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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발짝 물러서 보세요 (왕상 19: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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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짝 물러서 보세요 (왕상 19:9~18)


공군 군목으로 있을 때 레이더 사이트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주로 서울 상공을 지키면서 삼팔선 이북에서 뜨는 비행기들을 감시하는 레이더 기지인데 압록강 상공까지 감시를 합니다. 레이더 기지는 서로 중복으로 상공을 감시하기 때문에 한 레이더 기지가 멈췄다고 해서 적의 항공기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레이더가 멈추면 적의 입체적 공격이 있을 때 구멍이 뚫리니 큰일입니다. 

새벽 1시가 넘었는데 비상벨이 울렸습니다. 레이더가 멈췄는데 아무리 고장 탐구를 해도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으니 군목님이 오셔서 기도해 달라는 전화입니다. 부대장님이 직접 전화를 했습니다. 군종병을 깨워서 콜라와 빵과 비스킷 등 과자를 싣고 레이더 기지로 올라갔습니다. 부대장이하 장병들이 모두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자칫 다음날 청와대가 알고 부대장을 호출하면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의 횡포가 극에 다다랐을 때입니다. 병사들을 불러 놓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어디가 고장인지 속히 발견하여 다시 레이더가 잘 돌아 조국의 하늘을 공산당들로부터 지켜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가지고 간 콜라와 간식들을 나누어 주며 잠시 휴식을 한 뒤에 작업에 들어가자고 제안했더니 부대장님이 허락을 했습니다. 급히 레이더를 고쳐야 하지만 어차피 고장탐구가 안 되고 있으니 쉬어서 가기로 한 것입니다. 

약 10분 정도 쉬고 난 뒤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5분쯤 지나서 정비병 하나가 소리쳤습니다. “중대장님, 찾았습니다. 여기 퓨즈가 나갔습니다.” 간단한 정비로 정상적으로 레이더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작업이 끝나자 “우리 군목님의 기도가 신통력이 있다”며 야단이 났습니다. 부대장님도 제 손을 꼭 잡고는 자칫 내일 청와대로 불려가 혼쭐날 뻔하였는데 군목님이 살려주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인도하신 줄 믿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조급히 서두를 때는 보이지 않던 곳이 잠시 쉼을 가진 뒤 뒤로 물러서서 차근차근 점검하여 들어가니 고장난 곳이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장 탐구 할 수 있는 길을 이미 주셨는데도 사람들이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다 보면 가야 할 방향을 잘 못 잡는 겁니다. 한발작만 뒤로 물러서서 보면 길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집착과 아집, 빨리 가야 한다는 조급함이 앞을 가로막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너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아합왕은 장가를 잘못 들었습니다. 이방 여인 이세벨과 결혼한 후 왕궁 안에 이방신전을 세우고 바알신을 섬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이스라엘이 이세벨 때문에 아세라목상과 바알신을 섬기는 무리들이 아합의 밥상에 앉아 판을 쳤습니다. 악녀 이세벨 때문에 아합왕은 온갖 악행도 저질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 神인지, 바알 신이 참 神인지 갈멜산에서 대결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이세벨은 엘리야가 왕과 자기에게 거침돌이 되어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일 수 있는 기회라 보고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과 바알의 선지자 450명 등, 850명을 갈멜산으로 모아 놓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엘리야와 850:1의 대결을 시켰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한 말이 신바람을 불러일으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나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라…….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다』

대결의 결과는 엘리야의 완승이었습니다. 아세라나 바알은 살아있는 神이 아니니 제단의 제물을 받을 리가 없습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니 엘리야가 드린 제물을 불로 받으셨습니다. 기세가 오른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백성들은 엎디어 외칩니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라.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라』
(The Lord-he is God! The Lord-he is God!)

엘리야는 바알신의 선지자들을 기손 시냇가로 내려다가 모두 죽였습니다. 그때 엘리야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습니다. 온 천하를 손에 쥔 듯 했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 아합왕과 이세벨을 죽이고 혁명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무도 엘리야를 당할 자 없을 듯 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급반전되고 말았습니다. 이세벨이 소식을 듣고 엘리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협박하였습니다.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왕상 19:2)

이세벨 황후의 이 협박은 모든 상황을 급반전시켰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겁에 질렸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왕상 19:3)

형편을 보니 엘리야를 위해 끝까지 싸울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왕후의 반격을 무서워해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엘리야 혼자만 남았습니다. 하늘을 찌를듯한 그의 기세가 푹 꺾이고 말았습니다. 살기 위하여 그는 도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하루 종일 도망쳤습니다. 겨우 몸뚱이 하나 숨길만한 로뎀나무를 발견하고 그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서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왕상 19:4)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왕상 19:5-8) 

엘리야는 그 호렙산 동굴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남겨주신 7000명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마침내 이스라엘의 아합왕을 뒤엎고 새 왕조를 세우는 사역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냅니다.

이 과정을 읽노라면 갈멜산에서 그 여세를 몰아 아합 왕조를 무너뜨리지 않고 엘리야를 도망하게 하는 하나님이 이해가 안 됩니다. 로뎀나무 아래에서의 그 공포와 두려움을 겪게 하고 호렙산 동굴 속에서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왔던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가까운 길, 빠른 길을 놔두고 하나님은 멀리 돌아가게 하시었습니다. 얼른 이해가 됩니까? 

그러나 곰곰이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만일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막바로 아합 왕조를 뒤엎었다면 엘리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엄청난 피를 흘려야 했을 것입니다. 아합 왕조에 아첨한 사람들 중 살아남을 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엘리야는 매우 교만해지든지, 권력욕 때문에 타락했을 런지 모릅니다. 

성경에 수많은 선지자들이 있지만 유독 엘리야만이 거의 완벽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변화산에서도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만나서 대화를 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수많은 왕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음에도 큰 흐름을 보면 아브라함 ⟶모세⟶엘리야⟶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맥으로 요약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같은 역사는 갈멜산 대결 이후에 엘리야에게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고 일단 뒤로 물러서서 숨고르기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스러운 계획이요, 섭리입니다. 

사람은 역시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집착하다보면 성스러운 일들이 헝클어지고 맙니다. 특히 일이 꼬이고 잘 풀리지 않을 때는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한발짝 뒤로 물러서서 더 넓게, 더 높게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운동선수들은 이것을 숨고르기라고 합니다. 인생의 복잡한 삶의 현장에서 종종 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한발 뒤로 물러서서 바라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꼬여만 가는데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아집과 집착 그리고 성급함에서 오는 속도감에 쫓기기 때문입니다. 빨리 성공해야 한다는 초조함이 일을 그르치거나 헝클어 버리곤 합니다. 인생은 결코 속도에 의해 성패가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방향에 의해 성패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꾸만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마르코스와 이맬다가 필리핀 대통령으로 군부독재정치를 할 때 베니그노 아퀴노는 필리핀 민주화 세력의 지도자로 미국에 망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니노이라는 애칭으로 불려지던 지도자로 마르코스에게 큰 위협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마르코스가 군부의 세력을 얻고 기세가 등등할 때 갑자기 니노이 아퀴노가 귀국선언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만류했습니다. 미국의 지도자들과 필리핀의 야당지도자들이 귀국을 반대했습니다. 마르코스가 죽이고 말 것이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마르코스 내외가 죽이지 않겠다며 귀국해서 국민의 심판을 받아보자고 제안하자 민심이 자기에게 있음을 안 니노이는 마르코스를 무너뜨리고 자신이 정권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조급함이 앞섰습니다. 니노이는 마닐라 비행장에 내려서 얼마 살지 못하고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백성들이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의 부인 코라존 아퀴노 여사가 대통령이 되긴 했지만 니노이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필리핀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니노이는 한발작만 뒤로 물러서서 더 멀리 보았더라면 죽음의 길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고집이 있습니다. 그 고집이 집착하게 합니다. 아침 드라마 “장화홍련”에 보면 장화는 온갖 나쁜 일을 다 합니다. 병든 시어머니를 내다버리고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고 홍련을 평생 괴롭히며 악행을 저지릅니다. 결국 재판정에서 모든 악행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홍련은 장화를 용서하고 죄를 시인하면 약간의 벌금만 물리게 하고 일을 덮으려 합니다. 그러나 악녀 장화는 결코 홍련에게는 질 수 없다는 악한 고집이 자기인생 전체를 망가뜨리고 말 것입니다. 고집과 집착, 성급함이 인생을 망가뜨리는 지름길이 될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지나친 아집과 집착이 작은 것 밖에는 보지 못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성급함이 많은 것을 잃게 합니다. 그러나 한 발짝만 뒤로 물러서면 더 크고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의학상으로도 가끔씩 뒤로 걷는 운동을 하면 신체의 보존에 매우 좋다고 합니다. 휘트니스센터에 가면 수영장의 코치들이 물속에서 뒤로 걷는 훈련을 시킵니다. 

그런데도 내려놓거나 뒤로 한발짝 물러서지 못하는 것은 뒤로 가면 손해만 볼 것 같은 마음 때문입니다. 앞으로 쉼 없이 달려가도 남들보다 뒤처지는데 뒤로 물러서다니. 보통은 쉽게 실행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울수록 한번쯤 뒤로 물러서서 더 넓게, 더 높게 바라보면 새 길이 열립니다. 하늘을 보며 숨고르기를 하노라면 하늘의 지혜가 열립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친구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은행 빚보증을 서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그 빚을 몽땅 끌어안게 되었습니다. 20년 직장생활에 겨우 32평 아파트 하나를 융자를 끼고 마련했는데 한순간에 날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내도 모르게 보증을 선 것인데 이 집마저 날아가면 처자식을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철물점에서 밧줄을 사다가 회사 창고에서 목을 매고 자살을 했습니다. 3억 원의 빚 때문에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는 3억 원의 빚보증에 집착하다가 결국 목숨을 끊었습니다. 옆에서 보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자살이 모든 것 해결하는 것 아닙니다. 그 상처를 안고 아내와 자식들은 엄청난 시련과 환란의 삶을 살 것입니다. 무책임한 가장입니다. 

한발 물러서서 가족들과 의논하고, 친지들과 의논하다 보면 충분히 뚫고 갈 길이 있을 터인데 목숨을 끊다니! 더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그런 때에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할 때입니다. 

지금 혹시 그런 막막한 문제에 직면한 분이 있습니까?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당신 앞에 놓여 있습니까? 잠간 뒤로 물러서서 번민하는 짐을 내려놓고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다시 한 번 큰 호흡을 하고 하나님께 눈을 들어 아뢰십시오.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이 세상에 풀지 못할 인생문제는 없습니다. 당신이 풀려고 하니 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이 못하면 하나님께 내어 맡기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을 바라보며 언제 도움을 구하나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신의 한계점이 하나님이 시작하는 출발점입니다.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중국 내지 선교사였습니다. 선교사역을 하는 동안 구원의 열매는 별로 없고 환난과 시련만 거듭 닥쳐왔습니다. 자식도 죽었고, 동료들도 죽었습니다. 자신감은 떨어지고 실망과 절망감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신경쇠약과 함께 우울증세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먼데 있는 선교사 동료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네 안에서 일하게 하라. 스스로 애쓰고 버둥대지 말고(Don't strive and struggle) 주님 안에 거하라.” 테일러는 이 편지를 읽는 순간 빛을 보는 듯 했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기쁨이 용솟음 쳤습니다. “나는 그때 힘과 평안을 얻기 위한 헛된 노력을 그치고 그리스도의 능력과 평안 속에 쉬기로 하였다(to rest in peace and power). 나는 더 이상 애쓰지 않겠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며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음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부요하신데 내가 가난할 수 있겠느냐며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원줄기에 붙어 있으면 생명력은 물론 많은 열매까지 맺을 수 있음을 깨닫고 주님 안에 쉬는 법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테일러는 “생각할 수도 없고, 기도도 할 수 없을 때에 주님께 의지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마리아가 아기를 낳다가 죽게 되었을 때도 테일러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을 주님께 맡기고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당장 눈앞에 닥친 일에 너무 집착하는 것입니다. 집착해 보았자 꼬이기만 할 뿐 풀리지도 않고 앞으로 더 이상 나갈 수도 없는데도 붙들고 늘어지다가 모든 것을 허비하고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한발만 뒤로 물러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노라면 새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지만 자기와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창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토를 달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미 갈대아우르와 하란 땅에서 삶의 기반을 든든히 닦아 놓은 아브라함과 그 혈족들입니다.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축복하시려면 생판 모르는 곳으로 보낼 것이 아니라 기왕에 터를 닦은 그곳에서 복을 주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나님도 더 쉬웠을 것이 아닙니까? 제 머리를 굴려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곰곰이 상황을 분석해 보면 아브라함의 혈족을 거기에 두고서는 언약된 민족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집착하고 있던 일들을 떨쳐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롯의 아내가 평생을 모은 재물이 불타는 소돔과 고모라를 끝내 외면하지 못하고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예 그때까지 터를 닦고 이뤄놓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새 땅으로 그들을 가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하던 일들, 내가 가장 집착하고 있는 일들을 잠간 다 내려놓고 한 발짝만 뒤로 물러서서 하늘을 보면 새로운 길, 복된 길,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욥기 22:24-26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네 보화를 티끌로 여기고 오빌의 금을 계곡의 돌로 여기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화가 되시며 네게 고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욥 22:24-26) 

가끔 내게 보배와 같은 것이라 해도 일단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양손에 들고 있는 보배(자신이 생각하는) 때문에 더 큰 보배가 있어도 붙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네가 생각하기에는 지금 들고 있는 것이 가장 귀한 것이라고 믿을지 모르나 진토에 버리면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네 보배가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휴가철입니다. 가족과 함께 바닷가로 산속으로 옮겨가서 한 해의 피로를 풀고 쉼을 얻는 기간입니다. 어찌보면 지금까지 하던 일을 내려놓고 쉼을 얻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아무쪼록 육신의 일만 쉬는 것이 아니라 한번쯤 살아온 길에서 한발짝 물러서서 당신에게 주어진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앞이 보이지 않던 사업의 지경이 넓혀지고 꼬였던 인생문제가 풀려지는 쉼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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