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모니를 이루는 연합의 은혜 (시 133:1~3)

  • 잡초 잡초
  • 516
  • 0

첨부 1


하모니를 이루는 연합의 은혜 (시 133:1~3)


예배하는 자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은 주님의 소원이다. 주님은 제단 앞에 예물을 드리고자 할 때 송사의 문제가 있다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가르치셨다.(마5:24) 시기와 반목, 미움과 분열 속에서 드리는 예배는 아름답지 못하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요17:21의 중보 기도에서도 제자들이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 하나가 되지 않으면 세상이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셨음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하나가 되기, 그것은 예배하는 크리스챤들에게 중요한 과제다. 엡4:3에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였으니 성도들은 분열과 반목을 피해야 한다. 싸우는 교회, 싸우는 가정, 싸우는 성도로 소문이 나서는 안된다. 오늘의 본문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 노래는 매년 축일에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불렀던 다윗의 노래다. 

시편 120편~134편까지인 총 15편의 이 시편 노래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다. 그 15개 중 4개가 다윗의 노래인데 이 성전에 올라가는 자들을 위한 다윗의 고백은 예배자가 하나로 연합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되는 연합은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라고 노래한다. 즉 선하고 아름답다는 말은 제대로 되는 일이고 보기에 좋은 일이고 마땅한 일이란 뜻이다.

그렇다. 우리 크리스챤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로서 분열되고 반목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왜 알면서도 안되는가? 바로 죄 때문이다. 시기와 질투, 미움과 다툼이 어느 새 발동하고 나의 마음을 지배한다. 

약3:15의 말씀을 보면 이 시기와 다툼은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가 아니다. 오직 땅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는 화목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화목은 연합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 것, 위로부터 부으시는 각양 은혜를 구해야 한다. 깨어진 마음 속에 성령의 부으심이 있을 때 하나되는 예배가 가능하다. 하나되는 충성과 헌신, 섬김이 가능하다. 

주의 제자들은 모두 각약 각색이었다. 다혈질의 베드로, 우레의 아들 요한, 냉철한 머리의 수학자 빌립, 이권과 명예보다 생명에만 관심을 가진 안드레, 세금장이 마태, 독립 운동가 열혈당원 시몬, 출세욕에 빠진 야심가 가룟 유다, 어머니의 치맛 바람에 불명예스러운 야고보와 요한 등 어느 하나를 보더라도 상대적이고 하나가 될 만한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 저들은 하나가 되지 못했다. 누가 제일 크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은 주님의 섬김과 희생의 십자가를 의혹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주님 중심으로 하나가 된다. 성령을 받고나서 견고한 연합을 이루며 주님을 위해 살고 죽는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성격, 직업, 특기가 다른 제자들이지만 연합하였다.

보라, 그들의 순교적인 연합! 주님을 위해 목숨을 건 연합을 보라. 바클레이의 「12제자」란 책에서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 안드레는 S자형 틀에서 러사이에서 순교, 야고보는 헤롯에게서 순교, 요한 사도는 밧모섬 투옥, 빌립은 돌에 맞아서 순교, 바돌로매는 인도에서 거꾸로 매달려 순교, 마태는 애굽에서, 도마는 인도에서 칼에 맞아 순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유대의 습격으로 돌에 맞아 순교, 시몬은 주후 74년 북아프리카에 가서 순교, 다대오는 활에 맞아 순교하였다. 그러나 가룟 유다만 목을 매어 스스로 자결하였다. 

배반자 유다, 사탄이 그의 안에 들어가 지배를 받은 유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주님에게 충성하고 하나되어 목숨을 드렸다. 어찌 이 일이 사람의 힘인가? 죄성을 지닌 형제들이 성령을 받은 이후로 이렇게 하나가 되었다. 성령의 은혜가 기름 같이, 이슬 같이 부어지므로 하나님 나라에 목숨을 걸었고 목숨을 바쳤고 목숨을 조금도 아까워 하지 않았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정말 선하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다.

우리의 교회는 머리 되신 주님을 중심으로 섬기며 역사한다. 이 마지막 때에 우리 교회에 성도가 된 우리들은 정말 연합의 때, 하나가 되어 동거하는 삶을 요구 받고 있다. 기도자로서 하나가 되자. 예배자로서 하나가 되자. 주님의 지체로서 하나가 되자. 

특별히 9월 6일은 140억을 드려서 땅을 마련하고 새 예배당의 터에 건물을 지은 건축 헌금을 드리는 날로 정했다. 정말 이 날을 위해 기도하고 마음과 물질을 드려 섬길 때 연합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온 성도들이 기도하며 하나가 되어 주었다. 9월에도 우리의 섬김이 선하고 아름다움이 되기 위해서 온 성도가 일치해야 한다. 2002년 땅을 사게 될 당시에는 아무 것도 준비되지 못했다. 그러나 연합된 마음이 있었다. 결단하고 나니 어떤 성도가 2,500만원을 드렸다. 모자람을 채우시는 신호로 느껴졌다. 결국 그 땅을 얻게 하셨다. 하나됨의 신비, 그 아름다움의 신비는 나의 머리와 의지로 되어지지 않는다. 위로부터 성령이 은혜의 기름을 부어주셔야 한다. 은혜의 이슬 같은 성령을 부으셔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연합된 모습을 오늘 시편에서는 무엇에 비교하는가?
  

1. 제사장 아론에게 기름을 붓는 일과 같다. (시133:2)

시132:9을 보면 제사장은 의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제사장은 거룩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사장은 백성들을 하나님께 이끄는 지도자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서 섬기는 연결자다. 제사장은 특정한 경우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전달해 주는 일을 하였다. 

제사장의 존재의 이유 중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사역으로만 보면 너무 작게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계시 받은 것을 듣고 제사장은 하나님을 위한 봉사와 함께 세상에 대한 봉사를 하는 것이다. 물론 제사장은 자기 백성을 축복하고 사역을 빼놓아서는 안되었다. 이 일을 위해 깨끗해야 한다. 거룩해야 한다. 그래서 기름을 붓는 일을 했다. 

제사장의 임무가 아무리 소중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름 부음이 있어야 했다. 기름 부음이 없으면 그는 제사장이 아니다. 제사장이 되려는 후보생이다. 예비자일 뿐이다. 아무리 예복을 입고 머리에 관을 쓰고 있어도 구별된 제사장이 아니다. 기름 부음이 있어야 모든 것이 갖추어진 것이다. 거룩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끼리의 하나가 되기의 아름다움을 제사장직과 기름 부음에 비교한 것이다.

시133: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기름 부음이 있을 때 제사장이 제사장답게 되어진다는 비유인 것이다. 그만큼 하나되기의 연합은 기름 부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출30:22을 읽어보면 기름을 붓는 관유를 만드는 법이 나온다. 거기에는 상등 향품, 계피, 몰약, 육계, 창포를 감람유에 넣어 만드는데 이것을 가지고 제사장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바르는 것이다. 이것은 거룩한 제사장으로서의 구별이다. 제사장을 진짜 제사장으로 세우는 선하고 아름다운 일, 이는 기름부음에 있다. 이 기름 부음이 우리 죄인들에게 부어져야 우리는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 되기에 이르르는 것이다. 그리고 기름 부으심에 비유한 것은 하나되는 일이란 거룩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 시온의 산들에 이슬이 내림과 같다. (시133: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아름다움은 이슬을 내리는 헐몬 산과 이슬을 받는 시온 산의 관계다. 시온 산은 본래 여부스 총독의 산이었다. 시온이란 요새란 뜻이다. 이 여부스 요새가 다윗에 의하여 정복을 당하고 다윗 성이 되었고 후에 시온이란 말은 예루살렘 성읍 전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헐몬 산은 무엇인가? 헐몬 산은 팔레스틴 북북에 있는 해발 2,815m의 고산이다. 사계절 만년설이 있는 거룩한 산이다. 이 산은 갈릴리 호수 북동에 위치하고 요단 강의 수원지 역할을 한다. 이 헐몬 산에서 만들어내는 이슬의 양이 아주 풍성하다. 그것이 시온에 내려 시온을 신선하게 하고 풍성한 생명의 역할을 한다. 과일이 꽃을 피우고 식물을 힘을 얻는 것은 이슬 때문이다. 헐몬이 없으면 시온은 시든다. 활기가 없다. 시온이 있으므로 헐몬은 빛이 난다. 거기서 내려오는 이슬이 살리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보라. 헐몬과 시온은 정말 아름다운 조화를 보여준다. 

이처럼 우리 형제들, 믿는 성도들, 크리스챤 부부들에게 성령의 이슬이 내려와야 한다. 위로부터 풍성한 이슬이 쏟아져야 한다. 그러면 아름답고 선한 하나 되기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하나되는 연합은 생명의 활력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조화로운 하나 되기가 복 중의 복이다. (시133:3下)

시133:3下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하나되어 연합하고 동거하는 삶, 그것은 진정한 예배 공동체의 기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됨으로 거룩하고 하나됨으로 활기가 넘치고 생명력이 넘친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들의 삶에 복을 내리신다. 사람들과 사람들이 서로 섬긴다. 하나 되기는 그 연합된 삶 속에 이해와 양보, 높임이 있다. 친절과 화목, 내어드림이 있다. 최고의 하모니가 연합을 이룬다. 복이 넘치는 삶, 복이 임하는 삶이 이루어진다. 그 복이란 곧 영생이다. 영생의 복, 이 말은 생명의 길을 말한다. 시간의 길이로서의 삶을 누리는 복이라기 보다 특별한 삶의 복, 하나님을 사귀는 삶의 복을 말한다. 믿는 성도가 하나되어 연합하고 동거하는 것은 선하고 아름다움의 일이다. 그 일은 예배의 기초로서 기름 부음 받는 거룩한 구별과 같다. 그 일은 신선한 활력을 주는 이슬이 내림과도 같다. 그리고 하나되는 넘침은 복이 명령되고 있는 복 중의 복됨을 받는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 정말 예배자로서 하나되도록 겸손해야 한다. ① 하나 되기가 선하고 아름다움인데 ② 하나 되기가 거룩한 구별의 모습인데 ③ 하나 되기가 생명의 활력을 누리는 모습인데 그 하나되는 연합의 동거 속에 복이 명령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분열하는 죄성을 따라 예배하는 위선자가 되어 있는가? 오늘 우리는 깨닫고 회개하자. 그리고 성령의 기름을 부어달라고 하자. 헐몬의 이슬 같은 이슬의 은혜를 부어달라고 하자. 그 연합된 예배자의 모습이 갖추어지면 하나된 마음으로의 기도와 헌신, 섬김이 이루어진다. 거기에 하나님의 복에 복이 넘치게 될 것이다. 하나된 예배 분위기에서 나오는 친절, 따뜻함, 환대, 높여 드림이 서로 서로 조화를 이루면 예배하는 교회는 복에 복을 누리는 전당이 될 것이다.

미국 워싱턴에 사는 90세된 로버트 B 브라운 씨가 죽었다. 그 분이 조지아 주의 안세르센빌감리교회에 15억 유산을 헌금하였다. 그의 변호사인 프라이스 닐슨이 말하기를 브라운 씨가 인생의 허무와 방황을 느끼면서 일요일 아침, 여행 중 교회를 방문했는데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 대접은 성도들의 하나됨에서 나오는 친절이었다. 낯선 자를 예배자로 영접하며 함께 하는 친절, 그것이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은 결단을 하게 하였다. 

그렇다. 하모니를 이루며 동거하는 연합의 예배자 속에 복에 복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도 임한다. 하물며 연합된 예배를 아름답게, 선하게 보시는 하나님이 하늘의 복, 신령한 복을 100배로 주지 않겠는가? ‘내 마음에 기름을 부으소서. 은혜의 이슬을 부으소서.’라며 기도하는 오늘이 되기를 축원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