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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쓴 뿌리 (히 12: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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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뿌리 (히 12:14~17) 


<상처 없는 이가 없다> 

로키산맥 해발 3천 미터 높이에 수목한계선이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얼마나 매서운 바람이 불어대는지 나무들이 곧게 자라지 못한다고 합니다. 북풍한설을 이겨내지 못하고 마치 무릎을 꿇듯이 주저앉아 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짝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냉혹한 현장이지요.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최고급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 꿇은 나무로 제작이 된다고 합니다. 큰 상처를 입고 간신히 살아남은 나무이지만 이 나무에서 세계 최고의 명품 바이올린이 탄생한다는 것이지요. 

세상에 상처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너나없이 괴롭고 아픈 상처가 있습니다. 특히 어린 시절이나 사춘기에 입은 상처는 두고두고 우리를 괴롭힐 때가 많습니다. 괴로웠고 가슴 아팠던 상처는 좀 깨끗이 잊어버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이상하게도 상처는 잘 잊히지가 않습니다.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은 잘 잊히는데 내게 아픔과 슬픔을 안겨준 상처는 여간해서 잘 잊히지 않습니다. 정말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상처에는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리고 싶지만 그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픈 상처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우리 인생이 행복해질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무릎 꿇은 나무의 경우, 혹독한 눈보라를 맞으며 그 상처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평지의 물가에 심긴 나무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지요. 그럼에도 세계적인 명품 바이올린이 그 무릎 꿇은 나무에서부터 온다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여러분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상처가 있습니까? 믿음으로 건설적으로 극복할 경우 여러분은 그 상처 때문에 더욱 더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거기에 매여 있을 경우 여러분의 삶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이상하게도 나이를 먹을수록 미래의 소망은 점점 줄어들고 과거의 추억만 쌓여갑니다. 그래서 자꾸만 옛날 생각을 떠올리게 되는데, 좀 즐겁고 유쾌했던 기억만 떠오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아주 슬프고 불쾌했던 기억만 떠오릅니다. 제가 몇 차례 말씀드린 기억이 나지만 제가 존경하는 선배 목사님은 나이 70이 훨씬 넘어 구순 계모가 세상을 떠나는 임종 자리에 어린 시절 그 계모로부터 학대받은 상처가 떠올라서 무척 괴로워했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과 사춘기에 전처소생인 자기와 동생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던 그 계모를 나이 70이 훨씬 넘어서도 용서하지 못하더라는 것이지요. 아니, 지금 당장 구순 노모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어가는 마당에도 어린 시절 생모를 잃은 자기 친형제에게 상처를 준 계모의 젊었을 때의 모습이 아른거리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생입니다. ‘어른아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은 어른이 될수록 점점 더 아이가 되어갑니다. 뭔가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옛날 받았던 상처가 새록새록 떠올라 우리를 괴롭힙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제 오촌 당숙이 석회 공장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큰 부자였습니다. 그 당시 기준으로 볼 때 그야말로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서 떵떵거리고 살았습니다. 바로 그 부자 당숙 집 옆에 우리는 아주 초라한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다가 돈이 있으니까 자식들도 많이 낳아서 거의 다 서울에 유학을 시켰습니다. 초등학교만 시골서 나오게 하고서는 중고등학교부터는 다 서울에서 공부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마 한 대여섯 살 즈음 되었을 때 그 부자 당숙 집에 엄마 손을 잡고 놀러갔을 때 큰 충격을 받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하리’라는 집채만큼 큰 셰퍼드 개를 키웠는데 그 당시 중학교 다니던 좀 개 구진 육촌 형이 그 개를 저에게 들이대며 물으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 때 저는 너무도 무서워서 기겁을 했습니다. 물론 엄마 손을 잡고 있었고 또 지금 생각하니 악의가 전혀 없이 순전히 장난기로 했던 일이지만 그 때 제가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로 바로 옆에 있는 당숙 집에 좀체 기웃거리지 않으려고 했고 저를 놀래주려고 했던 그 육촌형에 대해서 아주 나쁜 편견을 갖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에 그 형님이 암에 걸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 형님의 이름만 떠올리면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의 상처가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유년 시절이나 사춘기에 입은 상처는 평생을 간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쓴 뿌리의 세 가지 작용> 

오늘 히브리서 6: 13절은 이러한 상처를 ‘쓴 뿌리’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쓴 뿌리는 그 당시 초대 교회를 어지럽히던 못된 무리를 지칭합니다. 교회에 몰래 들어와 하나님의 백성을 유혹해 우상잡신을 믿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살게 하는 암적인 세력을 쓴 뿌리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이 ‘쓴 뿌리’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나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체의 ‘상처’나 ‘나쁜 습관’을 지칭하는 ‘영적인 상징’으로서 이해하고자 합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지만 식물이 열매를 맺게 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뿌리의 일부분이 썩어서 쓰다고 하면 먼저 그 썩어서 쓴 뿌리의 일부분을 잘라내야 됩니다. 그냥 두면 썩은 쓴 뿌리에서 썩은 쓴 열매가 나옵니다. 바로 이런 쓴 뿌리의 속성을 본문 15절 후반부는 기가 막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첫째, 쓴 뿌리는 자라납니다. 

어린 시절에 입은 상처나 나쁜 습관은 치료하지 않고 그냥 놔두면 계속 자랍니다. 자기 비하의 쓴 뿌리, 음란의 쓴 뿌리, 열등감의 쓴 뿌리, 교만의 쓴 뿌리, 거짓말의 쓴 뿌리, 혈기의 쓴 뿌리, 폭력의 쓴 뿌리, 술 담배 마약의 쓴 뿌리, 이런 쓴 뿌리들을 그냥 방치해두면 계속해서 자라납니다. 그래서 잔뿌리를 만들고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도록 내버려두었다가는 우리의 삶 전체를 어둡게 하고 불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둘째, 쓴 뿌리는 괴롭게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는 말이지요. 이게 문제지요. 쓴 뿌리가 그냥 나 하나만 힘들게 하면 괜찮은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직장의 상사 한 사람이 쓴 뿌리를 끊어내지 못하면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 모두가 큰 괴로움을 당합니다. 학교 교사가 쓴 뿌리를 제거하지 못할 경우 그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 큰 상처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 국사를 돌보는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이지요. 지난 번 국회에서 미디어 법을 통과시킬 때에도 여야가 싸움박질을 하면서 추태를 보이지 않았습니까?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흥분하기 잘하고 맨 앞장서서 선동하고 폭력적인 분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런 분들에게는 반드시 유년기나 사춘기 때에 누군가에게 입은 상처나 분노가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항상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성품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 가운데에는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지 못하고 항상 어둡고 비딱하게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분들은 제도권에 속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합니다. 항상 야당 편에 서고 반대편에 섭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마음 깊은 곳을 파고 들어가 보면 반드시 열등감과 같은 쓴 뿌리라는 것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린 시절 입었던 상처나 나쁜 습관의 쓴 뿌리를 바로 처리하지 못하면 나만 괴로운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과 공동체까지도 괴롭게 만듭니다. 


셋째, 쓴 뿌리는 많은 것들을 더럽게 만듭니다. 

주변에 있는 것들을 오염시키고 변질시킨다는 말이지요. 무, 당근, 연근, 우엉, 감자, 고구마, 토란, 도라지, 마늘, 등등은 모두 뿌리채소이지요. 이런 뿌리채소들 중에 어느 하나의 뿌리가 썩으면 주변 뿌리들을 다 더럽힙니다. 다 썩게 만들어 뿌리채소를 망칠 수가 있습니다. 쓴 뿌리는 항상 파괴적이고 충동적입니다. 그래서 쓴 뿌리를 가진 이들의 원망 한 마디 불평 한 마디가 공동체 전체를 어렵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신명기 29: 18절에 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생겨난 ‘독초와 쑥의 뿌리’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고 타락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이 뽑아 세우신 지도자를 힘들게 만드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지요. 쓴 뿌리는 주변 전체를 더럽게 해서 오염시키고 변질시킵니다. 


<쓴 뿌리를 제거하려면>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쓴 뿌리를 어떻게 잘라내야 할까요? 본문 14절에 매우 중요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쓴 뿌리를 제거하려면 첫째, 모든 사람과 화평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는 아주 작은 일에도 서운함을 자주 느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주 작은 일에도 흥분을 잘 하고 혈기를 잘 부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일이 꼬이고 잘 안 될 때 자꾸만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원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 쓴 뿌리 때문이지요. 

쓴 뿌리의 가장 큰 문제는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는데 있습니다. 먼저 쓴 뿌리가 있으면 가정이 어렵게 됩니다. 부부관계가 힘듭니다. 부모 자식관계가 어렵게 됩니다. 사실 가정이 깨지는 이유가 부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쓴 뿌리를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공동체도 마찬가지이지요. 쓴 뿌리를 가진 이들끼리 부딪히면 그 공동체는 쉽게 균열이 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쓴 뿌리를 제거하려면 모든 사람과 화목해야 합니다. 원만해야 합니다. 너그러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화목하고 원만하고 너그러워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용서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어린 시절 입었던 상처를 잘 떨쳐내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이유는 다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여자 분은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구타를 많이 당했습니다. 남편에 대한 불만 때문인지 감정이 상할 때마다 어린 딸에게 손지 껌을 자주 했습니다. 이것이 그 분에게는 쓴 뿌리가 되었습니다. 어른이 되었어도 좀체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이 쓴 뿌리가 되어서 올라오니 결혼한 뒤에도 남편이나 자식들, 이웃들과의 관계가 원만할 리가 없습니다. 크고 작은 충돌이 그치지 않습니다. 용서를 못하기 때문이지요. 

한신대학교에서 목회상담학을 가르치는 정태기 교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전라도 섬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아버지가 조강지처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습니다. 자기보다 세 살 더 많은 정교수님의 어머니를 버리고 열여섯 살이나 더 젊은 첩을 얻어 살림을 차렸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본처에게는 4남매를, 그 두 번째 젊은 부인에게는 5남매를 두었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를 잊기 위해 오로지 일만 했습니다. 일 중독증에 걸린 것이지요. 하루 종일 농사일에만 매달리고 자식들에게 살가운 사랑이나 정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라다 보니 정교수님의 정서 생활은 엉망이었습니다. 항상 이유 없는 불안과 짜증 속에서 자랐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던 같습니다. 그러면서 정교수님의 인생 목표는 오직 한 가지 ‘아버지처럼 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교수님은 16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20년 동안 증오하면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쓴 뿌리를 제거하지 못하니 인간관계가 원만할 리가 만무하지요. 서른여섯 살이 될 때까지 사람들 앞에서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살았습니다. 하도 사람들 앞에서 숫기가 없이 다리를 떤다고 해서 ‘재봉틀’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아주 극적으로 아버지를 용서함으로써 쓴 뿌리를 잘라낼 수 있었습니다. 한 번도 아버지로부터 살가운 사랑이나 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어린 시절 자기에게 참외 다섯 개를 갖다 주신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운동회 때, 아버지가 섬에서 멀리 배를 타고 나가 사 오신 그 참외 다섯 개,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소리 없는 사랑의 표시인 것을 깨닫고서는 통곡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참외 다섯 개 때문에 아버지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용서하니 정교수님을 그토록 오랫동안 괴롭혔던 쓴 뿌리가 신기하게 빠져나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괴롭히는 쓴 뿌리를 제거하기 원하신다면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십시오. 화목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할 일은 용서하는 일입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리하면 쓴 뿌리가 뽑혀나갈 것입니다! 

쓴 뿌리를 제거하려면 둘째, 거룩함을 따라야 합니다. 

거룩함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지요. 베드로전서 1: 16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거룩해질 수가 없습니다. 나의 부족을 절감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거룩해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거룩하지 못한 이유는 거룩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까닭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이유는 하나님께 의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쓴 뿌리가 올라올 때마다 “하나님, 저는 부족합니다. 저 좀 도와주세요!”하고 도움을 요청하면 되는데 우리는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니 기도도 안하고 찬송도 부르지 않고 성경도 읽지 않고 자기 혼자 힘으로 쓴 뿌리를 처리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 뽑히지 않습니다. 해결되지 않습니다. 쓴 뿌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할 때에만 제거됩니다. 하나님이 도우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쓴 뿌리가 올라 올 때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여 보십시오.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여 보십시오. 그리하면 레이저 광선보다도 더 예리한 성령의 빛이 여러분의 모든 쓴 뿌리들을 제거해주실 것입니다. 

이제 저는 이사야 30: 26절을 읽으면서 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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