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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성지수를 높여라! (요일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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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지수를 높여라! (요일 3:1~12) 
 

1. 영성지수란?

오늘은 사람의 자질이나 능력을 나타내는 각종 지수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먼저, 아이큐가 무엇인지는 다 알고 계시죠? ‘지능지수(知能指數)’라고 불리는 IQ(intelligence quotient)는 어떤 문제가 주어졌을 때 이해하고 분석하고 추리해서 해결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그래서 IQ가 높으면 똑똑한 사람, 즉 이해력 및 추리력 등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습니다. 그 다음은 감성지수(感性指數), 즉 EQ(Emotional Intelligence Quotient)입니다. 

이것은 감정과 느낌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인데요. 대개 EQ가 높은 사람은 긍정적인 자아개념, 남들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이끄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세 번째는 도덕지수(道德指數), 즉 MQ(Moral Intelligence Quotient)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착하고 양심적인가를 측정하는 지수입니다. 

네 번째는 창조성지수(創造性指數), 즉 CQ(Creative Intelligence Quotient)인데요. 이것은 이해하고 분석해서 종합하는 능력이며, 거기서 나아가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AQ(Analogy Quotient)”라는 것도 있습니다. ‘유추지수’라는 것인데, 이것은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여러 가지 사실들에서 어떤 유사성을 찾아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또 다른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사회성 지수, 즉 SQ(Social Intelligence Quotient)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사회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사회 적응력을 나타내는 수치입니다. 이 사회성 지수와 비슷하면서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요즘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른 바 엔큐(NQ, Network Quotient)라는 것입니다. 

NQ란 ‘공존지수’라는 뜻으로 ‘함께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얼마나 잘 운영할 수 있는가’ 하는 능력이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깊이 있는 인적 네트워크를 갖고 있느냐’를 나타내는 지수입니다. 공존지수가 높을수록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쉽고, 소통으로 얻은 것을 자원으로 삼아 더 성공하기 쉽다고 합니다. 그리고 JQ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른 바 ‘잔머리 지수’라는 것으로 얼마나 잔머리를 잘 굴리느냐 하는 것인데, 이 JQ는 누군가 웃자고 만들어낸 것입니다. 

제가 이상에서 소개해 드린 IQ, EQ, MQ, CQ, AQ, SQ, NQ 등 7개의 지수 가운데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취업사이트인 파워잡(www.powerjob.co.kr)과 ‘씽굿’(www.thinkcontest.com)에서 조사하여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성공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NQ’, 즉 ‘공존지수’라고 합니다(42.6%). 두 번째가 SQ(31.0%), 이어 CQ(16.9%), IQ(5.8%), MQ(2.5%), EQ(1.2%) 순이었습니다. 즉 사람들 속에서 관심을 가져주고 배려하는 등 더불어 살기를 잘 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NQ가 높아서 성공적인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위한 필수요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여러분이 ‘신앙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지수는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혹시 ‘SQ’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제가 이미 “社會性指數(Social Intelligence Quotient)”인 SQ를 소개했습니다. 그 SQ 말고 여러분에게 필수적인 또 다른 SQ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靈性指數”, 즉 “Spiritual Quotient”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성지수는 교회에서나 신학자들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1990년대 오스트리아의 신경학자 ‘볼프 싱어’가 인간에게 있는 “제3의 지능”으로서 영성지수를 주장했고, 이후 영국 옥스퍼드 브룩스 대학교 ‘도너 조하’ 교수와 정신과 의사 ‘이언 마셜’이 구체화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 영성지수를 IQ와 EQ를 비롯한 “모든 것의 토대가 되는 인간 고유의 지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이 영성지수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❶ 먼저 영성이 무엇입니까? 영성이란 신이신 하나님, 또는 영이신 하나님에 의해 그의 영혼과 육신, 그의 내면과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 그리고 삶의 전 영역이 주님을 닮아 거룩하고 성숙한 것, 그리고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 이상이란 성령님에 의한 초자연적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성지수란 ‘하나님을 닮은 거룩과 성숙함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면서, ‘그가 얼마나 성령님과 함께 하는지와 그 증거들이 그의 삶에서 어느 정도 드러나느냐’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❷ 그런데 이 영성지수에는 또 다른 아주 중요한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가 세속성, 즉 하나님과 신앙과 반대되는 것, 세상적이고 인간적이고 물질적인 것, 나아가 죄와 악에 대해 “거절하는 힘의 정도”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성지수란 “죄를 거부하는 힘”, “죄에 대한 민감지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2. 영성지수 = 죄에 대한 민감지수

1) 성도, 거룩한 자

요한일서는 사도 요한이 쓴 편지입니다. 주후 90년에서 95년 사이, 이미 80대 노인이 된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서 목회를 하던 중 이 서신서를 기록하여 소아시아 여러 교회들에게 보냈습니다. 그가 편지를 보낸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❶ 첫째는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주라 부르며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역사상 가장 악랄하게 박해할 때, 성도들로 하여금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❷ 두 번째 이유는 교회 안에 생겨난 심각한 교리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헬라주의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가 성육신한 것이 아니라 단지 영으로만 오셨다 가셨다’는 주장과, ‘구원은 육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영혼이 구원받은 것이니 육체의 쾌락이나 세상의 즐거움을 누려도 괜찮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런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기독교인들이 ‘윤리와 도덕 廢棄論者’로 보여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두 번째 교리적인 상황은 요한일서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합니다. 기독론과 신앙 윤리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요한일서가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시작에서부터 예수님에 관하여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1:1)”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은 분명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신들과 함께 계셨던 분이지 결코 영으로, 귀신처럼 잠시 왔다가 바람처럼 가 버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들이 만난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도 주님과의 사귐이 계속 된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1장 3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1장 6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 즉 성도와 예수님의 만남인 “사귐”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몇 년 뒤에 기록한 요한계시록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1:4,5).” 그러면서 요한일서 1장 6절은 “만일 …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 안 된다고 말합니다. 즉, 성도는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과 사귀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귀는 성도는 하나님처럼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고 나서 오늘 본문 1절에서 요한은 성도가 거룩해야할 또 다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안타까운 일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한 이해와 감격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사랑이 있었기에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것도 엄청난 일인데, 자녀이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아낌없이 베풀어주시고, 높여주시고, 영광되게 하시고, 용서하시고, 길이 참으시고, 감싸주시고, 인도하시고, 또 보호하시고…, 그렇지 않습니까? 1절 하반 절에 있는 대로 이것은 세상이 도무지 알지 못하는 사랑입니다(1b).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과거와 지금만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장래에 대해서도 감당할 수 없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2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 장차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은 ‘주님과 같아진다’, ‘주님의 그 영광스런 몸을 우리도 갖게 된다’, ‘첫 사람 아담의 타락하기 전 상태, 그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가지실 그 몸과 동일한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이 된다거나 예수님이 된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정확한 상태나 수준을 모를지라도 “예수님처럼 된다”,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고, 또 기대되는 일이지 않습니까? 이것을 설명한 사도 요한은 3절, 4절에서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과 사귀는 자,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 그리고 장차 주님과 같아질 것을 소망하는 자는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거룩한 삶은 죄를 피하는 것

특히 3절,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에서 ‘깨끗하다’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될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아니 하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살아야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구원받기 전과는 다른 착한 행실이 당연히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중국에서 선교하시는 목사님으로부터 중국과 중국 사람에 대해서 들은 것 중에 아주 인상적이었던 것이 있습니다. “중국 사람은 정말 중국사람 같더라”는 말입니다. 무슨 愚問같은 이야기입니다만, 중국인은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 사람들이 흉내 내지 못할 중국 사람들만의 특성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춘선 전도사님을 보아도 그런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만! 

아무튼 오늘 본문이 말하는 성도의 삶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과 사귀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리고 장차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사람으로서의 독특성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과 사귐이 없는 사람, 즉 세상이나 죄악과 짝하는 사람, 주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없는 사람, 그리고 장차 주님처럼 될 소망을 가지지 않은 자는 죄를 짓습니다. 

그 죄에 대해 오늘 본문은 뭐라고 말합니까?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4).”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아닙니다. 즉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사귐의 법이 아닙니다. 여러분 친구를 사귀어 보셔서 아시지요? 친구 관계는 그들만의 어떤 불문율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한쪽이 그것을 깨버리면 그 사귐은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죄를 짓는 것은 소망의 법이 아닙니다. 소망을 가진 자는 결코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저 인간적인 약점이나 기질 상의 결함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사람은 주님도, 주님과의 사귐도, 성도의 소망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6절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범하는 죄, 습관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순간적으로 실수할 수 있고, 어쩌다 넘어져 죄를 범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도라고 완벽합니까? 성도들도 죄를 짓습니다. 때로는 고의적인 죄를 짓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는 악랄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하니까 장차 주님처럼 될 것을 소망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성도는 반복적으로나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 안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죄로 인해 고통하고 회개합니다. 그러면서 의식적으로 노력하여 의를 행하고자 합니다(7). 이것이 신자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구원받은 감격과 감사로 의를 행하고 착하게 살기를 노력합니다. 

만약 신자라고 하면서 반복적이고 습관적으로 죄를 범하는 자가 있다면, 은밀한 죄를 계속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속이지 맙시다. ‘신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미혹하거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또 그 반대로 ‘성도는 죄에서 해방되었으니 죄를 지어도 된다. 제 마음대로 살아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죄를 지을 수는 있으나 죄 가운데 머물지 않습니다. 그리고 혹시 죄를 지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아파하면서 회개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죄에 대한 민감함입니다.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 도사리고 있는 것, 세상이나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 물질이나 혹은 영적인 것들에 대해 민감하여 대처하는 것이 바로 죄에 대한 민감함이지요. 오늘 여러분들에게 바로 이 “죄에 대한 민감함”이 생겨나시기 바랍니다. 

3) 죄 민감 지수는 얼마?

IQ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했으니 다시 한 번 더 해야겠습니다. 여러분, 동물들의 아이큐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서울신문 나우 뉴스>는 최근 미국 MSNBC 온라인 판을 인용하면서 ‘지구상의 동물들 중 가장 영리한 동물(smartest animals) 베스트 9’를 발표했습니다. 물론 인간이 1위이고요. 그 다음으로는 인간의 유전자와 98~99% 동일하다는 침팬지였습니다. 

침팬지는 도구 사용이 가능하고, 집단생활 속에서 먹이를 나눠 먹으며, 복잡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으로 치면 6,7세 정도의 아이들과 비슷하다고 하니까,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다음은 돌고래입니다. 돌고래의 아이큐는 80~90 정도 된다고 하며, 또 정서적으로 매우 섬세할 뿐만 아니라, 고도의 사고력과 판단력을 갖고 서로 간에 소통할 수 있는 텔레파시 능력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코끼리입니다. 코끼리들은 서로 도울 줄 알며,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인식할 수 있으며, 코끼리들 간에 음식물 등에 대해 끊임없이 의사소통 한다고 합니다. 다섯 번째는 오징어·낙지 등 두족류(頭足類)의 동물입니다. 이들 역시 돌고래만큼 머리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섯 번째는 까마귀입니다. 4살짜리 아이 정도의 아이큐를 가지고 있는 까마귀는 가장 교활한 동물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을 만큼 꾀가 많습니다. 

일곱 번째는 개입니다. 모니터에 비친 개 이미지와 풍경 이미지를 정확히 분류해낼 수 있으며, 인간의 의도를 읽어 눕거나 일어서는 등 다양한 행동양식 습득이 가능합니다. 여덟 번째는 일부 학자들이 개보다 지능이 더 높다고 주장하는 고양이입니다. 마지막 아홉 번째는 돼지입니다. 돼지는 가축 중에서 가장 영리하고 위생적인 동물이라고 하는데요, 믿든지 말든지!

그런데 여러분, 반대로 동물들 가운데 머리가 제일 나쁜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흔히 “새대가리”라고 놀리지 않습니까? 새 중에서 ‘까마귀’의 아이큐가 높다는 말씀은 드렸고, 기러기나 철새들은 혼자서도 몇 달 전에 왔던 고향으로 날아가고, 앵무새나 구관조 등은 말을 따라할 수 있기 때문에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머리가 나쁘고 잘 까먹는 사람을 그렇게 부릅니다. 

“새대가리”라는 말보다 더 심한 말이 무엇입니까? “붕어대가리”, 즉 물고기 아이큐입니다. 사실 물고기의 아이큐는 잴 수가 없습니다. 작은 물고기들의 뇌의 크기는 좁쌀보다 더 적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물고기 머리가 나쁘다고 하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금붕어를 비롯하여 물고기들은 기억이 3초밖에 안 간다고 하는군요. 그래서 물고기의 아이큐를 3초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너무나 어리석게도 똑 같은 죄를 반복하며, 죄의 기억이 지워지기도 전에 또 다시 죄를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즉 “새대가리”, “물고기 대가리”하며 놀리는 그 생물들보다 죄에 관한한 더 못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다면 감사하십시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죄에 대해 이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똑 같은 죄를 반복하고, 죄로 인하여 아파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인데 또 다시 죄를 저지르고 …. 이런 것이 반복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음의 논문을 주목하십시오.

지난 1982년,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은 “깨어진 유리창 이론”, “Broken Windows Theory”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어느 날 불량배가 가게의 유리창을 깨고 도망갔습니다. 가게 주인은 작은 피해라고 생각하여 깨진 유리창을 즉시 갈지 않고 종이로 대충 가리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에 이상하게 가게 앞에 쓰레기가 쌓이기 시작했고 벽에 낙서가 생기면서 주변이 온통 불량배들의 싸움판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손님들이 눈에 띄게 줄어 갔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이 논문은 이 같은 결과가 깨진 유리창을 방치한 것과 무관치 않다고 보았습니다. 즉 깨어진 유리창과 같은 사소한 피해를 방치하면 절도나 폭력과 같은 더 큰 강력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깨어진 유리창을 본 사람들은 건물주나 가게 주인이 건물을 포기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고, 그래서 자신들도 그곳을 가볍게 여겨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인식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쓰레기를 버리기도 하고, 급기야는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그곳이 무법천지가 되었고, 범죄의 온상이 되고 만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죄를 무시하고, 사소한 죄라고 그것에 대해 둔감해 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이 “깨어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s Theory)”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죄를 반복하면 죄에 대해 둔감해집니다. 

그때 사탄은 그 틈새를 비집고 여러분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습니다. 사소한 죄라고 방치해두면 사탄은 여러분을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되는 사람으로 낙인찍어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파멸의 자리로 몰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시기 바랍니다(살전5:22). 

3. 죄에 대해 민감하라!

어느 목사님이 “우리가 죄를 자각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데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1단계는 세상의 법을 따르는 단계입니다. 양심이나 도덕이나 혹은 널리 통용되는 법에 자신의 행동을 비춰 보고 잘못을 깨닫는 것입니다. 2단계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고, 그것을 어기면 죄로 자각하는 것입니다. 3단계는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판단하는 단계입니다. 거룩하신 주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사소한 죄들까지 밝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기준, 주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3단계입니다. 마지막 4단계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의 죄를 자신의 죄로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즉 자신이 거룩하게 살 뿐 아니라 이웃과 이 땅의 죄를 자신의 죄로 알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성도의 거룩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단계에 있습니까? 혹시 여러 유혹으로 인하여 세상의 법까지 어겨가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죄에 민감해집시다. 나의 죄에 민감할 뿐 아니라, 이웃과 이 민족의 죄에 민감해 집시다.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1:15,16).”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은 …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했습니다(살전4:3). 거룩하십시오! 그런데 거룩하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으나 거룩하게 사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거룩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많으나 거룩을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은 적습니다. 거룩하게 사는 법을 배우는 사람은 많으나 배운 만큼 거룩하게 사는 사람은 적습니다. 실제로 거룩한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거룩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죄에 대해 민감한 사람들, 죄를 멀리하는 사람들, 죄와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죄를 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역시 죄를 피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한다면 어떻게 거짓말을 하고, 양심과 도덕과 법에 위배되는 일을 하며, 저주를 퍼붓고, 모략을 꾸미며, 욕을 하며, 불결한 행위를 하며, 저울을 속이고, 거짓증거를 일삼으며, 순결을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까? 죄에 대해 민감해 지십시오! 죄에 대한 민감지수를 높이고, 거룩을 위하여 죄와 싸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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