 때에도, 80 고령의 나이에 페르시아 제국 메대 나라 다리오 왕의 총리로 있을 때에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 하나님은, 고난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왕 되심을 믿고, 선포하는 남겨진 그루터기와 같은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십니다(바벨론 포로시대 산물; ①디아스포라 ②서기관 ③회당; 세계복음의 기틀). 1945년 8월 15일, 우리가 광복절로 기념하는 그 날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우리 생각과는 달리, 8월 15일 그날에는 국민들이 나라가 광복이 되었는지 조차도 몰랐다고 합니다. 

8월 15일 아침 서울 시내에는, “본일 정오 중대방송, 1억 국민필청”이라는 벽보가 나붙었는데, 그날 정오 이후 사람들은 서로 눈치 보며 급히 귀가했다고 합니다. 만세소리도 없는 조용한 8․15였다는 겁니다(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 결정하는 일왕의 조서가 경성방송국을 통해, 중계 된 날).

8․16일 오전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사상범․경제범 1만 여명이 석방되었는데, 그제야 전 날 있었던 일왕의 방송이 ‘조선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개성사람 이야기’ 글 말미에 나오는 광복당시의 풍경을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많은 사람들이 광복을 맞자, 급하게 먹을 갈아서 日章旗를 태극기로 변조해서 자기 집 앞에 내다 걸었다고 합니다. 

준비 없는 광복이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집집마다 이렇게 급조한 태극기가 펄럭이는데, 가끔가끔 오랫동안 장롱 속에 숨겨뒀음직한 태극기를 내다 건 집 앞에서는 발걸음이 멈춰졌다는 겁니다. 그 중에는, 흰색 공단(두꺼운 비단) 바탕에 같은 공단 천으로 사괘와 태극무늬를 박음질하여 만든 태극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태극기의 흰색 바탕이 노랗게 변색이 되었고, 접었던 자리의 변색이 유난히 더 심한 태극기를 내다 건 집이 그렇게 우러러 보였다는 이야깁니다. 

고난의 시대, 고난의 이유를 되묻지 않고 산 사람들은 고난의 때가 차고 회복의 때가 올 때,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제의 추방 압력에도 마지막까지 평양에 남아서 선교활동 하다가 1941년 8월에 한국을 떠난 C. A. Clark라는 미국 선교사님이 계시는데, 귀국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시 일제치하에서, 한국교회는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총회적으로, 노회적으로 너도 나도 신사참배 결의를 했습니다. 클라크 선교사는 이 사실을 두고 “한국교회가 신앙을 배반했다”고 단정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반론을 제기한 겁니다. 왜였을까요? 한국교회 안에는 비록 소수지만, 순교를 각오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신앙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는 선교 역사도 짧고 교세도 미약한 한국교회에, 중세 로마천주교회의 권력 앞에서 신앙 양심을 지키다 순교한 프라하의 John Huss와 같은 위인이 나오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면서도, 주기철 목사님을 John Huss 같은 인물로, 교황 앞에 선 M. Luther 같은 인물로 묘사했습니다(1944. 4. 21 옥중순교). 또 방계성 장로님, 이기선․이인재․최봉석 목사님 등의 신앙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 교세는 34만 명이었는데,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검속당한 경험이 있는 교인이 ‘5천 명’(1.5%)이나 되었고, 순교를 각오하고 투옥 중에 있는 교인이 무려 ‘2백 명’(0.06%)이나 있는데, 이를 두고도 “한국교회가 배교했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같은 비율로 미국교회에 적용하면 수 만 명의 순교자가 나와야 할 것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클라크 선교사는 한국교회에 대하여 존경심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동감이 가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십자가를 걸머진 교회, 민경배).

▶ 하나님은 고난의 의미, 고난의 이유를 되묻는 자들을 통해서, 고난의 역사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십니다. 그 귀한 일에 쓰임 받은 믿음의 선진들의 발자취를 따라 남겨진 그루터기, 거룩한 씨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십시다. 아멘.

▦ 8․15 광복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 어두운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였던 선진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도 선진들의 신앙을 본받아 우리 시대에 남겨진 그루터기가 되게 하옵소서. 고난의 이유와 의미를 되묻고 사는 믿음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구원과 주권을 선포하며 사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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