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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가지 부족한 것 (막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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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부족한 것 (막 10:17~22)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Habitat for Humanity (사랑의 집짓기 운동 연합회)' 라는 세계적인 단체가 있습니다. 이 운동은 밀러드 풀러(Millard Fuller)라는 미국인 변호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가난하지만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풀러는 벤처기업을 일으켜 20대 후반에 백만장자가 됩니다. 어느 날 아내 린다(Linda)는 "돈만 추구하는 의미없는 삶을 더 이상 살 수 없다" 라며 물질에만 집착하던 그에게 별거를 요청했습니다. 

풀러는 가정이 위기를 맞자 별거 중인 부인을 찾아갔습니다. 아무리 설득을 해도 부인이 돌아서지 않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늦지 않으리'(Never Too Late)라는 영화를 함께 보게 되었습니다. 영화가 풀러의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후에 풀러는 고백합니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영화는 자신이 임신하기에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 여자가 임신에 성공한 내용이었는데, 영화의 메시지는 무엇을 변화시키는데 늦는 법은 절대로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강한 빛을 느꼈습니다. 빛의 느낌은 무시무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이 빛이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머리 속을 갑자기 뚫고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너의 돈을 다 남에게 주어라. 너 자신을 다시 가난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자비에 맡겨라' 그 순간 나는 린다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방금 나에게 모든 돈을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말을 들은 그녀도 대답합니다. '저도 동의해요. 우리 가진 돈을 전부 이웃에게 빨리 나누어줍시다.' 얼마 후 풀러가 전 재산을 기부한다고 선언했을 때 가족과 친구들은 어리석은 생각이라며 포기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그러나 풀러 부부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믿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그로 인해 부부관계는 회복되었고, 세계적 집짓기 운동 단체 'Habitat for Humanity' 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앞에는 예수께서 어린아이를 용납하시며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어린아이 같은 자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9장과 누가복음 18장에도 동일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어린아이에 대한 말씀을 하신 후에 부자 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가복음에도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 같아야 들어간다는 말씀이 있은 후에 연이어 부자 관원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의 모습으로 후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자의 모습으로 비교됩니다.  

젊은 관원이며 부자인 이 사람은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예수께 물었습니다.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니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켰노라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 고 명하십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영생과 모든 것까지 얻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더 믿어야

16세기 성자로 불리우는 필립 디 네리(Philip de Neri)가 당시 최고 명문 대학인 컨티넨탈 대학의 교정을 걷다가 한 청년을 만나 대화를 시작하게 됩니다. "자네 전공은 무엇인가?" "법학입니다" 네리는 청년에게 "대학을 졸업하고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물었더니, 청년은 "대학원에 진학해서 박사 학위를 받겠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네리는 계속 질문을 하였습니다. "박사학위를 받으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하겠는가?" "변호사를 개업하지요" "그 다음에는?" 

"풍부한 지식과 응변으로 힘든 문제를 변호하여 명성을 얻겠습니다" 네리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청년은 "그 후에 많은 돈을 벌어 부자가 될 것입니다." 네리는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겠는가?" 청년은 "명성과 재물을 소유하고 평안히 살 것입니다." 네리가 다시 질문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청년은 말합니다. "그 다음에는 아마 늙게 되겠지요". 네리가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겠는가?"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생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누구도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사람은 영생이 자신의 행위에 의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여야' 라며 행위를 앞세웁니다. 율법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스스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행위로는 하나님 나라에 절대로 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선행을 해도 마음에 탐심이 가득하고, 교만이 가득하고 탐욕이 가득하다면 의미가 없는 일이 됩니다. 영생은 선한 일을 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을 믿는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죄인된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예수를 믿을 때 영생을 허락하십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영생이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3장 14-15절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생은 십자가의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지금 죽는다 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이 분명합니까? 자기 공로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믿음이 더해져야 합니다.
 
둘째로 더 버려야 

슈바이처(A. Schweitzer)가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에 중요한 것 세 가지를 포기했습니다. 첫째는 심취했던 바하 음악을 포기했고, 두 번째는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대학교수직을 포기했고, 세 번째는 풍요롭고 안락한 삶을 포기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후 아프리카 오고웨 강변 랑바레네(Lambarene)에 병원을 설립하여 흑인들의 병을 고쳐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포기했던 것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았습니다. 없는 자를 위한 헌신이 오히려 마음에 기쁨과 감사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슈바이처의 희생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더 큰 것으로 갚아주셨습니다. 그토록 심취했던 바하의 음악을 포기했지만, 바하 협회에서 대대적인 연주회를 아프리카에서 열어주었고, 대형 오르간까지 선물했다고 합니다. 또한 존경과 명예가 뒤따르는 교수직을 포기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평생 강의할 시간을 1년 동안 모두 허락하셨습니다.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그에게 대학마다 초청해서 강의 듣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을 포기했지만, 저술한 자서전을 비롯한 많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자신이 택한 삶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어 기쁨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위해 버렸더니 더 좋은 것을 얻게 된 것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이 사람은 재물을 자랑으로 여겼지만 재물이 영생의 장애물이 되었음을 예수께서 지적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종교적인 열심이 없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자신이 붙들고 있는 한 가지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한 가지를 버려야 합니다. 

너무도 소중하여 포기하기 두렵고 괴로운 것, 그것까지도 포기할 줄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 신앙으로 아브라함은 생명 같은 독자 이삭도 기꺼이 바쳤습니다. 그러나 욕심을 끝내 버리지 못했던 가룟 유다, 게하시, 아간은 마지막 한 가지를 포기하지 못해 결국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마지막 한 가지를 포기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가 됩니다. 현재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이 영혼의 유익을 주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유익이 없다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서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은 과감히 버리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셋째로 더 좇아야  

무대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걸려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사람. 이 사람을 웃기면 100달러를 줌." 모두가 대들어 상상할 수 있는 이상한 동작과 우스개 소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빌 푸콰(Bill Fuqua)는 완벽하게 서 있었습니다. '꼼짝 않고 서 있기' 로 기네스북에 오른 푸콰는 백화점이나 유원지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마네킹으로 오해받을 정도였습니다. 14살 때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가 재능을 발견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푸콰는 능력의 원인을 탄력이 뛰어난 피부와 극히 낮은 심장 박동수와 집중력에 돌립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마땅히 움직여야 할 때 가만히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움직이지 않고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다 할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가만히 있으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좇아오라고 명하십니다. 그런데 아직도 주를 좇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본문 22절입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주님을 따르려면 삶을 정돈해야 합니다.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물동이를 버려 두고 삶을 정돈하는 만큼 주님을 분명히 좇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교적 명상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림이 삶의 최고의 기쁨이라고 결단하였기에, 원칙으로 정했기에 하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삶의 정돈이 필요합니다. 잡다한 일을 펼쳐놓으면 안됩니다. 주변의 가지를 치고 집중하여 주님을 좇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좇아가는 일은 최고의 가치이기에 후회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좇아가는 일은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됩니다. 결단하지 못하고 주님을 좇아가지 못하는 것이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아닙니까?

신앙에 실패하는 이유는 한 가지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젊은 사람은 영생이 목적이 아니라 영생을 하나의 소유로 생각합니다. 영생은 구했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려는 각오가 없었습니다. 영생을 얻을 마음은 간절했지만 재물을 사랑하는 욕심이 더 크기에 결단하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한가지가 부족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보다 더 확신을 가지고 믿어야 합니다. 더 버려야 합니다. 더 주님을 좇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부족한 한 가지는 채우고, 버리지 못하던 한 가지는 버리는 결단을 통해 비로소 영생을 얻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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