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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 걸으라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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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걸으라 (행 3:1~10)


(행3:1-10)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당신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당신의 생각이 어떠하든지, 주의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심방을 가셨습니다.
집사님이 몇 주째 교회 안 나오니까 궁금해 심방을 갔어요. 저녁 늦게 밤늦게 심방을 갔어요, “틀림없이 있겠지. 밤 늦게 가면”
그래서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는데 대답이 없어요.
분명히 아까까지 뭐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는데 초인종을 누르는 순간 아무도 응답이 없는 거예요. 틀림없이 있는데 대답을 안 해요. 목사님이 할 수 없이 쪽지를 하나 놓고 갔어요.
“아무개 집사님 목사가 다녀갑니다.”
그리고 그 아래 계시록 3장 20절 딱 썼어요. 계시록 3장 20절 모르죠? 뭔지 볼지어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리고 가셨어요. 그걸 보니까 나중에 그 집사님이 미안 했는지 그 다음 주에 나왔어요.
그런데 목사님은 안 보고 인사 안 하고 그냥 갔어요.
그리고 목사님 사무실에다 쪽지를 하나 남겨놓았어요.
“목사님 제가 다녀갑니다. 교회 다녀갑니다. 지난 밤은 참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처럼 성경 구절을 써 놓았어요. 창세기 3장 10절
목사님이 창세기 3장 10절을 딱 봤더니

(창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우리들은 말씀을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며 우리의 삶을 변화되어 갑니다.
이왕 읽고 듣고 변화되려면 온전한 변화, 주님의 원하시는 변화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과학에서 말하는 변화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물리적 변화와 화학적 변화, 그 두 가지 입니다.
물리적 변화란 성분의 변화 없이 상태나 외형만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나무가 책상이 되고, 야구 방망이가 되고, 마루가 되는 것처럼 모양이 바뀌지만 여전히 나무인 것을 가리켜서 물리적 변화라고 합니다.
그에 반하여 화학적 변화는 전혀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똑같은 나무이지만, 단순히 자르는 것만이 아니고, 갈기도 하고, 새로운 첨가물을 넣기도 해서 얇게 펴 놓으면 종이가 됩니다.

카바이트라 불리는 탄화칼슘에 물을 넣으면(CaC2 + 2H2O → Ca(OH)2+C2H2 ) 에틸렌이란 가스가 나옵니다. 이 가스는 용접할 때 쓰기도 하구요, 포장마차에서 어둠을 밝히는데 사용하기도 하고 과일을 숙성시킬 때 그 가스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병에 넣은 매실에다 설탕을 뿌려 놓고 마개를 잘 닫아 놓은 후 한 3-4개월 지나가면 매실이나 설탕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이 나옵니다. 이거 잘 못 마시면 취해서 헤롱거립니다.
이런 변화를 화학적 변화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한 변화된 사람이 나옵니다. 변화된 후에도 여전히 사람이라는 측면에서는 물리적 변화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물리적 변화만 발생된 것이 아닌 듯 합니다.
이 사람의 상황을 조금 더 살펴봅시다.\

1. 그는 날 때부터 걷지 못하였습니다.

(행3:1-10)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행4: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나 40여 년 간을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장애인은 사회에 적응하면서 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어릴 때에는 그래도 부모가 보호해주니 크게 문제될 것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커 가면서,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형제들도 제 앞가림 겨우 하는 정도라면, 이 장애인은 할 수 있는 최대의 일, 바로 구걸에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른 곳보다 비교적 인심 좋은 이 성전은 구걸하기 최적의 장소일 것입니다. 감추어져 있던 인정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이 곳에서는 그 인정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하는 이 장애인은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실 안타까운 면이 있습니다.

이왕 성전 미문에 와 있다면, 그가 조금만 움직이면 그 인정을 베풀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었는데, 지금 이 사람의 관심은 오직 구걸에만 있습니다.
비록 성전에 와 있어도 이 사람의 관심은 온전히 구걸입니다. 누가 내게 인정을 베풀어 동전 한 닢이라도 넣어 줄까 기대합니다.

거룩한 모습을 띤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강도 만난 자를 버려둔 족속입니다.
서기관이 지나갑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장소를 잘 선택한 듯 합니다. 때때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면서 그에게 사랑을 베풀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이 그리심산이 아닌 예루살렘에 나타날 일은 애시당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이 조금 더 성숙해졌다면 그는 진정한 복을 누릴 수 있었는데 전혀 모릅니다.

어쩌면 그는 성전 미문에 와 앉아 보는 것이 성전 경험의 전부일지 모릅니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그 안에서 어떤 역사가 진행되는지, 그 사람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그에게 던져지는 알량한 동정에 자신의 모든 관심이 기울어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야 할 장소가 동정이나 기대하는 장소로 바뀐 이 비극 앞에서 오늘 우리들도 자유롭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2. 혹시 우리의 모습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교회를 다닌 지 여러 해, 또는 수 십 년이 되면서 구원 받은 지 꽤 오래 된 것 같은데, 여전히 일어서지 못하고 누가 던져 주는 동전만 바라보고, 제 발로 걸어보지 못한 신앙이 아닌지요.
가능하면 편하게 예배하고, 편하게 신앙생활하고 아무런 부담없이 하늘의 복만을 원하는 것은 아닌지요?

대한민국의 신체 건강한 남아라면 반드시 국방의 의무를 감당해야만 합니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빼먹으려는 일부의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대한 남아는 기꺼이 그 직임을 수행합니다.

김웅래 씨가 쓴 우스갯 소리입니다. 
땡돌이가 군 입대를 앞두고 신체검사를 받으면서 면제를 받으려고 별 짓을 다했습니다.
저는 손가락 하나가 없는데요. - 괜찮아. 안중근 의사도 그랬어.
한쪽 눈도 멀었어요. - 상관없어. 사격은 두 눈 뜨고 하는 게 아니니까.
배에 칼 맞은 자국도 있는데요? - 무슨 소리! 이순신 장군은 총알을 맞고도 싸웠어.
저는 자살 충동까지 느낀다고요. - 이준 열사는 자살로 국가에 헌신했어.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된 땡돌이가 마지막 카드를 내밀었습니다.
사실 저는 제 정신이 아니에요. - 괜찮대두. 그래도 두 분 대통령께선 임기를 채우지 않았나.

혹시 우리들은 말입니다. 우리가 행해야 할 마땅한 모습까지 잃어버린 채,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실상 그 분과 관계없이, 성전 밖에서 누군가로부터 던져지는 알량한 동정과, 우리의 원하는 것이 하나 둘 채워지는 재미에만 관심이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현대인들에게 기독교는 고상한 정신문화를 이룰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어 교양의 폭이나 넓히고, 아침에 출근했다 오후 예배도 미처 마치지 못하고 퇴근하는 그런 삶은 혹시 아닌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구걸하는 이처럼 비록 성전 문을 밟고 지나다니며, 구걸하는 이들보다는 한 단계 발전하여 이 성전의 문 앞에만 있지 아니하고 그 문을 통과하여 예배당 안에까지 들어와 예배하고 찬양하고 설교 듣고, 친교를 나누는 데까지는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그 모든 사역이 더 이상 우리에게 어떤 변화도 주지 못하고 그저 그런 다양한 이벤트 중의 하나라는 느낌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을 만나는 대신에 우리의 원하는 것에 우리의 모든 관심이 기울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요?

코넬 대학의 실험실에서 『개구리 적응실험』을 한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시지요?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집어넣었더니 순간적으로 뛰어나오더랍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미지근한 물에 넣었다가 오랜 시간을 두고 조금씩 온도를 높여갔더니 개구리는 끓는 물속에서 편안하고 기분 좋게 죽어갔다고 합니다.

사람들도 갑작스런 변화에는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만 조금씩 영혼이 썩어 들어가는 것에는 둔감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예배가 감동이 되지 못하고, 찬양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고백을 싣지 못하고, 설교가 더 이상 하나님 말씀의 선포가 되지 못하고 형식만이 남아 있도록 변화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일어서기보다 던져져 내 앞에 있는 우리의 원하는 것에 우리의 모든 힘이 집중되어 있어 우리의 무릎과 관절은 힘을 잃고 홀로 설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은 아닌지요?


3. 어떻게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행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은과 금 싫어하는 사람 있습니까? 은과 금 없이 사는 사람 있습니까? 물질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또한 살아갈 터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십니까? 바로 그 필요한 은과 금 때문에 사람이 썩어갑니다. 사회가 썩어갑니다. 교회가 썩어갑니다.

은과 금을 바라는 교회와 교인, 그리고 목사들 때문에 기복 신앙이 성행하고, 복 받으라는 외침과 그 외침에만 귀 기울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보면 볼수록 보암직하고, 그 맛을 보면 맛을 볼수록 먹음직해 보여서,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썩는 변화밖에 더 기대할 것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이 썩어질 것으로 변화되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었던 것이 하나 있어서 그 장애인에게 주려 합니다.

(행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이것을 바로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두 사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집니다.
그의 몸은 분명히 성전마당까지 들어 왔지만, 그의 관심은 은과 금에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못했습니다. 성전에 와 있지만 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선포 하신 후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고 마음 속으로 그 말씀을 듣는 자는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체장애인인 상태로 평생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그 사람에게 변화가 생깁니다. 물질이 있고 없고의 상태가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화학적인 변화 정도가 아니라 생 자체가 거듭납니다.

(행3:7-10)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그는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걷게 됩니다. 이제는 펄쩍 펄쩍 뜁니다.
그리고 “한 푼 줍쇼” 하면서 사람을 향하여 사람의 동정심을 모으던 그 입술이 하나님의 찬양합니다.
지나간 40년의 고통과 눈물, 수모, 한탄의 세월이 지나갑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야말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변화를 갈망하십니까?
신세타령만 하고 살고 싶은 분은 아마도 없겠지요. 
앉은뱅이로 평생 살기 원하시는 것 아니겠지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들은 일어나시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이 일어나기를 우리보다 더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어지기를 우리보다 더 원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사실은 오늘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바람이, 우리의 목표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이신가 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집사님 한 분이 앵무새를 길렀다.
앵무새 기른 동기가 뭐냐면 자기 교회 목사님이 앵무새를 기른다고 하니까 덩달아 ‘나도 앵무새 하나 기를까?’ 그래서 앵무새 하나를 사다가 길렀다.
근데 그 앵무새가 꼭 한마디 말을 할 줄 아는데 그 말이 이 앵무새를 산 주인을 얼마나 당황하게 만들었는지 몰라요. 꼭 한마디 하는데 그게 뭐냐면 “키스해 주세요” 시도 때도 없이 “키스해 주세요” 하니까 이거 찾아오는 손님에게 주인이 오해받게 생겼잖아요.
그래서 당황을 해가지고 목사님께 어느 날 전화를 걸었습니다.
“목사님 듣자 하니 목사님 앵무새는 경건한 언어훈련이 잘되 있다고 하는데 내 앵무새 보낼 테니까 training 좀 시켜 주십시요.”
목사님이 문제없다고 보내라고 목사님 새장에 이 새 앵무새를 같이 집어넣었습니다.
목사님의 앵무새가 주인이니까 먼저 인사를 합니다.
사실은 목사님의 앵무새도 꼭 한마디의 말을 할 줄 아는데 그게 뭐냐면 “다 같이 기도하십시다”  그래서 목사님의 앵무새가 주인이니까 먼저 인사를 하는 거예요. “다 같이 기도 하십시다”
그랬더니 새로 온 앵무새가 “키스해주세요”
그랬더니 목사님 앵무새가 전에 하지 않았던 한마디 말을 더 하더래요.
“주께서 드디어 내 기도를 응답하셨다.”
밤낮 뭐 기도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기도하느냐?

무엇을 기도하셨는지요? 그리고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요?
그런 면에서 차라리 순전한 한 아이의 기도가 더 마음을 울립니다.
“하나님, 착한 사람은 빨리 죽는다면서요? 엄마가 말하는 걸 들었어요.
단언하건대 하나님. 저는요, 항상 착하지는 않아요.“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그냥 믿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믿는다는 고백 자체가 생명을 담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만이 할 수 있었던 고백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말씀을 들으시고 
마땅히 일어서야 할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며,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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