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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마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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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마 6:11)
 
 
주기도는 하나님께 일차적 관심을 두며 인간의 필요를 다음 순서에 둡니다. 이차적 관심이라 해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늘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요구되는 모든 필요들 중에서 첫 번째 요소인 ‘양식’과 관련하여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양식”의 기본적인 의미는 음식물입니다. 의미를 확대하면 의식주와 관련된 물질적인 요소들과 정신적인 요소와 정서적인 요소들까지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아무런 필요도 느끼지 않는 존재는 아니지요. 그도 먹어야 하고 입어야하고 잠을 자야합니다. 영적인 필요와 함께 육적(지ㆍ정ㆍ의)인 필요들도 채워져야 합니다. 험한 세상을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누구에게나 필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또한 학생은 학생으로서 직장인은 직장인으로서 주부는 주부로서 각자의 삶의 위치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기 위해 특별히 요구되는 필요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은 가만히 있어도 이 모든 것들이 자동으로 채워진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필요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문자만 보면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a)는 가르침이 충돌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도 인생이 무엇을 추구하며 살 것인가에 관한 말씀이지, 인간의 필요를 외면하시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필요한 것들에 대해 기도하는 일을 유치하거나 수준 낮은 기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생활의 실질적인 필요들을 위해 기도할 때 현실과 상관없는 관념적인 신앙을 벗어나 실제적이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적과 신비한 체험 속에서 그분의 뜻을 알기를 원합니다. 열정적인 기도와 찬양과 헌신적인 종교 활동 속에서 그분을 경험하기 바라지요. 동기와 목적은 순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의 과열은 일상의 삶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특별한 시공간에서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면 탁월함이 아닌 미성숙의 증거지요. 성도의 성숙성은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 기적을 요구하는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모습일 것이 분명합니다. “양식”을 위한 기도는 삶의 구체적인 필요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원하는 필요들을 무제한 구하라 하시지 않고 “일용할” 양식으로 제한하셨음을 생각해봅시다. 인간의 탐심은 끝이 없어서 평생의 양식으로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손만대의 양식을 쌓아놓고자 합니다. 반면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합니다. 

탐심을 최악의 범죄인 “우상 숭배”(골 3:5)로 여기며, 경건한 삶을 위한 “지족하는 마음”을 강조합니다(딤전 6:6).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가르침은 기도가 탐욕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 되지 않도록 막는 적절한 제어장치인 셈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필수품을 위한 기도이지 사치품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잠언에서 아굴은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 때문이었습니다(잠 30:7-9). 인간은 넘칠 정도로 배부르면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고, 너무 결핍되어 있어도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지 못합니다. 좀 더 먹고 싶을 때 절제하는 것이 육체의 건강에 유익한 것처럼, 탐욕을 스스로 절제하기 어려운 인간에게는 조금 빠듯한 상황이 오히려 유익한 경우가 많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는 것은 날마다 기도해야 할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매일 그 날 혹은 다음 날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귀찮기도 하거니와 감질 나는 일입니다. 늘 아쉬운 상황이 유지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월(月)용할’ 양식 대신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게 하신 까닭이 여기 있다고 생각됩니다. 근심걱정 전혀 없는 상황보다는 아쉬운 일이 한두 가지 유지 되는 상황이 하나님 백성다운 삶에 살아가기에 훨씬 유익하다는 것이죠. 그런 상황은 매일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며, 매일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며, 매일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기적과 환상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넘치게 주실 때 기뻐하는 일도 어렵지 않습니다. 어느 날 평생 먹을 양식을 한꺼번에 얻었다면 누구라도 입에서 찬양이 절로 튀어나오겠지요. 하지만 평범한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아쉬움 속에서도 기뻐하고 찬양하는 일 역시 쉽지 않습니다. 신앙이 성숙해 간다는 것은 아쉬움이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성공과 성취는 감사할 일입니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아직 성공하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했어도 감사하고 기뻐하며 찬양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주옵시고”라는 말씀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성경은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 했습니다(약 1:17).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라고 합니다. 

마음에서라도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고 한다면 두려운 일이라고 가르칩니다(신 8:17). 현대문화는 필요를 스스로 해결하는 강하고 유능한 자기 이미지를 강화하도록 부추깁니다. 하지만 성도는 언제나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겸손히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잃어버리기 전에는 소중한 줄 잘 모르는 경향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보고 듣고 숨 쉬고 말할 수 있다는 것, 만지고 걷으며 자유롭게 대소변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기능을 거두시면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귀한 선물이었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런 때조차도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한 감사보다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불평이 앞서는 것이 인간이지요. 

심지어 불평하고 있는 그 입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아버지임을 고백하는 성도라면 기도를 드릴 때마다 모든 주어진 것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필요들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매일의 필요를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가르침에는 구할 때 그분께서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함의 되어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일 아니면 나와 내 가족의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백성답게 살기를 미루거나 타협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부터 해결해놓고 그 후에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순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도는 환경에 따라 마음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경제적 여건이 나빠지면서 사오정(45세 정년),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장미족(장기간 미취업 족속) 등의 유행어가 나돌았습니다. 20대 취직은 가문의 영광이요, 4-50대에 퇴직 안하면 국가적 경사라는 유머도 있습니다. 취직하기도 어렵고 취직한 직장에 붙어있기도 어렵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신 분이십니다. 200만 명이 광야에 있는 것보다 더 살아가기 막막한 현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면 먹이십니다. 역사는 비록 광야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들을 반드시 먹이신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가르쳐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내가 처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먹이실 수 있을까를 염려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믿지 못하는 불신에 빠져 있거나, 필요 이상을 탐하는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겠지요. 그는 다른 무엇보다 회개하고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네 삶에서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가장 우선에 두어야 할 관심사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먹고 사는 문제는 염려 없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염려하는 것은 언제나 먼저 당신님의 뜻대로 성실히 행하지 않고 있을 때에 발생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밀고 나가야 합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자기 욕망을 성취하려고 무모한 모험을 하지 않는 일입니다. 자기를 광내는 일을 하면서도 자기 성찰이 부족해서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다 주실 것이라는 헛된 망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흔히 그런 잘못은 말씀에 비추어 정밀하게 확인하기보다는 한 순간 느낌이나 혹은 자기 판단을 과신해서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자기 뜻을 이루려는 일에까지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기 힘으로 채우고 나머지 부족한 부분만 하나님께서 보충해주시기를 바라는 자세도 바르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신뢰한 가운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옳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라는 말씀을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을, 어떤 사람에게는 체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독특한 재능을 자신의 필요 이상으로 주십니다.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을 내 삶의 필요 이상으로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한 것들을 은사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뜻대로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그 목적은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입니다(엡 4:12). 그러므로 내게 일용할 필요 이상의 어떤 것들 있다면 다른 성도를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날마다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성실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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