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출 12:29~42)

  • 잡초 잡초
  • 475
  • 0

첨부 1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출 12:29~42)


요즈음 대한 민국 남자로 사는 것이 무척 어렵다고 합니다. 40대 남성 사망률 세계 1위라고 합니다. 40, 50대 여성 대비 남성 사망률 세계 1위인데 여성의 3배라고 합니다. 40, 50대 여성 대비 남성 자살률 세계 1위인데 여성의 3.3배라고 합니다. 남성 근로자 노동시간 OECD 가입국가 중 1위이고 남성 혼자 밥벌이하기 세계 1위라고 합니다. 징병제 국가는 10여개 정도 되지만 남자만 2년 이상 복무하는 곳은 한국뿐이고 남자만 민방위 받게 하는 유일한 국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쌍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자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반장·회장·사장 등 '장'자가 붙는 자리는 대부분 남자들의 차지이고 사회에서 별반 신통치 않은 남자라도 집에 가면 '가부장'이었는데 이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학습 능력·생존율·자제력 등 여성보다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회사를 다니는데 자신은 힘들게 일해도 과장이 칭찬을 해 주지 않는데 외모가 아름답고 몸매 잘 잘 생긴 미스 김은 별일 하는 것이 없는데도 늘 칭찬하더라는 것입니다. 승진도 잘되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대단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하나님께 이 남자가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제발 저를 여자로 만들어 주세요. 하나님이 너무나 간절히 매달려서 여자로 만들어 주었답니다. 그런데 결혼하여 집에서 밥이나 하고 편안하게 살 줄 알았는데 밤마다 남편이 못살게 굴더랍니다. 하도 힘들어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나 다시 남자 만들어 주세요. 그래도 남자일 때가 좋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얘야, 너 어젯밤 임신했다. 다시는 남자가 될 수 없다.” 

요즈음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며 무언가 확 바꾸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이 되고 남편이 아내가 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남자로 살든 여자로 살든 가난하든 부자든, 병들었든 건강하든 언젠가 주님 앞에 서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삽니다. 희망은 보이지 않지만 돈보다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밀러는 인간존재와 삶에 가장 가치 있는 강력한 자원을 희망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5장 4절에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치고 용기를 주어 장래 큰 희망을 가지게 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저 죽어 있는 고전이 아니라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 기록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 밤”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밤중에” 30절에 “그 밤에” 31절 “밤에” 42절 “이 밤은”이라고 “그 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밤은 어떤 밤입니까? 4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수많은 밤을 지냈지만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느끼는 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밤이라는 말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지 무덤덤했는데 430년이 되던 어느 날 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목격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 속에 개입하심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애굽의 노예 생활처럼 가난의 노예가 되어 고통당하시는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지금, 질병의 노예가 되어 육체적 고통을 당하시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지금, 염려의 노예가 되어, 잘못된 습관의 노예가 되어, 의심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군대로 살아가고 있지 못하는 성도가 계십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430년이 마치는 그 날이 우리에게도 분명히 올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날이 분명히 임하였듯이, 우리가 희망을 품고 기다리던 것을 이루는 그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도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이 분명히 온다는 희망을 가지고 사는 우리는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단순한 인간적 지혜가 아니라 우리를 지으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힘들고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이 있습니다. 아무리 억울해도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이 있습니다. 아무리 오해를 받아도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이 있습니다.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날이 있습니다. 아무리 병들어 고통스럽게 살아도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을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를 갚아주신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29-30).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늘 세 종류의 사람을 만나며 삽니다. 첫째는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입니다. 둘째는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나에게 해를 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희망을 꺾어 버리고 절망하게 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입니다. 애굽의 바로 같은 사람들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간대접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의 소유물로 취급하였습니다. 고된 노역에 시달렸습니다. 자유를 요구하면 요구할수록 더욱 강압정책을 썼습니다. 권력의 힘으로 인권을 말살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생명을 마음대로 박탈하였습니다. 노예 백성이 많아진다는 단순한 이유로 남자 아이를 낳으면 다 죽였습니다. 

이런 일을 당한 부모들은 얼마나 분노가 치밀고 죽이고 싶겠습니까? 내 자식을 죽인 사람 그냥 놓아두고 싶겠습니까? 복수하고 싶어 합니다. 코끼리들은 당한 일들을 결코 잊지 않고 복수한다고 합니다. 사람도 그런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36년 일본에게 당했는데 지금도 얼마나 일본 사람들에 대하여 복수심이 강합니까?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미국인, 일본인, 한국인 세 나라 사람이 천국엘 갔답니다. 천사가 "당신들은 세상에 살 때 너무 많은 죄를 졌으니 엉덩이를 백대씩 맞아야 겠소! 

그런데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면 한가지씩은 소원을 들어 주겠소!""라고 했답니다. 이 때 미국인이 "저는 엉덩이를 때릴 때 두루마리 화장지를 위에 올려놓고 때려 주세요!"라고 했답니다. 일본인은 "저는 방석을 올려놓고 때려 주세요!"라고 했답니다. 이번엔 한국인 차례가 왔답니다. 천사가 "당신의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한국인은 " 저는 금방 들어간 일본 놈을 올려놓고 때려 주세요!"라고 했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430년을 당했습니다. 아들 한 명도 아니고 낳는 대로 죽이는 사람 어떻게 보고만 있겠습니까? “10명의 친구가 이익을 주는 것보다 1명의 적이 더 많이 해칠 수 있다.”는 말처럼 치명적인 고통을 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원수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신앙인은 신앙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됩니다. 한 때 모세는 원수를 직접 갚으려하다가 실패하여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이 억울하게 당하는 모습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원수를 직접 갚아 죽였습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도망자가 되어 40년을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그 날 밤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29절을 보십시오. 공의를 시행하시는 여호와께서 직접 원수를 갚아 주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면서 애굽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바로의 큰 아들을 죽였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들을 노역시키면 부려 먹었던 군인들의 큰 아들도 죽습니다. 아들을 빼앗아 죽였던 애굽 사람들의 큰 아들도 죽었습니다. 심지어는 옥에 갇혀 있는 사람의 큰 아들도 죽었습니다. 짐승의 첫 새끼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전국적으로 초상이 난 것입니다. 철저하게 원수를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 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의 밤, 부활의 밤, 승리의 밤이 되었지만 원수 같은 애굽 나라에는 심판의 밤, 죽음의 밤, 통곡의 밤이 된 것입니다. 3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출12:30)”

여기에서 오늘날도 살아 있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12:19)”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억울한 일 당한다고 당장 내 힘으로 그 억울함을 풀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우리 스스로 원수 갚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습니다. 레위기에서도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교훈하고 있습니까?

첫째는 대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마5:39)” 원수를 원수로 갚으면 원한의 고리는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힘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고 힘은 충돌하여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둘째는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마6:14)” 

셋째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눅6:27)” 

넷째는 원수를 축복하며 기도해 주라는 것입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8)”

잘못된 힘을 잠재우게 하는 것은 용서하고 사랑하고 축복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원수의 고리를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온다는 것입니까?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증거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마5:45)”

둘째는 우리도 용서를 받게 됩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5)”

셋째는 우리가 상급을 크게 받습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눅6:35)”

아무리 나에게 해를 끼치는 원수일지라도 내가 직접 갚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마지막 그 날이 있습니다. 마지막 그 날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 우리가 죽어 천국 가는 날 우리 하나님이 심판으로 원수를 갚아 주고 우리의 눈물을 우리 하나님이 다 닦아 주실 것입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7:17)”


2.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신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31-36). 
우리가 원수 같은 인간들을 대할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면 늘 손해 보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 동안 늘 손해만 보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열심히 일을 하여 성을 쌓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가는 더 많은 노역을 원하는 채찍입니다. 일 년 동안 동사를 지어 수확하면 다 빼앗기고 겨우 입구멍에 풀칠할 것 밖에 남지 않습니다. 일해 주었으면 마땅히 그 대가를 받아야 하는데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했을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 민족을 보십시오. 얼마나 수탈을 당했습니까?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보수우익을 표방하는 시민단체인 자유시민연대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가 일본의 한 잡지에 일본의 식민지배가 축복이라고 실었습니다. 일본 통치기간을 통해 한국은 보다 성장, 발전, 강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지배는 오히려 매우 다행스런 일이며, 원망하기보다는 오히려 축복해야 하며 일본인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한국 농촌을 일본의 항구적인 식량 공급지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발악을 하였습니까? 식민통치가 아니라 민족 말살 정책을 폈습니다. 무지막지한 힘을 동원해 성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꽃다운 나이의 소녀들을 위안부로 동원해갔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물자 수탈은 물론 노동력을 수탈해 갔습니까? 징용, 징병, 위안부, 정신대에 우리 민족을 강제 동원하여 일본의 노리개나 총알받이로, 또는 광산이나 부두의 노무자로 잔혹하게 써먹었습니다. 

경기도 수원의 제암리 교회는 교인들을 예배당에 넣어 놓고 입구를 나무로 막아 못을 마구 박아내어서 나오지 못하게 한 채로 기름을 끼얹어 살상시켰습니다. 이런 만행을 저질러 놓고도 오래도 일본은 보상은 해 주지 않고 방위 백서에 독도는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딸을 누이를 아내를 정신대로 보낸 가족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승조 씨 같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36년 간 자유를 잃은 우리도 그런데 430년간 노예 생활을 한 이스라엘은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겠습니까? 얼마나 원한이 많았겠습니까?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430년을 자유도, 나라도, 희망도 없이 노예 생활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억울함을 보상해 주는 그 날이 온 것입니다.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 그 밤 여호와의 날에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십니다. 네 가지를 보상해 줍니다. 

첫째가 정치적 자유를 보상해 주십니다. 
31절을 읽어 보십시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렀습니다. 그가 말한 것이 무엇입니까?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출 12:31)”
430년 동안 노예로 산 사람들이 자유민이 된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해방된 것입니다. 

둘째가 신앙의 자유를 보상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배를 허용한 것입니다. 

셋째 경제적 풍요를 보상받은 것입니다. 
32절을 읽어 보십시오. 양과 소를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35,36절을 읽어 보십시오. 애굽 사람들이 은 금패물을 순수하게 내어 놓는 것입니다. 

넷째, 인격적 자존감을 보상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권위를 보상받은 것입니다. 노예라고 무시하던 바로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권력이 있다고 사람취급하지 않던 바로가 모세와 아론의 권위를 인정한 것입니다. 바로가 하나님의 축복권을 인정한 것입니다. 

모세로 하여금 바로에게 신(神)이 되게 하겠다던 여호와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출7:1).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때 무시한다고 낙심할 것 없습니다. 억울하다고 신앙인의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 하나님이 보상해 주십니다. 세워주고 인정받게 하고 진실을 드러나게 합니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3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은혜를 입히게 하시니까 구하는 대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린양을 통하여 살아남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리기만 하고 방치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탄의 노예로부터 자유를 주십니다. 마음대로 예배드릴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주십니다. 만족하며 살만한 경제적 풍요를 주십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축복권을 주십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수고한 대가대로 받지 못한다고 억울하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 보상받는 그 날이 있습니다. 남모르게 헌신하고 수고하면서 억울함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억울함을 다 보상받을 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음을 확실하게 간증할 날이 오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수치를 완전한 승리로 바꾸어 주는 날이 옵니다. 그 날을 바라보고 열심히 뿌리고 심어야 합니다. 눈물로 뿌리는 자는 언젠가 반드시 기쁨으로 거둘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오늘 날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3.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하나님께서 지난 고난을 수치가 아닌 기념의 날로 만들어 주신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37-42). 

이스라엘 민족은 430년 동안이 헛된 세월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날마다 노예 생활하는 그들에게 애굽의 삶이 얼마나 무료하고 절망적이었겠습니까? 매일 눈을 뜨면 강제로 노동을 하고 신앙의 자유도, 신체의 자유, 경제적 자유도 없는 땅에서 미래라는 것이 보이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날을 기다리다 죽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날을 영영 오지 않을 것이라고 자포자기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품은 자는 반드시 승리하는 날이 오고야 맙니다. 언젠가는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날이 오고야 맙니다. 역사의 이정표가 되어 지난 고난을 기념하는 날이 오고야 맙니다. 

독일의 나치 정권은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였습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150만 명이 독가스로 처참하게 학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독일 히틀러 정부는 유랑 민족이 된 유태인들을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집단 거주지 Getto를 준다고 속여 폴란드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우슈비츠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살아남아 역사의 위인이 된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금세기 최고의 정신과 의사가 된 빅토 프랭클(Victor Frankle)입니다. 그가 그 혹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아무리 어둡고 캄캄한 현실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어느 날 노동 시간에 흙 속에 파묻힌 유리병 조각을 몰래 바지주머니에 숨겨 가지고 돌아왔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그 유리조각으로 매일 아침저녁 두 번씩 깨끗이 면도를 하였답니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독백으로 반복했답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아침이 되면 나치들이 문을 밀치고 들어와 일렬로 선 유대인들 중에서 그 날 처형자들을 골라내 가스실로 끌고 가는데, 언제나 깔끔하게 면도하여 삶에 의지가 뚜렷이 나타난 이 사람만큼은 차마 가스실로 보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수용소에 끌려 들어간 사람의 평균 수명은 6개월이었다고 합니다. 

프랭클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기대하며 견뎌내므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심리학자가 되어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수치가 아니라 기념이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나 처지가 아무리 암담하고 절벽 같은 사면초가라 할지라도 아직도 희망이 있습니다. 구름만 보지 말고 구름 위에 있는 찬란한 태양을 보아야 합니다. 벽만 보지 말고 벽 너머에 솟아오르는 푸른 싹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체념하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빅터 프랭클의 좌우명대로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고난을 수치가 아닌 기념의 날로 만드는 그 날이 올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보면서 비관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싸우는 국회, 빈부격차의 심화, 실직자의 증가, 40대 남성 사망률 세계 1위 ,성형수술(17%) 세계 1위, 여성흡연자 1일 흡연량 24.8개비로 세계 1위, 낙태율 세계 1위(매년 100만건 이상), 자살률 세계 1위 등을 보면서 대한민국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습니다. 전 세계 2백여 국가 중 국토 면적으로는 1백 9위 밖에 되지 않는 나라가 GDP와 교역 규모로는 13위, 외환 보유액으로는 4위인 나라입니다. 전 세계 68억 인구, 2백여 국가 중에서 우리 대한민국이 반도체, 핸드폰, IT기술, 조선 등 21세기를 이끌 산업에 있어서 최선두에 서 있습니다. 초고속인터넷 가입자 수 1위, 핸드폰 보급률 1위입니다. 좁은 땅 덩어리지만 우리는 물 걱정, 식량 걱정 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교육열 세계 최고입니다. 미국 내 유학생 수 10만3000명으로 한국이 1위입니다. 

지난해 현재 네팔·가나·탄자니아에 이르기까지 세계 95개국에 뻗어 있는 한국 유학생은 무려 21만 명(대학생 이상)에 달합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한국인 공동체 가입인원은 750여 명에 달해 실리콘밸리 IT분야에 일하는 엔지니어 3~4명 중 한 명은 한국인이라고 합니다. 1948년 3900여 개였던 초·중·고교 수는 2007년 1만 947개로, 34개였던 일반대학은 200개로 급증했습니다. 사흘에 하나 꼴로 학교를 짓고, 석 달에 하나씩 대학을 만들었습니다. 대학 진학률이 80%가 넘었습니다.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입니다. 해외 동포가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인구비례 일위 숫적 3위입니다. 175개 국에 퍼져 있습니다. 시끄러운 같으지만 우리민족을 하나님이 준비시켜 가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고난의 날을 기념의 날로 만들어 줄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어떤 고난의 환경에서도 낙심하며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30년입니다. 절망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도 하나님은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고난의 날을 기념의 날로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작은 씨족은 언약의 백성 민족으로 만들었습니다(37-38). 

애굽 바로는 민족을 말살하려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고난 중에서도 민족을 번성하게 하였습니다. 생명을 보존하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살아남는 자가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도, 기업도, 교회도 결국 살아 남는 자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살아남게 하였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무기력하게 노예로 성을 쌓던 라암셋에서 발행할 때 이스라엘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되었다는 것입니까? 장정이 육십만 가량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씨족이 민족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70명의 숫자로 이주한 야곱 후손이 430년여 간에 이렇게 엄청난 국가적 규모의 숫자로 불어난 것입니다. 이 숫자를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1/4로 보고 여자들과 아이들의 수까지 더한다면 백성의 총수는 약 200만 명이 넘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번식이 가능하겠습니까? 

경제학자 맬더스(Malthus)는 인공적인 인구피임 정책이 없을 경우 매 25년마다 인구가 배가(倍加)한다는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가능합니다. 

더욱이 38절을 보십시오. 중다한 잡족들이 같이 나왔습니다. 단지 혈연 공동체, 민족 공동체가 아니라 약속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섞여 살던 여러 이방 족속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백성으로 참여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혼이나 직업 등의 이유로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베푸셨던 여러 이적과 기사들을 보고 이스라엘의 출애굽에 가담했던 자들입니다. 48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할례 예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둘째, 노예를 하나님의 군대로 만든 것입니다(39-41). 

그들이 가지고 나온 음식은 무교병입니다. 여호와의 군대로서의 음식입니다. 양식도 준비하지 못할 정도로 급하게 나온 날입니다. 430년에 비하면 잠깐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날 바로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로 선포하며 나온 날입니다. 이제는 완전히 달라진 신분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우리 주님을 대장으로 모신 삶이 전개 된 것입니다. 

셋째, 후손들에게 간증을 남겨 준 사건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42).
대대로 지키는 날이 된 것입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것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서 자손 대대로 지킬 절기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 고난이 끝이 나고 승리의 삶이 펼쳐지는 기념일로 삼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고난에 처해 있습니까? 그 고난이 기념이 될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자랑하고 후손들에게 간증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우리를 하나님의 군대로 만들어 주시고 그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어 결국 창대케 해 주실 것입니다. 

반드시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은 오고야 맙니다. 아무리 긴 장마일지라도 비는 때가 되면 멈춥니다. 터널은 반드시 출구가 있습니다. 구름 위를 오르면 파란 창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여호와의 밤, 여호와의 날이 오고야 맙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를 갚아주신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29-30). 그 날에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신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31-36). 그 밤에 하나님께서 지난 고난을 기념의 날로 만들어 주신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37-42). (김필곤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