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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언제나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 (사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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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언제나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 (사 1:18)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으세요?
왜 주일마다 교회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적지 않은 물질을 헌금하고 이런 저런 봉사를 하세요? 예수를 믿는 목적이 무엇인가요?

왜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것일까요? 교회에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제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 나름대로 등수를 먹여 보았습니다.

1등은 ‘그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그냥 다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오래 다니다 보니 익숙해 져서 습관적으로 별 생각 없이 다니는 경우가 제일 많은 것 같습니다. 

2등은 ‘교회가 제일 좋고 건전한 클럽 같아서’입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어서 혼자서는 못삽니다. 사람과 어울려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저런 클럽을 만듭니다. 등산회, 낚시회, 라이언스, 무슨, 무슨 봉사회 같은 클럽을 만들어 활동합니다. 그러면서 보람도 느끼고 행복함도 느낍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교회는 그런 클럽 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집단과 모임입니다. 그 어느 클럽보다 활동이 많고, 대부분의 활동이 건전하고 보람됩니다.

한국에서는 예수를 안 믿던 사람들이 외국에 유학을 가거나 이민을 가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교회엘 가야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학생들의 경우 교회엘 가야 일주일 한번이라도 김치를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민 교회를 처음보고 느낀 인상은 무슨 교회 같지 않고 교민회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면을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 또한 중요한 교회의 기능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왜 교회를 다니느냐?’ ‘왜 예수를 믿느냐?’라고 묻는 물음에 ‘교회가 제일 좋은 클럽 같아서’라고 대답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3등은 2등과 비슷한 것이지만 ‘교회가 인간의 사회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 가장 좋은 조직과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많습니다. 혹시 그 이유를 여러분은 아십니까? 제 생각에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겸손하고 부드럽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교회가 남자보다 여자들에게 더 매력적인 집단과 조직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대부분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남녀가 평등하지 못합니다. 예전에 여자들은 이름도 없었습니다. 그냥 이씨, 박씨, 수원 댁 정도로 불렸습니다. 요즘은 다 여자도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 여자들은 이름으로 보다는 누구 딸, 누구 아내, 누구 엄마와 할머니로 불리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존재감이 없습니다. 그것이 여자들을 외롭게 하고 힘들게 하고 우울하게 합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교회는 여자들에게 이름을 찾아 준 거의 첫 번째 조직이었습니다. 여자들에게 이름만 찾아 준 것이 아니라 역할과 직분을 주었습니다. 권찰, 집사, 권사, 여전도회 회장등등.... 여성들은 교회에서 자신들의 사회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좀처럼 이룰 수 없는 욕구충족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교회에는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많아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성들만은 좀 못하지만 남성들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교회가 커지면서 교회 안에도 세상 못지않은 권력들이 생기면서 그것을 즐기고 그것에 집착하는 남성들이 교회로 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마다 장로선거가 치열해 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4등은 ‘기복적인 기대 때문’입니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미신섬기는 이유와 동기와 거의 비슷한 이유와 동기를 가지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동기는 적고 많음의 차이는 있지만 교회를 다니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는 다 있습니다. 

교회를 잘 다니면 복을 받아 건강하고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벌을 받고 매를 맞을까봐 교회를 다니는 경우가 보편적입니다.

저는 이것이 꼭 잘못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화와 복을 말씀하시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저는 그것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그와 같은 복을 받아 누리는 것이 옳은 일이고 좋은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상의 것들을 생각해 볼 때 너무 교회 안의 권력에 집착하여 욕심을 부리는 것은 좀 문제가 되지만 나머지 것들은 무조건 다 부정적으로 비판만 할 것은 아닐는지 모릅니다.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도 어떻게 보면 좋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좋고 옳은 일이 습관이 되었다는 것은 좋은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좋은 사귐을 가지고 봉사하고 활동하는 것도 건강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코이노니아 성도의 교제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예수를 잘 믿어서 건강하고 형통하는 복을 받겠다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이유의 전부라면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으십니까? 예수를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일 등가는 예수 믿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교회 생활을 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얻은 유익과 축복은 무엇입니까? 일 등가는 유익과 축복은 무엇입니까?

저에게 그와 같은 질문을 하신다면 저는 ‘속죄와 구원’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받은 복이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많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형통함’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저는 그 형통함의 복을 지금까지 받은 것 같습니다. 개인도 가정도 목회도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형통함으로 다윗이 고백하였던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을 저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저도 예수 믿어 수지맞은 사람입니다. 보통 큰 수지를 맞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든 복을 다 합하여도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속죄와 구원’의 복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제가 받았던 복의 백배 천배 만배를 합하여도 제가 받은 ‘속죄와 구원’의 은총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말씀 중에 하나는 시편 32편 1절의 말씀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할 만큼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는데 그 예수님의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시작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의 조상으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다윗에게도 죄가 있었습니다. 치명적인 죄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모든 삶을 일격에 무너트릴 수 있는 정말 치명적인 죄가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다윗은 침상을 눈물로 띄울 만큼 후회하며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은 회개를 받아 주시고 다윗의 그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잊으셨습니다. 새카맣게 잊으셨습니다. 정말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다윗의 죄를 옮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기억도 하지 못하시고 다윗은 정말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았던 복은 정말 이루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다윗도 그것을 압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의 시편 23편에서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그 모든 복보다 다윗에게 컸던 복은 ‘속죄와 구원’의 복이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의 시편 32편 1절에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저만이 아는 죄가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모든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모든 죄는 우리 모두를 영원히 멸망케 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검찰총장 추천을 받은 사람이 청문회 과정에서 과거의 허물들이 들어나 퇴진하고 지금 다시 추대를 받은 후보도 곤욕을 치루고 있습니다. 

국회의원들이 기가막히게 저들의 과거를 조사해서 이런저런 허물과 죄들을 밝혀냅니다. 그러나 저들의 밝혀낸 후보들의 죄와 허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후보들의 죄를 고발하고 있는 청문회 국회의원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제 생각에 저들도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성경에 보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는 참 치명적입니다.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맞게 될 사람들이 그 수치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산아 무너져 다고 바위야 나를 덮어 다고’라고 말할 것이라고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죄가 저에게도 있습니다. 제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하나님의 축복들을 내게서 단숨에 빼앗아갈 수 있는 허물과 죄가 저에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죄와 허물을 하나님께서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 죄와 허물이 너무 크고 무겁기 때문에 그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저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치루신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를 용서하여 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쓰임 받을 때 저를 감히 송사하지 못합니다.

죄 사함을 받지 못했다면 이 땅에 누리는 모든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죄의 사함을 얻지 못했다는 저는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영생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복음 중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얻게 된 축복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무엇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일까요? 

우리를 좀 더 건강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일까요? 우리를 좀 더 부요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일까요? 우리를 좀 더 형통하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주홍같이 붉고 진홍같이 붉은 죄를 사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일까요?

예수를 믿어도 가난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건강치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형통치 못하고 삶이 힘들고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혹시 그렇다고해도 예수 믿어도 다 소용없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혹시 우리가 부요하지는 못해도, 건강하지는 못해도, 그 복을 받지는 못했다고 하여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의 수치로부터 영원토록 자유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3절에 보면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검찰총장만 되려고 하여도 그것을 막기 위하여 그를 조사하여 고발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 고발 앞에서 그는 만인 앞에 부끄러운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은 그 어느 청문회의 국회의원보다 우리의 죄를 찾아 밝히는 일에 능한 자입니다. 청문회 국회의원은 겉에 드러나 몇가지 죄와 허물을 겨우 찾아내는 정도이지만 사탄은 정말 우리의 깊은 곳의 모든 허물과 죄를 찾아내 까발릴 수 있는 자입니다. 우리를 망신시키는 것을 일도 아니요, 우리를 영원한 구원의 자리에서 끌어 내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우리를 송사하지 못합니다. 고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183장이 좋습니다.

나 속죄함을 받은 후 한 없는 기쁨을 다 헤아릴 수 없어서 늘 찬송합니다.
나 속죄 받은 후 나 속죄 받은 후 주를 찬미 하겠네 
나 속죄 받은 후 주의 이름 찬미하겠네.

혹시 가진 재물이 없다고 하여도, 혹시 가진 건강이 없다고 하여도, 혹시 하는 일이 형통치 못하고 어렵다고 하여도 허물의 사하심을 얻고 죄의 가리움을 받은 것이 기쁘고 감사해서 늘 찬송하고 주를 찬미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왜 예수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누가 예수를 믿어서 받은 복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죄사함이라고 속죄함이라고 구원이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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