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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손에 붙들려 (렘 15: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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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손에 붙들려 (렘 15:15~18)


[주님, 주님께서는 저를 아시니, 저를 잊지 말고 돌보아 주십시오. 저를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주님께서 진노를 오래 참으시다가 그만, 저를 잡혀 죽게 하시는 일은 없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주님 때문에 이렇게 수모를 당하는 줄을, 주님께서 알아주십시오. 만군의 주 하나님,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말씀을 주셨을 때에, 저는 그 말씀을 받아먹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저에게 기쁨이 되었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웃으며 떠들어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채우신 분노를 가득 안은 채로, 주님의 손에 붙들려 외롭게 앉아 있습니다. 어찌하여 저의 고통은 그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저의 상처는 낫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흐르다가도 마르고 마르다가도 흐르는 여름철의 시냇물처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

• 등을 돌린 백성

나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합니다. 그러니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가 되기는 애당초 글렀습니다. 주변머리도 없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굶은 적은 있지만, 외상으로 뭔가를 산 적은 없습니다. 구차하게 굴기보다는 차라리 굶는 게 낫다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늘 칭얼거리며 사는 사람을 만나면 딱 질색이었습니다. 

왜 저리 엄살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기 때문입니다. 내색을 안 하려 해도 얼굴빛은 숨기기 어렵습니다. 나는 가끔 차갑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고통을 객관화시켜 바라보아야 했던 삶의 경험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분명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도 담담하게 그 상황을 견뎌내는 이들을 보면 절로 마음이 짠해집니다. 

물론 지금은 사람마다 견딜 수 있는 생의 무게가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아무도 함부로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선 자리를 조금도 벗어나려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폭력적인 태도임을 압니다. 영혼의 성숙이란 다른 이들의 자리에 자신을 세우는 능력임도 압니다.

누군가를 칭찬하는 일은 즐겁습니다. 하지만 꾸짖는 일은 힘겹습니다. 내가 그를 꾸짖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는 차치하고라도, 상대방과의 정신적인 대립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꾸짖음은 관심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미로와 같은 인생길에서 나를 꾸짖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복입니다. 

허세부리는 사람, 자기의 편견을 진리인양 포장하는 사람, 경탄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꾸짖음으로 우리를 그를 참 사람의 길로 안내합니다. 물론 그 방법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예언자들은 자기들의 감정을 거슬러 누군가를 꾸짖도록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물론 그들은 넘어지고 비틀거리고 낙심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역할도 감당해야 하지만, 그들의 주된 임무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뜻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주전 7세기와 6세기 사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던 예레미야는 유다가 하나님의 보호라는 특혜를 상실했다고 선언했습니다. 특혜의 상실은 곧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예언자는 ‘보는 사람’입니다. 모두에게 가려진 일들이 그들의 눈에는 보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현실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보는 유다의 현실은 이렇습니다. 

“조롱에 새를 가득히 잡아넣듯이,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를 부리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렘5:27-28)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내다보며 예언자는 마음이 아픕니다. 뉘우치고 회개할 것을 권고했지만 백성들은 벽창호일 뿐입니다. 

• 홀로 깨어 있는 자

재난을 선포하는 이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사람들은 그게 빈 말이라 해도 칭찬하고 추켜세우는 사람을 편안하게 느낍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칭찬이 사람을 망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칭찬으로 사람됨을 달아본다”(잠27:21)고 말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을 등진 백성들에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쓴 소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은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말의 특색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의 말은 맹렬한 공격이요 거짓 평안의 환상에 구멍을 뚫는 것이며, 책임 회피에 대한 도전이요 믿음을 회복하라는 촉구요 과연 분별력이 있으며 치우치지 않는가를 따지는 물음표다.”(<<예언자들>>, 삼인, 2004, 24-25쪽)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은 찌르고, 아프게 하고, 끌어올려주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자들의 운명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들의 말은 경청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외면당하고, 수모를 당하고, 위협 당하고, 죽음으로 내몰렸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삶을 바친 이들이라 해도 어려움이 계속되면 하나님의 말씀은 무거운 짐이 됩니다. 달고 오묘하던 말씀, 기쁨과 즐거움이 되었던 말씀이 쓴 쑥과 같이 느껴집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도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는 꿀 같이 달겠지만 배에는 쓰다”(10:9)고 말합니다. 

이때 예언자를 엄습하는 감정은 고독입니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처럼 암담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위로가 있다 하나 사람은 역시 사람인지라 동료들의 지지와 연대가 없이는 살기 어렵습니다.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절감할 때 엘리야의 탄식이 나오는 법입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왕상19:4) 그러나 고독이야말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이 느꼈을 고독을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은 모리아 산까지 사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의 이야기는 전혀 들려주지 않습니다. 언어도단의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죽음과도 같은 고독 속에서 홀로 결단해야 했습니다. 광야 생활에 지쳐 애굽을 그리워하는 백성들과 마주 선 모세의 고독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항변합니다. 

“이 모든 백성을 제가 배기라도 했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했습니까? 어찌하여 저더러, 주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마치 유모가 젖먹이를 품듯이, 그들을 품에 품고 가라고 하십니까?”(민11:12) 

겟세마네 동산,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고독을 생각해보십시오. 사위는 조용하고, 가까운 제자들조차 무심히 잠들어 있습니다. 그 고독의 순간은 하나님조차 멀리 계신 것처럼 여겨집니다. 홀로 선택하고 홀로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자신의 약함입니다. 신앙이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 하나님을 뜻을 수행하기 위해 자기를 바치는 것입니다. 나를 죽여 하나님의 뜻을 살리는 것이 믿음이란 말입니다.

• 숨어 계신 하나님

히브리 성경의 지상 명령은 “너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흙에서부터 온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은 사람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육체의 버릇대로 살기를 그치고 우리를 지으신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은 늘 어려움을 동반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위로조차도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질문은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어찌하여 저의 고통은 그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저의 상처는 낫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흐르다가도 마르고 마르다가도 흐르는 여름철의 시냇물처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18)

참 딱한 노릇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이 만사형통이면 좋겠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도 여전히 가난하고, 여전히 병약하고, 여전히 곤경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린 사람들, 보증금조차 떼일 형편에 처한 세입자들을 보면 가끔은 강한 힘에 대한 욕구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돌을 밥으로 바꾸고 싶고, 세상의 권세를 얻기 위해 악과 타협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참된 신앙이란 보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보상이 있든 없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울면서라도 그 뜻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제거해주는 분이 아닙니다. 고통은 견디기 어려운 것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겪는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발견하게 하고, 정신적으로 성장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도무지 고마워할 수 없는 일들,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부정적인 생각을 불러일으켰던 일들이 우리의 스승이 될 때가 많다는 말입니다. 그런 고통은 나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최악에 처한 사람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결코 좌절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좌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모든 삶의 계기를 온전함을 향한 디딤돌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 약속하신 말씀 위에 서라

물론 어려울 때 우리는 비명을 지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고통을 견딜 수 없을 때 하나님께 “저를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15) 하고 하소연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믿을 수 없는 분이 되었다고도 말합니다. 불경스럽지만 속은 후련합니다.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다정한 말로 응대하지 않습니다. 위로하지도 않습니다. 그를 본래의 소명의 자리로 부르실 따름입니다.

“나 주가 말한다. 네가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맞아들여 나를 섬기게 하겠다. 또 네가 천박한 것을 말하지 않고, 귀한 말을 선포하면, 너는 다시 나의 대변자가 될 것이다. 너에게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은 그들이다.”(19)

원수를 갚아달라느니 하는 시시한 소리를 집어치우고,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너에게로 돌아와야 할 사람들은 그들”이라는 말은 매우 강렬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은총을 경험한 성도들에게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롬12:2)고 말합니다. 

헛된 욕망을 부추기는 세상, 우리가 영적인 존재임을 망각하도록 하는 피상적이고 타락한 문화, 돈벌이를 위해 자기 양심을 파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세상…이런 세상은 극복되어야 할 세상이지 추종해야 할 세상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을 생각할 때마다 비행사들이 겪는다는 비행착각(vertigo)이 떠오릅니다. 비행사들이 고속으로 비행하다 보면 가속도로 인해 인체평형기관의 감각에 이상이 생기는 때가 있는데, 그 감각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매우 위험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컨대 바다 위를 비행할 때 자신과 비행기의 자세를 착각해서 바다를 하늘로 알고 거꾸로 날아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 결과는 끔찍합니다. 나는 이상하게도 이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향해 날아가야 할 교회가 지금 세속의 가치관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를 다시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며칠 전 런던에서 영국인 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는 후배 목사가 가족들과 함께 다녀갔습니다. 목회에 대한 이야기,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아이들이 무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러 가는 데, 17살짜리 형과 12살짜리 동생이 어른들이 나눈 이야기를 되새기면서 이런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교회는 세상보다 조금은 진보적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 “교회가 세상의 빛이라면 그래야겠지.” 놀랍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건 상식입니다. 교회는 욕망에 바탕을 둔 문화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고발하고, 사람들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 되었을 대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 없이 살아라.”(창17:1) 순종하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살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흠 없이’라고 번역된 ‘타밈(tamim)’입니다. 이 단어는 ‘완전한’ 혹은 ‘죄 없는’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참 무거운 요청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온전한’ 혹은 ‘마음을 다하는’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원하시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성실성(integrity)입니다. 살다보면 넘어지기도 하고,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나 꾸준히 하나님께로 향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려 하기보다는 내면의 진실에 귀를 기울이며 사는 것, 바로 이것이 온전함의 길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새로운 소명을 주신 주님은 그를 튼튼한 놋쇠 성벽으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뜻을 자신의 길로 삼은 사람은 이미 아무도 흔들거나 정복할 수 없는 놋쇠 성벽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들입니다. 이런저런 위안이나 보상에만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이루려는 주님의 꿈에 우리를 동참시켜 주신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그 길을 걸으십시오. 하지만 상처를 입어 절뚝거리더라도 앞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이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마십시오. 이 여름, 한 줄기 소나기가 더위를 식혀주듯 우리의 존재가 곧 이웃들에게 희망의 소식이 되게 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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