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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데스다 연못가의 꿈과 도전 (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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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 연못가의 꿈과 도전 (요 5:1~9) 
 

여러분, 주전자 뚜껑에 구멍이 난 이유를 아시지요?
밤새도록 끓는 물주전자 뚜껑의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환자는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잠 못 이루는 환자를 돕고 싶었던 따뜻한 마음이 주전자 뚜껑에 구멍을 뚫는 아이디어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주름빨대’ 아시지요?
외아들의 병 치료를 위해 오랫동안 병원생활을 했던 요코하마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우유를 마시기 위해 상반신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겨웠습니다. 
이 아들에게 누워서도 우유를 마실 수 있게 할 수 없을까라는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결국은 ‘주름빨대’라는 아이디어를 얻게 했습니다. 
이들 아이디어들은 상업적으로도 성공하여 많은 돈을 벌게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듯 성공을 부른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돈을 벌기 위하여 밤새도록 머리를 짜낸 결과라기보다 다른 이들을 배려하기 위한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38년 된 병자를 향한 주님의 따뜻한 배려를 보고 잔잔한 감동을 느낍니다.
‘위인의 위대함은 작은 사람들을 다루는 모습에서 나타난다.’는 토마스 칼 라일의 말이 생각납니다.


예루살렘 성에는 많은 출입문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양의 문’이라고 이름이 붙은 문이 있었습니다. 
그 문 곁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이 연못은 'sheep pool', 즉 양을 씻기는 풀장이었습니다. 

더러운 양들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올 때에는 그 연못에서 깨끗이 씻겨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양들의 대부분은 명절에 희생 제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연못이 얼마나 더러웠겠습니까? 
그런데 그 연못에서는 가끔씩 이상한 일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연못물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 순간 먼저 뛰어 들어간 사람은 병이 나았습니다. 
따라서 그 주변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였습니다. 
소경, 절름발이, 중풍병자, 혈기 마른 자들이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 5절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1) 절망

이 병자의 마음상태가 어떠했을까요?
먼저 떠오른 단어가 ‘절망’이란 단어였습니다.
여러분 이 병자를 한번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이 병자가 과거에 부자였는지, 가난한 자였는지 모르지만 38년 동안 병치레를 했다면 무슨 돈일들 남아날 수 있겠습니까? 

돈만 떠난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그 병자를 떠났습니다. 
“물이 동할 때에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는 병자의 고백을 통하여 가까운 일가친척, 형제자매들까지도 다 그의 곁을 떠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도 떠나고 재물도 떠난 이 38년 된 병자의 마음 상태는 어떠했을까요? 

처음에는 병이 들었지만 ‘나을 것이다’라는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의사를 찾았고, 용하다는 의사에게 자신의 병든 몸을 맡겼을 것입니다. 
이 정도의 노력으로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고, 기대한 바가 이뤄진다면 인생살이가 그렇게 힘들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그의 병은 38년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어요.
이제 이 병자의 마음에는 ‘절망’이라는 단어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도대체 이 38년 된 병이란 어떤 병이었을까?’
‘어떤 병이었기에 38년 동안이나 질질 끌었을까?’
‘어떤 병이었기에 한 사람을 이렇게 철저하게 절망시켰을까?’

‘혹시 육신의 질병 이상의 어떤 것이 아니었을까?’ 
저의 생각은 이윽고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즉 38년 된 병이란, 혹시 고칠 수 없을 정도로 38년 동안 습관화된 좋지 못한 버릇은 아니었을까? 
혹시 긴긴 세월이 지나도 지울 수 없는 어떤 실수는 아니었을까? 
혹시 38년 동안 안고 사는 아물지 않은 마음의 상처는 아니었을까? 
혹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용서받지 못한 죄는 아니었을까? 
이를테면 마음과 영적인 질병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만일 이 38년 된 병이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습관화된 좋지 못한 버릇이라면’, ‘세월이 지나도 지울 수 없는 실수라면’, ‘아물지 않은 마음의 상처라면’,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용서받지 못한 죄라면’ 베데스다 연못가에 앉아 있는 그 병자는 비록 육신은 건강하지만 그와 비슷한 마음과 영적인 질병을 안고 사는 우리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앉아 있는 그 병자에게서 언뜻언뜻 우리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말씀은 2천 년 전의 먼 옛날 얘기가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서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이 되는 것입니다.

2) 원망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병자가 남을 원망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병자는 지금 원망하고 있습니다. 
낫고 싶은데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다는 거지요. 

정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나인데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 먼저 내려가서 기회를 빼앗아 가더라는 거지요.
내가 이렇게 38년 동안이나 고생하는 것은 내 탓이 아니라 남 탓입니다. 
환경이 좋지 못한 탓입니다. 
기본 재산이 없는 탓입니다.
배운 것이 변변치 못한 탓입니다.

인도 우화 중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생쥐 한 마리가 늘 고양이를 무서워했습니다.
생쥐를 불쌍히 여긴 천사가 생쥐를 고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고양이가 된 생쥐는 개만 보면 벌벌 떨었습니다.

천사가 이번에는 개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개가 된 생쥐는 호랑이를 무서워하기 시작했습니다.
호랑이가 된 생쥐는 이번에는 사냥꾼을 무서워했습니다.
결국 천사는 더 이상 생쥐 돕기를 포기했습니다.

천사조차도 돕기를 포기했다는 거지요.
이 우화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면,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개가 되고, 호랑이가 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음이 생쥐마음이어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데 겉모습이 달라진들 인생이 달라지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모든 잘못을 남 탓으로 돌리는 마음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은혜 받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축복받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남을 탓하는지 몰라요. 

이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집안이 이렇게 된 것은 당신 탓이야. 밤낮 집에서 뭐하나?” 
“가정 살림살이가 이렇게 쪼들리는 것은 당신 탓이에요.” 
“아이들이 공부 못하는 것은 당신 탓이야. 당신이 책을 늘 가까이하면 아이들이 닮을 것 아니야?”
‘이장희’라는 가수가 “그건 너, 너 때문이야!”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아무튼 가정생활에서나 사회생활에서 ‘남을 탓’하는 이런 태도가 우리를 불행으로 이끕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이 병자는 남을 원망하는 가운데 그 병이 깊어만 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탓입니다.’하면 치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 탓입니다.’하면 평화가 넘칩니다. 
‘내 탓입니다.’하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습니다. 
‘내 탓입니다.’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습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이 병자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인생이 180˚로 변화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두 가지 이적사건이 주로 많이 출현합니다. 
소경이 눈을 뜨는 이적과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이적입니다. 
주님이 이런 이적만을 전문으로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갖가지 질병을 다 고쳤지요! 
그러나 성경에 이 두 가지 이적을 특별히 많이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영안이 열려 예수님을 바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통 사람인 줄 여기는데, 눈을 뜨고 보니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구세주)였다는 것입니다. 
‘일어나 걷는다.’는 것은 ‘삶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삶의 변화가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절망하던 사람이 꿈을 갖게 되고, 의욕상실자는 삶의 의욕을 갖게 되고........
이런 변화를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그림’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나에게도 이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이 병자를 고쳤습니까? 

1) 꿈을 주었습니다. 

6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낫고자 하느냐?” 
꿈이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희망이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바라는 것이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영혼 속에서 시들어가는 꿈, 죽은 꿈,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꿈, 그 꿈을 일깨웁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얼마나 낫고 싶었겠어요? 
그러나 그 꿈은 세월에 묻혔습니다. 
그 꿈은 환경에 묻혔습니다. 
그 꿈은 현실의 벽에 허물어졌습니다. 
그때 주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질문으로 그 잊어진 꿈, 죽은 꿈, 시들어진 꿈을 일깨웁니다.

눅 18:35-43절에 보면, 매우 소란스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소경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주위 사람들이 너무 시끄러워 ‘좀 조용히 하라.’고 꾸짖습니다. 
꾸짖으면 꾸짖을수록 점점 더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님이 불러 물었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 주님 보기를 원하나이다.” 
거침없이, 한 순간의 주저함 없이, 분명하게 자신의 꿈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소경에게는 보고자 하는 꿈이 시퍼렇게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이 소경이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소경인 채로 있었다고 했습니까?
꿈이 있어야 합니다. 
꿈이 없으면 이루는 것도 없습니다.
수중에 돈은 없지만 설계도를 그려놓으면 집을 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는데 무슨 설계도냐. 주제 파악을 해야지!’ 하면서 설계도조차 그려놓지 않으면 평생 집을 지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만큼 꿈은 중요합니다. 
꿈이 없으면 이루는 것도 없습니다.

Reader's Digest에 ‘성공한 사람들’이란 글이 있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상원의원, 장군, 100대 기업가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을 분석했습니다. 
그들의 학교 성적은 70% 이상이 중하위였습니다. 
그런데 뭐가 그들을 성공하게 했는가?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꿈이 남 달랐다는 것입니다. 
꿈, 목표, 바라는 것이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명확하고 확고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실패’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희망이 없다.”, “틀렸어요.”, “끝났어요.”, “망했다.”, “죽겠어요.”.......
그 대신 어떤 말을 사용했느냐 하면, “갑작스런 사태 변화”, “방향 수정” 같은 말을 사용했답니다. 

그 말이 그 말이지만 한사람에게 말이 주는 영향력은 그 삶을 성공하게 할 수도 있고, 실패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일이 잘못되어도 자신의 마음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실패가 아닙니다. 
즉 자기 스스로가 실패했다고 자인할때만이 실패자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성공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시들어가는 꿈, 죽은 꿈,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져간 꿈을 일깨우시길 바랍니다.
38년 된 병자의 꿈도 실현되지 않았습니까?

2) 도전을 주셨습니다. 

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38년을 앉은뱅이로 살았던 사람이 어떻게 쉽게 일어나겠습니까? 
한 주만 병원에 입원했어도 걸으려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지러운데 38년 동안이나 걸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는 명령이 될 법한 말입니까? 

무리한 요구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병자에게 도전합니다. 
“일어나 걸어라!”
비틀거립니다. “그래도 가야한다!” 
넘어집니다. “그래도 일어서야 한다!” 
담벼락을 잡고 겨우 한 발자국을 옮겨 놓습니다. “그래도 다음 발자국을 옮겨야 한다!”

방송에서 들은 얘기입니다.
불황이 되면, 사장은 평소보다 책을 두 배나 더 읽는답니다.
그러나 부장 직급 이하의 사람들은 책을 더 읽지 않는답니다.
왜냐하면 돈이 없으니까.
사장이 책을 더 많이 읽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책을 통하여 도전을 받기 위함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도전받을 기회를 찾아갑니다.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극복해야 합니다.
여기에 도전이 필요합니다.

“생각은 많으나 엄두가 안 난다.” 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생각은 많으나 엄두가 안 난다.”는 것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의 본질을 압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 없는 미래는 두려움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가는 미래는 축복입니다. 
창15:1절은 미지를 향하여 가는 아브람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protection)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blessing)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에 보호이시며, 축복이십니다.
그렇다면 엄두가 안 날 이유가 없지요.

복음성가-“나의 등 뒤에서”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 그는 절망하고, 원망하는 어두운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를 도전했습니다. 
그에게 새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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