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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죄를 사하여주옵시고 (마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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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죄를 사하여주옵시고 (마 6:12) 
 
 
양식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 백성의 삶에 발생되는 ‘결핍’을 채우기 위한 기도입니다. 반면 죄 사함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 백성의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결함’이 생겼을 때 이를 회복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먼저 “죄”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행복을 갈망하는 현대인들은 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도저히 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끊임없이 죄에 대해 언급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 역시 죄 문제 해결에 초점이 있습니다.

성령님에 대하여 “그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8)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자리라면 죄에 대한 인식도 강렬할 수밖에 없겠지요. 성령님은 죄가 단지 도덕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와 관련된 것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 죄를 범한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법에는 ‘하라’는 명령 형태의 법과 ‘하지 말라’는 금지 형태의 법이 있습니다. 어떤 형태의 법이든 범하면 죄가 되지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하지 말라’는 금지의 법을 지키지 못했을 때는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는 반면에 ‘하라’고 명령하신 법을 행하지 못했을 때는 여러 가지로 변명하려할 뿐 죄로 인정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형제에게 하지 말아야 할 악을 행했을 때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만, 형제를 “일흔 번씩 일곱 번”(마 18:21-22)이라도 용서하지 않는 것 역시 심각한 죄임은 깨닫지 조차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이제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말씀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죄가 깨끗하게 사하여 졌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모두 도말하셨음을 고백하는 사람이지요. 

그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 때문에 죄 사함을 확신한 사람은 더 이상 회개의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엉뚱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당시의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기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기도의 내용들이 오늘날에 유효하다면 이 기도 역시 유효하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요.

모든 죄를 사함 받은 성도에게 왜 죄 사함을 위한 기도가 필요한 것일까요?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는 것은 법적인 판결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최종 권위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칭의가 한 번 선언되면 그는 더 이상 재판관 앞에선 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바뀌어 아버지 앞에 있는 자녀가 됩니다. 하지만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합당한 삶을 온전히 나타내 보이지 못합니다. 고의적이든 연약함으로 말미암았든 여전히 하나님의 법을 허다하게 어기는 모습으로 살아가지요. 아무리 조심해도 완벽하게 깨끗할 수 없습니다. 이런 현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변화를 가져옵니다.

죄를 범할지라도 아들이라는 신분은 결단코 변하지 않습니다. 한 번 아들이면 영원히 아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을 잘 준행한 아들과 법을 어긴 아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관계성에서 생기는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 동시에 공의이시므로 죄에 대해서는 대충 넘어가지 않고 단호하십니다. 

엄하게 대하시든 친밀하게 대하시든 사랑의 밀도에는 차이가 없지만 자녀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와의 관계성에서 큰 차이를 느낍니다. 죄를 범하면 그동안의 친밀함 대신에 서먹함과 불편함과 두려움을 느낍니다. 늘 함께 계실지라도 대단히 멀게만 느껴지지요. 이때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주는 것이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시작에 있는 “아버지여”는 죄 사함을 위한 이 기도가 재판장께 칭의를 위한 속죄를 요청하는 죄인의 간구가 아님을 말해줍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녀가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는 기도임이 분명하지요. 신분 회복이 아니라 관계성 회복을 위한 기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자녀답지 못하게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단히 슬프시게 하는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명령하시거나 금지하신 말씀을 벗어나서 자기 체험과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은 자녀이긴 하되 탕자의 삶입니다. 성도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혹은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듣고 준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 죄”라는 말씀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죄 사함의 문제를 개인의 차원에서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의 기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죄 사함을 위한 기도는 죄 지은 당사자에게만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구원 받은 성도는 ‘한 몸’입니다. 개개인의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연합되어 머리되신 주님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종종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가 나쁘거나 교회의 부패된 모습에 실망해서 홀로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하려는 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지체와의 연합됨 없이 홀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한 지체의 죄 문제는 그 지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몸 된 교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한국과 세계 교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할 지라도, 그것들이 모두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들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정작 죄를 범한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 줄 깨닫지 못했습니다. 회개를 시작한 사람은 비교적 다른 사람보다 깨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음을 심각하게 발견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기 민족을 위해 가슴을 찢으며 먼저 회개했지요. 오늘날도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은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먼저 회개한 사람으로 드러나야만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자랑하는 바리새인의 기도와 가슴 치고 회개하며 긍휼을 구하는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신 후에,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눅 18:10-14). 저는 매우 조심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이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한 바리새인과 같은 자세로 현시대의 교회를 비판했었습니다. 대형교회를 하는 목회자는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시각을 가졌습니다. 한 목사님께서 이런 태도를 비겁하다고 지적하셨을 때 마음이 크게 찔렸습니다. 이제는 비판성을 유지하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세리의 기도로 전환하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구절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이 구절을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준 사실 때문에 그것을 공로로 삼아서 죄 사함을 요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율법주의입니다. 기도란 철저히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해서 드리는 것이지 자기 의로 나갈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이 구절은 속죄론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에 관련된 말씀임을 기억해보십시오. 참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 여전히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 속에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 나타나겠습니까? 타인을 용서하는 삶에서 그 증거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처음 깨달았을 때는 당장 강도가 제 목숨을 앗아간다 할지라도 포근하게 안아주며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해가면서 종종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강도짓을 한 것도 아닌 사소한 일에서 말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온전히 용서하신 그리스도인 형제를 오랫동안 용서하지 못했을 때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있는 것으로 인하여 괴로웠습니다. 저는 제게 용서할 힘이 없음을 깨닫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조금씩 용서하게 됨에 따라 저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 후로는 그들을 위해 소극적이긴 하지만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죄 사함을 받았음을 확신한다면 마땅히 타인을 용서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 속에 있다면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바르게 준행하고 있거나 준행치 못한 것에 대해 부단히 회개하는 태도를 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이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서도 마음을 다하여 준행하려 하겠지요. 

용서하려는 마음도 없고 그런 태도에 문제의식도 없다면 애초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았을 수 있으며 ‘우리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할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값없이 용서할 수 있는 것은 그 같은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음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하나님과 정당한 관계를 유지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면 가장 무서운 저주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도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이 날마다 공급될지라도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될 수 있음을 생각하시고, 죄 사함을 위한 기도를 드리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드릴 때에는 이미 모든 죄를 용서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끔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기도문에서 죄 사함을 위한 기도의 목적은 죄로 말미암아 뒤틀린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려는데 있습니다.

원칙상 하나님과의 수직 관계가 바르게 될 때 사람들과의 수평 관계도 바르게 회복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상 내게만 지은 죄라면 나의 용서로 끝나지만 ‘우리에게’ 지은 죄는 용서의 주체가 ‘우리’여서 내가 먼저 용서한 후에 다른 이들이 용서하기까지 오랜 기다려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성도들 간의 관계도 바르지 못한 채 존재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이런 현실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 속에 있는 성도의 고통스런 인내를 요청합니다. 그런 중에도 하나님의 무한하신 용서의 사랑을 잘 기억하면서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한 기도를 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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