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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리고 풀리는 이적 (막 7: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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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리고 풀리는 이적(막7:31-37) 

  
이적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적을 베푸실 수밖에 없는 어떤 원인이 있다. 이적은 문제가 있어야 한다. 모든 이적은 문제가 있기에 일어났다. 문제가 없었다면 이적도 없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이적은, 문제가 있었기에 일어났다. 

  홍해바다가 갈라짐은, 홍해바다라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은 홍해바다를 갈라 주셨다. 마라의 쓴물이 단물이 되는 이적은, 마라의 물이 써서, 먹을 수 없었기에 일어났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물이 포도주가 이적은, 포도주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모든 이적은, 문제 때문에 주님을 만남으로 일어났다. 이 사실을 알 때, 문제는 오히려 축복이라는, 시각의 변화가 일어난다. 문제는 피해야 할, 인생의 적이 아니라, 가까이 해야 할 친구이다. 문제는 축복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더 이상 적이 아니니, 문제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문제를 환영하고, 주님의 이적을 소망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문제 때문에 망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은 문제 때문에 더욱 잘되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버림받았기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가족과 민족 세계를 구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해서, 브닌나에게 멸시를 당했고, 괴롭힘을 당했다. 그래서 한 맺힌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아이를 낳았으니, 문제 때문에 더 잘 된 사람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문제를 이적을 창조하는 재료로 삼으신다. 모든 이적은 문제와 함께 시작된다. 따라서 모든 문제들, 부족, 어려움, 고통…이 나타날 때, 오히려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이 성숙해지도록 힘써야 한다. 

  본문은 듣는 귀가 막혀있고, 말하는 혀가 묶여 있는 사람을, 예수님이 만나주신다. 그래서 귀먹고 혀가 묶여 있는 사람이,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는 이적을 경험하게 된다. 만약 이 사람의 귀가 막히지 않고, 혀가 잘 움직였다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 막혔기에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결국에 우리의 부족함은, 주님을 만나게 되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삶에 부족함이 있다면 감사하라. 그 부족함을 이적의 재료로 삼으시기 바란다. 그것이 지혜요, 능력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막히고,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1. 마음의 문을 열어라(32-33).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여기서 말 더듬는 자는(μογιλάλος)인데, μόγις(가까스로, 간신히) + λαλέω(말하다, 이야기하다), 즉 간신히 말하는 사람이다. 70인 역은 (사35:6)에는 “말 못하는 자”로 번역했다. 그는 의사소통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셨다. 

  귀먹고 말을 간신히 하는 사람은, 무리와 떨어진 곳에서, 따로 치료를 받았다. 장애인은 분위기에 아주 민감하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민감하다. 그는 자신이 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 싫었다. 이 심정을 파악하시고, 그를 데리고 나가셨다. 그를 향한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막8: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주님과 단 둘이 있을 때, 그의 마음이 평정되었다. 이렇게 주님은 그의 마음을 여셨다. 

  귀 먹고, 말을 어렵게 하는 자를, 주님은 왜 따로 데리고 가셨을까? 그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온, 피동적 상태였다. 자신의 치유 의지가, 거의 없었다. 듣지도 못하고, 말을 더듬는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는 이 사람을, 공개적으로 다루었다면, 그는 당황해 마음의 문을 닫을 수 있다. 

  그래서 배려하는 마음으로, 개인적으로 따로 데리고 가셨다. 그의 처지를 깊이 아시고, 개인적으로 접근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주목하시기 바란다. 아무리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려고 해도, 마음의 문을 닫아 놓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없다. 

  이 컵에 생수를 부어주시려고 해도, 뚜껑을 닫아 놓았다면, 물을 부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여시기 바란다. 예수님은 귀먹고 혀가 묶여 있어,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을,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가셔서, 일대일의 관계에서 그의 장애를 고쳐 주셨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니라, 주님과 일대 일로 만나야 한다. 예수님은 바쁜 사역 중에서도 무리를 피해,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과의 교제 나누는 모습을 가끔 보여 주신다. (눅5:16) “예수는 물러 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우리도 주님을 만나기 원한다면, 주변의 모든 잡음을 차단하고, 컴퓨터와 TV를 끄고, 예수님과 나 사이에, 은밀한 만남을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연약하기에, 숨겨진 부끄러운 죄들이 있다. 이 죄를 주님을 만나 고백해야 한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위대하고, 능력이 나타난다. 

  예수님은 공동체에 복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홀로 있을 때, 가장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것과도 떨어져, 홀로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원한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주님과 만나는 시간을, 하루의 중요 일과로 떼어놓으라.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예수님은 환자에게, 전혀 손 대지 않고도, 능히 치유하실 수 있는 권능이 있다. 그런데 왜 미신적 행위로 오해받을 수 있는, 침으로 치유하셨나? 이런 행동은 환자에게, 낫게 된다는 가능성만 아니라, 믿음을 주는 행위가 되었다. 예수님은 그에게 먼저, 믿음을 심어주려고 하셨다. 

  믿음이 없이는 역사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침을 사용하는 법은, 그 당시 민간요법으로 많이 활용되던 치료법이다. 침은 치유의 효과와, 재앙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침이 닿았을 때, 주님이 치료하신다는 믿음이 생겼다. 이처럼 주님은, 개인적으로 필요한 처방을 가지고 접근하신다. 

  내 처지, 내 절망, 내 고독, 내 눈물을 아시고, 주님은 나에게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다가오시면서 내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이시다. 그 주님은 나를 고칠 수 있는 분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다가오시는 주님께 마음의 문을 여시고, 주님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란다. 


2.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라. 

이적은 기도를 통해 일어난다. 모든 이적은 예수님께 나아올 때 일어난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이 사람의 인생길은, 막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은, 항상 열려 있다. 모든 길이 다 막혀 있어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항상 열려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에는 홍해로,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할 때, 이적이 일어났다. 

  모든 사람이 다 막아도, 주님께서 문을 열어 주시면 된다. 예수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까지, 소유하신 왕이시다. (계3:7-8)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다윗의 열쇠’는 ‘왕의 열쇠’라는 뜻이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말이다. 다윗 왕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님이, 문을 열어 주시면, 능히 닫을 사람이 없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인생의 문, 천국의 문, 지옥의 문을 열고 닫는 열쇠를 소유하신,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실 때, 하늘을 바라보셨다.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보셨다. 하나님이 계신, 그 하늘을 우러러볼 때, 우리 인생은 새로운 길이 열린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도, 눈을 들어서 우러러보셨다. (요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오병이어를 일으키실 때에도, 하늘을 우러러 보셨다(막6:41). 

  사방이 막히고 일이 풀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계신 하늘을 우러러보라.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 후에, 입을 여셨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그를 떠났을 때,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창15:5). 그리고 ‘에바다(ח󰚔󰘫)’ 즉 열리라고 명령하셨다. 그때 귀먹은 자가 열리고, 묶인 자의 혀가 풀렸다. 

  인생의 새로운 길이 열렸다. 우리 인생은,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또한 누구를 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힘이 들면, 하늘을 바라보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라. 높은 산을 바라보라. 그 높은 산 위에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라. 

  (시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오늘도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구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그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우주의 열쇠를 소유하신 분이다. 천국의 열쇠를 소유하신 분이다.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다. 예수님이 주신 천국 열쇠는, 매기도 하고 풀기도 하는 열쇠다. (마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귀가 먹고 묶여 있는 혀를 고치실 때 권세를 가지고, 에바다, 열리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이 명령하시자, 닫히고, 풀리지 않은 인생이, 열리고 풀리게 되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쳐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다. 그런 구절은 성경에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권세를 가지고 언제나 명령하셨고, 명령하신 그대로 되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막1:41) 하셨고, 그에게서 나오라고 귀신을 쫓고(막1:25), 네가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막5:34)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명령하셨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병 고쳐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를 사용해 병든 자를 고쳤다(행3:6, 9:34, 40). 예수님의 이름은 능력이다. 천국 열쇠다.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요14:13-14). 

  초대교회 사도들은,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 권세를 사용하라. 마귀를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일을 멸하셨기 때문이다. 마귀의 머리는 이미 깨졌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영생을 얻는다. 


3.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라(34上).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여기 탄식했다는(στενάζω) 말은, 상대방의 안타까움과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꼈다는 말이다. 주님은 그의 안타까움과 아픔을, 자신의 안타까움과 아픔으로 느꼈다. 

  듣지 못하는 아픔, 제대로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얼마나 괴로웠을까? 주변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조롱당하는 아픔이 얼마나 심했을까? 견딜 수 없는 고독, 소외, 단절의 아픔, 그런데도 믿음이 전혀 없는 모습을 보시고, 주님은 자신의 아픔처럼, 함께 느끼시며 신음하듯, 아픔을 내뱉으셨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이웃들과 더불어,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웃의 고통을 치료하는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사람들을 치유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의 아픔을 공감하셨기에, 치료하셨다. 

  히브리기자는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하였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라며, 2중 부정으로 말했다. 

  우리와 더불어 연약함을 동정하신다는 말이다. 동정한다는 말은, 함께 고생한다, 느낀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고생하신다. 우리의 좌절을 아신다. 분노를 아신다. 속상함을 아신다. 나의 고통과 눈물을 아신다. 나의 방황을 아신다. 나의 답답함을 아신다. 

  견딜 수 없는 나의 부끄러움과, 무기력함을 주님께서는 아신다. 어쩔 수 없는 나의 좌절을 아신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고치실 수 있다. 어느 할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았다. 이 할아버지는 암 진단을 받은 날부터, 갑자기 성격이 매우 난폭해졌다. 

  식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도 욕을 퍼붓고,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고, 입원해서도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간호사와 의사들에게도 포악하게 대했다. 어떻게 도울 수 없을까 해서, 옛날 친구들을 들여보냈지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소리를 지르며, 쫓아 버리고 말았다. 

  또 그와 절친하게 지냈던 은사들을 보내 봤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목사님을 보냈더니, 욕만 먹고 목사님도 쫓겨났다. 상담자들도 들여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 할아버지가 가끔 만나던 어린 꼬마가,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왔다. 

  식구들은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한번 들어가서 할아버지를 만나보라”며, 그 꼬마를 들여보냈다. 그런데 한 20-30분 동안, 이 어린소년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나오더니, 이 할아버지가 변했다. 태도가 갑자기 누그러지고 부드러워지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너무나 이상해서, 소년을 붙들고, 사람들이 물어 보았다. “너 할아버지하고 무슨 이야기를 했니?” 소년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도대체 할아버지랑 20-30분 동안이나 무엇을 했니? 그랬더니 어린 소년이 대답했다. “할아버지랑 저는 그냥 같이 울었어요.” 

  이 할아버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면서, 함께 우는 순간, 더불어 껴안고 울던, 그 눈물 속에서, 할아버지의 아픔과 질병이 치유되었다. 이처럼 우리가 공감할 때, 그 아픔을 함께 느낄 때, 치유의 능력이 솟아난다. 

  아픔이 왜 능력이고 사명인가? 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아픔을 주시는가? 그 아픔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라는 주님의 뜻이다. 홀로 된 사람에게, 최고의 위로자는 누구인가? 먼저 홀로 된 아픔을 가진 사람이다. 

  암 환자에게 최선의 위로자는 누구인가? 암 투병의 경험이 있는 회복된 사람이다. 우리들은 많은 아픔이 있다. 그 아픔을 사명으로 여겨야 한다. 신유의 능력이 나타나는, 목사님들은 어떤 분인가? 자신이 병으로 고통당하고, 죽음의 지경에 이르렀던 분들이다. 같이 아픔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웃의 아픔을 공감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왜 십자가가 능력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신 주님, 그렇게 죽어야 할 필요가 없고, 그렇게 고통 받아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분이, 세상에서 가장 극악한 죄인의 모습으로,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목마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시면서, 고통당하시고, 부르짖으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고통, 우리의 오해받음, 우리의 배신, 우리의 눈물, 우리 죄악의 치욕과 부끄러움을 이해하신다. 

  그렇기에 내 죄를 담당하시고, 보배로운 피를 쏟아 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 앞에 오는 사람을, 우리 주님은 구원하실 수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이다. 십자가는 능력이다. 십자가는 위로다. 십자가는 소망이다. 

  에바다! 지금 이 음성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닫힌 공간에서, 외롭게 고통당하는 그들을 주님은 아신다. 주님은 그 마음 속 깊은 고통까지도 어루만지기 원하신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말씀하신다. “네 닫힌 마음과 세계가 열릴지어다. 축복의 문, 형통의 문이 열릴 지어다…” 

  어떤 문제가 있나요? 길이 막히고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나요? 사방이 모두 막힌,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나요?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항상 열려 있다. 하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기도할 수 있다면 낙심하지 말라. 우리는 천국의 열쇠를 소유한 사람이다. 

  기도로 천국 열쇠를 사용하라. 길이 막히고,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면,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사람들을 보내주신다. 지혜도 주시고, 우리의 길을 열어주시고, 풀려지게 만들어 주신다. 

  그러므로 주님을 의지하라. 문제를 해결 받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되기 바란다. 그 길이 바로 예수님을 증거 하는 길이다. 이적을 창조하시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길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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