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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주신 새 이름으로 살라 (사 6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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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주신 새 이름으로 살라 (사 62:1~5) 


1.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며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창2:19-20)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 하여금 모든 생물의 이름을 지어주도록 함으로 창조 사역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그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피조물의 이름을 짓지 않으시고 그 권한을 아담에게 위임하신 것은 만물보다 뛰어난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해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존귀하게 만드신 것을 다윗은 그의 시편 8:4-9에서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시8:4-9)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름은 그 사람의 특질과 성품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의 인격과 생애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갈렙 집안 가운데 나발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수 천 마리의 가축을 소유한 거부였습니다. 그의 아내 아비가일은 아름답고 지성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는 거칠고 야비하며 고집이 세고 성격이 좋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한 때 나발의 가축떼가 약탈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을 때, 다윗이 아무 조건 없이 나발의 가축 떼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을 기억하고 다윗은 부하들을 보내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부탁했습니다. 

당시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받고 도피 중에 있었기 때문에 식량이 고갈된 상태였습니다. 나발은 다윗의 요청에 대해 이렇게 말하며 거절합니다. ‘이 다윗이란 사람은 도대체 누구요? 나는 그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없소. 아마 왕궁에서 도망쳐 나온 많은 종들 가운데 하나인가본데, 생면부지의 이 사람에게 빵 한 조각도 내 줄 수 없소.’ 그래서 다윗의 부하들은 빈 손으로 돌아가서 나발이 말한 것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모두 칼을 차라’ 하고 배은망덕한 나발과 그의 일족들을 몰살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나발의 종들 중에 한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아비가일에게 다급하게 말합니다.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약간의 식량을 구하러 그의 부하들을 보냈으나 심한 모욕적인 말로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지난 날 우리 가축떼들과 종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밤낮으로 우리를 지켜주어 염소 한 마리도 잃어버리지 않았었습니다. 아비가일, 당신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빨리 결단해야 합니다. 다윗은 주인과 주인의 전 가족을 몰살하기로 이미 작정하였습니다. 주인은 막돼먹은 사람이라 말을 붙여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자 아비가일은 급히 충분한 식량을 준비하여 여러 마리의 나귀에 싣고 다윗을 찾아갑니다. 마침 다윗이 ‘이 자를 도와 준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나의 선을 악으로 갚는 이 배은망덕한 인간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겠다. 만일 내가 내일 아침까지 그들을 모조리 죽이지 않고 한 사람이라도 남겨 둔다면 하나님이 나를 저주하시기 원한다.’고 말하면서 분기탱천하여 나발을 죽이러 오고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도중에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엎드려 절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제발 내 말 좀 들어 주십시오. 모든 것은 내 잘못입니다. 나발은 성질이 못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가 한 말에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그는 이름 그대로 미련한 자입니다. 여기 당신에게 가져온 선물이 있습니다. 내가 감히 이 곳까지 찾아온 것을 용서하십시오.’ 

아비가일이 자기 남편 나발을 두고 ‘그 이름이 적당하니 그 이름은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삼상25:25)고 한 것처럼 ‘나발’이란 이름은 ‘미련한’, ‘어리석은’ 이란 뜻입니다. 나발은 다윗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차기 왕으로 보지 못하고 사울에게 불충한 떠돌이로 몰아세워 선을 악으로 갚은 어리석은 사람, 스스로 제 무덤을 판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나발은 몸이 돌덩이처럼 굳어져 열흘 후에 심장마비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삼25장) 이렇게 이름은 사람의 성품과 인격, 그리고 그의 생애를 예감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 자신들의 소원을 표현하고 그 아이의 인격과 장래를 예견하기도 합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하나님에 의해 개명(改名)되는 특별한 경우가 믿음의 선진들에게 많이 있었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장자권의 축복을 가로채고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고 하자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천리만리 떨어진 하란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합니다. 도피 중, 해는 져서 어두운데 피곤한 몸을 돌을 베개삼아 누었습니다. 누워 자는데 꿈에 하늘에 닿는 사닥다리 위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야곱이 잠이 깨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고 말하며 베개하였던 돌로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벧엘’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서원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28:13-22)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약속하신대로 거부가 되어 평안히 돌아올 수 있도록 함께 하셨습니다. 이를 잊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나올 때,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31:13)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나님의 이같은 말씀에 따라 고향으로 떠나는데 형 에서가 가장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합니다. “(창32: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이에 하나님께서 “(창32:12)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고 응답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얍복 강변에서 밤을 지새우며 마치 하나님과 격렬한 몸싸움을 하듯이 영육간에 모든 힘을 다 쏟아 하나님의 사자를 단단히 붙들고, 눈물로 붙들고 필사적으로 부르짖어 간구합니다. “네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의 사자가 환도뼈, 사람의 몸을 받쳐주는 가장 중요한 환도뼈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자를 놓아주지 않자 그 사자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야곱이 “야곱이니이다.”고 하자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32장)고 말씀하시므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새 이름, ‘이스라엘’로 지어주신 것은 이제부터 야곱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언약에 대해 실질적인 후계자임을 정식으로 비준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그가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창25:26) 이 이름은 나쁜 의미로 사용될 때 남을 사취하는 자, 거짓된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속이는 자’라는 뜻의 ‘야곱’은 허물과 실수와 고난으로 점철된 생애를 살았고 자기만을 아는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자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얍복 강가에서 그의 생애를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의미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그는 이제 간교한 인간 ‘야곱’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주어진 언약의 상속자로서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과 이삭을 잇는 이스라엘의 3대 조상이자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킨 거룩한 가문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그의 삶이 이제부터는 공식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졌음을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아래 살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도 여러분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야곱과 같이 새 이름, ‘죄인 ○○○’가 아니라 ‘의인 ○○○’으로 개명된 것입니다. 예수 믿고 새 이름을 받으신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는 복의 근원이 되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2.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을 새 이름으로 부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라는 이름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숭배하는 등 죄악으로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기 때문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는 징벌을 당하게 되었지만 죄 사함을 받고 잃어버렸던 땅, 영토를 회복시켜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죄 사함을 통해 새 이름으로 부르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죄인’이라는 이름이 의롭다고 인정받은 새 이름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8입니다. 

(롬5:8-9)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또한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죄의 종’이 축복이 약속된 새 이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요8:34-3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

더 나아가 예수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면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라는 새 이름을 주십니다.

(요15:14-15)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그리고 예수 믿고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 말씀을 지키며 그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는 성도에게는 하나님 나라 성전에 새 이름으로 기록하리라고 했습니다.

(계3:8-12)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예수 믿고 ‘아브라함의 자손’된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대로 생활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시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 성전에 ‘새 이름’으로 기록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자신의 삶을 통해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아 정죄를 당치 않는 자라 고백합니다.

(시32:1-2)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렇게 죄 사함을 받은 성도에게 ‘새 이름’으로 부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왕관을 씌우시고 헵시바라 부르고 그 사는 땅을 뷸라라 부르시며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기뻐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을 씌우신다는 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로 보호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헵시바’는 ‘나의 기쁨은 그녀 안에 있다.’, ‘뷸라’는 결혼한 부인을 뜻하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히스기야 왕의 왕비 이름이 ‘헵시바’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영원한 신부로 삼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헵시바’요 교회는 ‘뷸라’입니다. 여러분의 신분은 하나님의 ‘헵시바’인 것을 항상 기억하시고 항상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3.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새 이름으로 부르시겠다고 하신 뜻은 그 이름에 걸맞는 새롭게 변화된 삶과 그에 따른 새로운 사명이 부여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헵시바와 뷸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로서 신랑의 기쁨이 되고자 하면 무엇보다 정결, 깨끗해야만 합니다. 외모가 아무리 빼어난 미모를 자랑한다 해도 몸과 마음이 더러운 여자는 아름다운 면류관을 쓴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이 깨끗할 뿐만 아니라 ‘나의 기쁨은 그녀 안에 있다.’라는 ‘헵시바’의 이름답게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는 고백으로 항상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활면에서 성도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살전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리고 세상에 대해 여러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사랑과 그 이름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주사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시어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신 목적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3-6입니다. 

(엡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께서는 일찍이 베드로를 제자 삼으시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이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두 사람 중 하나가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였습니다. 안드레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가 ‘형, 우리가 메시야, 그리스도를 만났어!’ 하고 말한 후에 그를 데리고 예수님에게 갔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게바라고 부르겠다.’ 라고 말씀하시며 시몬에게 ‘게바’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게바’는 ‘반석’, ‘바위’라는 뜻인데 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베드로’입니다.(요1:35-38) 예수께서 시몬을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신 것은 베드로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의 상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몬’은 ‘시므온’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구약 12지파 중 시므온 지파의 조상인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과 같은 이름입니다. 그 시므온은 과격하고 성미가 급한 인물이었습니다.(창34:25-31) 

변화되기 이전의 시몬 베드로 역시 충동적이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몬의 성격을 간파하신 예수께서 시몬을 장차 ‘게바’로 부르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게바’, 즉 ‘베드로’는 예수 믿고 변화되어 반석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나약함을 보였지만 이러한 인간적인 약점들을 예수께서 보내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극복하고 변화되어 초대교회의 듬직한 사도, 반석같은 사도로 쓰임받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워진 것처럼 ‘요한의 아들 시몬’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아들’인 ‘게바’, ‘베드로’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를 베드로는 자신의 삶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베드로 전서2:9에서 이렇게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이라는 말씀은 예수 믿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낳으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자녀 삼으신 목적은 인류를 생명의 빛에 들어가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을 기뻐하십니다. 범사에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이름을 전하는 하나님의 ‘헵시바’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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