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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이지 않는 동행자 예수님과 함께!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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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동행자 예수님과 함께! (눅 24:13~35)

 
우리 모두는 나이가 얼마이든, 사회적 지위가 얼마이든, 우리가 가진 지식이 무엇이든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자식들이 괴로움이 있을 때 부모님을 찾아가면 다 편안해집니다.  오늘 여러분은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시달리고 스트레스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내 안에서 편히 쉬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집에서 예배드리는 가운데 여러분의 마음속에 세상이 주지 않는 하나님의 평강과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자신의 틀에 맞추어서 조종하려는 어리석음과 욕망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자신의 잣대대로 움직여지기를 원하는 어리석은 반응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시적이고 권위적이게 됩니다.  이것이 안되면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미움과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핏덩이를 기른 아버지 어머니도 못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합니까?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하거나 심각한 일이 생겼을 때, 자신의 접근방법이나 대응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을 사람들은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잘못한 것이지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내가 어떤 일에 대응하는 대응방식이나 반응이 건강한 대응이나 건강한 반응이 아니라 늘 병든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비판적이고 복잡한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자신의 반응과 대응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소위 똥고집이라고 합니다.

"똥고집"  설교를 준비하다가 갑자기 인터넷에서는 이 똥고집을 뭐라고 하는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똥고집을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똥이 굳어질 때까지 그 고집이 꺾이지 않는 것"

사랑하는 여러분, 똥고집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다 수술을 받아야 됩니다.  자동차가 일년에 한번씩 국가에서 검진을 받으라고 하는 검진을 받아야 됩니다.  병원에서 건강 검진을 받아야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을 검진 받아야 됩니다.  영혼의 검진을 받아야 됩니다.  정신의 검진을 받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는 그릇된 욕망으로부터 자유하십시오.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잘못된 사고에서 벗어나십시오.  사랑은 소유가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유함에 있습니다.  사랑은 지배가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섬김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대를 살아가는 지성인들의 불행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자신은 정신 검진을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기갈로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편협과 독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가 최고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몰라준다는 겁니다.  세상이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고 하는 이런 불행으로부터 오늘 자유함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회자가 제일 안타까운 것이 어떤 것인 줄 아십니까?  어려운 시기에 그냥 주저앉고 마는 가정들, 정말 힘든 시기에 사람의 도움도 하나님의 도움도 구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고 주저앉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불행합니다.  여러분, 제가 이 강대상을 혼자서는 못 듭니다.  최선을 다해도 못 듭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못 듭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들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최선을 다한다고 하는 것은 남의 도움을 구하는 겸손하고 겸허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는 사람이 도울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도울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위하신다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 주위에는 그냥 상황에 굴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상황을 극복하고 증인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난관 앞에 자기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느 날엔가 믿음을 붙들고 자기의 극한 상황 앞에 맞서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순종하는 이 생명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역사를 나타냈는지를 시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한 생명에 증인이 되리라고 하는 믿음의 대열에 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꿈을 꾸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다시 하나님을 강하게 의지하십시오.  다시 하나님을 강하게 붙드십시오.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 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잖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상황이나 환경이 자신의 마음이나 태도를 통제하도록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런 마음을 같느냐, 왜 그런 마음의 반응을 했느냐, 상황이 나를 통제한다, 사건이 나를 통제한다, 삶의 환경이 나를 통제한다.  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용기는 남과 싸우는 용기가 아닙니다.  가장 위대한 용기는 상황과 싸우는 용기가 아닙니다.  가장 위대한 용기는 남편과 아내와 식구와 싸우는 용기가 아닙니다.  가장 위대한 용기는 자신의 마음의 태도를 통제할 수 있는 용기와 싸우는 겁니다.

내가 넉넉히 이기리라!  넉넉히 이기리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넉넉히 이기리라!
저의 목회 생활의 경험을 통해서 성도들의 진지한 믿음 생활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두 가지를 지적하라고 한다면 저는 다음의 두 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구원의 확신이고, 또 하나는 신앙의 성숙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입문 과정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영적인 성숙, 내지는 신앙의 성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에 다니면서도 여전히 영적으로 자라나지 못하고,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구원의 확신조차 갖지 못한 교인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매우 가슴아픈 일입니다.  결국 이런 교인들은 명목상의 교인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는 나오지만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의 자리에 머물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명목상의 교인들이 가질 가장 실천적인 고민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교회에 나오고는 있지만 내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간증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런 간증을 할 수가 없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는 교회에 나온 세월은 오래 되면서 나름대로 교회 생활에 적응하는 기술은 발달합니다.  직분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자기 내면의 신앙은 전혀 성숙하지 못한 채 그대로 제자리걸음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성숙에 있어서 구체적인 증거는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그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만남의 확신도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동행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단 만나야 그 다음에 동행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80년대 히트곡 가운데 '동행자'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가 유행할 당시에 거리의 음반 가게에서는 자주 들을 수 있었던 노래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7080세대들은 잘 아는 노래입니다.  저는 처음에 7080노래방이라고 하니까 나이가 70에서 80세만 되는 분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노래방인 줄 알았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외로울 땐 언제나 / 내 손을 잡아주고
괴로울 땐 언제나 / 내 마음 달래준 사람
당신은 오직 / 내 인생의 동반자
사랑의 길을 / 함께 가야할 사람
바람 부는 날이면 / 바람을 막아주는
내 인생의 동반자 / 당신은 나의 동반자"♬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외로움을 느낄 때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 줄 수 있는 동행자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이 문제를 도와줄 수 있는 강력한 동행자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슬픔을 느낄 때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좋은 동행자가 어디에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세상에서는 완벽하고 완전한 동행자는 없습니다.  나의 외로움을 달래고 싶어서 이 사람이 나의 동행자인 것 같아서 함께 걸어가다 보면 오히려 그 사람의 외로움을 내가 다 안고 걸어가야 할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의 어려운 문제를 도와줄 수 있는 것 같아서 함께 걸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 그 사람의 고통까지 내가 감당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참으로 진정한 동행자가 필요하다면 그는 나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고, 또 내 모든 문제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런 동행자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내 인생에 진정한 동행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저는 신앙생활의 본질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성삼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신앙생활의 본질을 잊어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마치 교회 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 지식을 많이 아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혹은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고, 헌신을 많이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인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교회생활에 적응을 잘하고, 성경을 많이 알고 있고, 기도와 헌신의 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삶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열심히 읽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과 동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주님과의 동행은 신앙생활의 첫걸음이요, 마지막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는 아주 특별한 한 동행자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떤 사업에 성공을 했다거나 사회적으로 출세를 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의 꿈과 비전을 잃어버리고 실망과 절망 가운데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에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가 실망과 좌절 가운데서 그들의 살 길을 찾아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두 사람도 지금 비통함과 절망감에 빠져서 고향을 향해 가는 가운데 엠마오라는 곳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주님을 따라왔던 삶을 생각하면서 후회를 했습니다.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결국에는 혼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꿈도 비전도 잃어버리고 그들은 혼자 걸을 수밖에 없는 그런 절망감에 붙잡혀서 걷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제자가 아닌 다른 종류의 삶의 구상하면서 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어느 순간엔가부터 한 동행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 동행자는 실의에 빠진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면서 결국에는 그들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들의 실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이 동행자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동행자의 특징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 동행자는 침묵의 동행자였습니다.

본문 15절과 16절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보십시오. 지금 두 제자는 자기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하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것 봐! 소문 들었나?"  "아니 어떤 소문?"  "우리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문 말이야!"  "아니 글세 말이야!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겠나?  공연한 헛소문일걸?  그건 그렇다고 치고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면서 살지?  괜히 예수님만 따라 다니다가 돈도 벌지 못하고 손해가 막심해!"  "글세 말이야!  결국 우리는 비참해 졌군!"  "혼자 남아서 그래"

아마도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길을 가고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의 대화 속에는 의심이 있습니다.  푸념이 있습니다.  신세 타령이 있습니다.  원망과 절망이 베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느 순간엔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침묵의 동행자 예수님이 거기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두 제자는 그 동행자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묵묵하게 그들과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나 혼자 간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실망과 낙심에 빠져서 혼자 길을 걸어갈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내가 홀로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우리 주님은 침묵의 동행자로 묵묵히 내 곁에서 함께 걸어가고 계십니다.  믿음이 부족하고 우리 눈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 때문에 어두워져서 주님인줄 알아보지 못해도 우리 주님은 언제나 동일하신 사랑으로 묵묵하게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침묵의 동행자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와 대화하시기가 지겨우십니까?  자기 말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가 싫어집니다.  제자들이 지금 자기 말만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묵묵히 그들과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십니다.  주님이 동행하시는 것도 모르고 자기뿐이라면서 절망하고 낙심하는 그들과 함께 주님은 침묵으로 동행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와 같이 있는 것이 답답합니까?  자기를 몰라주는 사람입니다.  옆에 있어도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합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나 밖에는 모르고, 세상 밖에는 모르면서 길을 가고 있을 때에라도 우리 주님은 말없이 동행해 주십니다.  때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걸어갈 때에라도 침묵의 동행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묵묵히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결코 이 길을 나 혼자 걸어간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소리 없이 우리 주님께서 당신 곁에서 동행하고 계십니다.  내 모든 말을 다 들으시고, 내 모든 사정을 다 아시며, 참으로 나의 모든 것을 돌보시는 침묵의 동행자 예수님을 확신하면서 담대하게 인생 길을 걸어가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이 동행자는 말씀하시는 동행자였습니다.

본문 17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누가 먼저 말을 걸고 있습니까?  제자들입니까, 예수님이십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먼저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실망하고 있는 제자들, 의심하고 있는 제자들, 슬퍼하고 있는 제자들, 낙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너희와 함께 동행하고 있는 내가 성경의 예언대로 죽은 가운데 살아나서 지금 너희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느니라.  왜 의심하느냐, 왜 슬퍼하느냐, 왜 낙심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매 주일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는 설교를 듣습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설교를 듣고 계십니다.  설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나온 우리들의 마음은 때로는 제자들처럼 의심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슬픔 가운데 있습니다.  낙심 가운데 있습니다.  절망 가운데 사로 잡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설교를 통해 말씀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동행하고 있어.  나는 너로 인해 죽었고, 너를 위해 다시 살아났고, 너와 함께 지금 동행하고 있고 너의 미래까지 책임질 너의 동행자이니라."  이것이 설교의 주제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통해 단순한 윤리를 발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 철학을 발견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생생하게 말씀하시는 우리의 동행자 예수님의 음성을 설교 가운데서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한 성도가 몹시도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너무도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을 치다가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음성을 높여서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답답해서 죽겠습니다."
 
한참을 기도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잠을 자는데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기를 업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아기를 보니까 다쳐서 얼굴에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 아기를 어머니가 달래고 있습니다.  아기가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기 어머니도 함께 울고 있는 것입니다.  슬프게 웁니다.  아기보다 더 크게 웁니다.
 
그 모습을 보다가 잠을 깼습니다.  그는 그 순간 하나님의 메시지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내가 가슴이 답답하고 원통해서 울고 있는데 우리 하나님이 나보다 훨씬 더 답답하여 지금 나 때문에 울고 계시는 구나!"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감격해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징계를 당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고통과 함께 하며, 너의 슬픔과 함께 하며, 너의 원통함과 함께 하는 너의 동행자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말씀하시는 동행자 주님의 말을 듣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가슴도 뜨거워질 것입니다.

본문 3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말씀하실 때 우리의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머리가 뜨거워지면 안 됩니다.  그러면 뇌졸중이나 뇌진탕에 걸릴 위험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이 가슴으로 내려오게 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머리에 머물러 있으면 곤란합니다.  내 머리가 복잡해지면 곤란합니다.  자기 이성과 자기 지식으로 말씀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람은 결코 성숙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 뇌진탕이나 뇌졸중에 걸릴 위험이 높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머리가 뜨거운 자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가슴이 뜨거운 자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여러분의 가슴이 뜨거워지기를 축복합니다.

말씀하시던 동행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말씀하십니다.  설교를 통해 말씀하실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말씀하실 것입니다.  묵상 중에 말씀하실 것입니다.  말씀하실 때마다 지금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살아 계시는 주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동행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동행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져서 다시금 사명을 붙잡고 떨쳐 일어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세 번째로, 이 동행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동행자였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동행하시면서 말씀하시던 예수님께서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사라지셨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제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주님은 영이신 성령으로 여전히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망한 제자들을 조용히 따라오셨던 침묵의 동행자, 말씀하시던 동행자가 왜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동행자가 되셨을까요?  제자들은 이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이 주신 떡을 먹고 눈이 밝아져 주님을 알아보는 믿음의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그를 볼 수 있을 만큼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기를 키우다 보면 아주 갓난 아기였을 때에는 어머니가 잠깐 눈에 사라져도 울고불고 야단입니다.  그러다가 조금 자라게 되면 옆방에 있으면 괜찮습니다.  한번씩만 가까이 와서 두드려 주고 가면 충분히 혼자서 놀 수 있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자라게 되면 어머니가 멀리 다니러 갔어도 기다릴 줄을 압니다.  어머니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약속, 절대로 자기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런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성장이라고 말합니다.  성숙이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이제 성장했습니다.  성숙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듣고, 주님이 주신 떡을 먹고, 눈이 밝아져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주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동행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주님이 동행하신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 주님이 보이지 않지만 지금 우리와 동행하고 있는 것을 믿습니다.  지금 우리 주님을 손으로 만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손으로 언제든지 나와 동행하시는 보이지 않는 동행자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바로 내 곁에서 주님은 그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동행자로서 나와 함께 길을 걸어가시고 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수전 엔드슨이라는 부인이 있습니다.  이 부인은 직장 생활을 하다가 그만 사고를 당해서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1년 동안을 집에 있었습니다.  모든 가슴의 상처를 치료하고 1년 뒤에 직장 상사의 도움을 받아서 다시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육군 장교였습니다.  그녀가 매일 아침 출근할 때 남편이 도와주었습니다.
 
한 달간을 그렇게 도와주다가 하루는 남편이 말을 했습니다.
"여보, 이제 나도 나의 생활에 리듬을 찾아야 될 것 같은데 당신 혼자서 출근하도록 하오."
남편의 말에 아내는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아하, 남편에게 내가 짐이 되는 모양이구나!  남편은 이제 나와 함께 가지 않을 모양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알았어요.  나 혼자도 출근할 수 있어요."

그렇게 화를 내고서 혼자서 버스를 타고 출근했습니다.  걸어가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면서 어려운 출퇴근길을 오고 갔습니다.  한 보름쯤 지났는데 그날도 버스를 타고 버스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그 버스 운전기사가 말합니다.
"아주머니는 참 행복하십니다."
"행복하긴 무엇이 행복합니까?  눈도 볼 수 없는데 행복하긴 무엇이 행복합니까?"
"저 앞에 보이는 잘생긴 군인이 아줌마 남편이 아닙니까?  제가 아주머니를 태운 그 날을 보니 항상 이 시간쯤에 저 군인 아저씨가 늘 여기에 서서 아주머니가 사무실로 들어갈 때까지 계속 쳐다보시고는 손을 흔들고 돌아가시던데 오늘도 저기에 계시는군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길을 걸어가면서 그는 자기와 동행하고 있는 남편의 사랑을 확신할 수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보지 못했을 뿐이지 남편의 사랑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남편은 언제나 그와 동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나와 동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동행자가 지금도 내 곁에서 나와 동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는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만질 수 없어도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는 보이지 않는 동행자이십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지금 내 곁에 계시는 동행자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향한, 당신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어떤 순간에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순간에도 어떤 외로운 길을 홀로 걸어갈 때에도 사랑의 주님은 보이지 않는 동행자로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동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제자들은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실망의 길, 엠마오로 가던 그 길에서 소망의 길, 사명의 길인 예루살렘의 길로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동행하시는 주님을 확신하면서 이제는 그 주님과 더불어 부활의 증인으로 담대하게 전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의 방향을 실망과 절망이 가득한 엠마오에서 소망과 비전이 넘치는 예루살렘으로 돌리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그분의 영이신 성령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낙심을 떨쳐 버리고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나 혼자 뿐이라고 움츠렸던 어깨를 다시 활짝 펴고 주님과 함께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걸어가고 있는 그 길이 멀다고 느껴지십니까?
세상의 유혹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그러나 그럴 때에 더욱 더 힘을 내십시오.
우리의 영원한 동행자이신 예수님이 당신과 함께 걸어가고 계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그분이 여러분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영원한 천국에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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