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무신론적 사고를 타파하라 (시 14:1~7)

  • 잡초 잡초
  • 332
  • 0

첨부 1


무신론적 사고를 타파하라 (시 14:1~7)

 
무신론은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올해 초 1월에 영국 전역에 전철과 버스에 다음과 같은 광고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국의 오랜 신앙의 전통을 조소하고 비웃는 광고내용입니다. 

‘아마도 신은 없을 것이다. 걱정 말고 인생을 즐겨라.’ 
(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ing and enjoy your life.)

여기에서 ‘probably’라는 말로 의미를 흐려두었지만, 이것은 분명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광고를 들으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위기감과 분노를 느끼실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마음은 영국의 전철과 버스에 실린 광고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두 마음이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또 때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계셔야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차를 몰고 가다가 급한 마음에 유턴을 하려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찰관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과도 같습니다. 내가 무언가 꺼림칙하거나 잘못했을 때,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운 일을 할 때는 하나님이 잠시 안계셨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에게 닥친 위기 앞에서는 꼭 하나님이 계셔야 하기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반드시 들어주세요.’, ‘하나님은 정의로운 뜻으로 이 불의한 상황을 심판해 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웃지 못할 우리의 마음은 신관, 곧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달려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 안에도 무신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신관을 소유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 곧 의심으로 시작해서 의심으로 끝난 사람을 ‘회의론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들어서 잘 알고 있는 「만들어진 신」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가 대표적인 회의론자입니다. 그는 ‘파스칼’과 ‘버틀란트 러셀’이라는 철학자를 비교하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 러셀의 손을 들며 이렇게 결론맺고 있습니다.

“신은 비겁하게 내기로 양다리를 걸친 파스칼보다 용기 있는 회의주의를 내세운 러셀을 훨씬 더 존중하지 않을까?”

회의주의자를 용기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말장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버트란트 러셀과 파스칼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파스칼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자기의 삶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하나님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감사함으로 고백했습니다. 

성령의 역사 속에 자기 자신이 약속의 자녀임과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고백하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러셀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지적인 질문을 했지만 여전한 의심과 질문, 회의 속에 자기를 가두고 무신론적인 삶에 머물고 만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이 두 철학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일까요?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속에는 이런 무신론이 자리 잡고 있지는 않는 것일까요?

겸손한 의심은 믿음으로 들어오는 관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종종 의심을 합니다. 무신론적 생각이란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지에 대한 의심이라는 뜻입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에게 그런 의심의 순간이 없었다면, 그것은 억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의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이 가진 의심에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겸손입니다. 

겸손한 의심은 믿음으로 들어오는 관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회의론자들의 의심은 늘 교만합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재단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의심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의심을 가진 사람은 비로소 영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질문할 수 있습니다. ‘아, 내가 믿음의 경지에 섰다고 알았지만, 이렇게 순간마다 흔들리는구나! 이 순간에도 나는 하나님이 과연 계시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자로구나!’ 

겸손한 질문과 의심은 우리를 곧 하나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찾을 수 없는 영원하고 지고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 앞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면 모든 의심의 사람들은 곧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순간 하나님의 사람들이 겪는 흔들림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무신론이 있습니다. 

본문은 무신론자, 곧 교만한 의심과 끝없는 회의론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 반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무신론적 사고를 갖고 있을까요? 무신론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신은 인간이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신은 인간의 생각 속에서 지어낸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위로 받고, 평안의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신을 지어냈다고 의심합니다. 이런 의심에는 더 이상 계시나 신비도 없고, 거룩함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기 창작물에 불과하다고 여기면서 신을 조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교만함에 대하여 하나님은 오히려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 즉” (시편14:2)

하나님이 인간을 찾으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전도서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도서 3:11)

인간이 필요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영혼의 세계, 곧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진리의 세계를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마음속에 영혼의 생명을 그리워하는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매일매일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 삶, 영원함 삶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 인간은 영혼의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평안이 없었다는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이 오히려 우리의 본질을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순간, 인간은 극도의 경외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습관적인 종교인으로 매일 의미 없이 성전 문을 들락날락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각이나 삶의 변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딘가에 계실 것이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과연 하나님이 어디에 계셔서 자기 민족이 고통을 겪는 것인가ㅔ 대한 의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성전에 들어갈 때,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습관적인 종교인’에서 ‘불붙은 신앙인’으로 변화됩니다. 그는 이전에는 머릿속에만 담겨있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슴과 온 몸으로 경험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비로소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다가오심과 동시에 이사야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엄청난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하여 추악하기 그지없는 죄의 문제를 발견하게 되어 그는 통곡했습니다. ‘아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이사야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자기의 부정함을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더 이상 습관적인 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만드시고 불러주신 소명과 사명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너무 작은 신으로 과소평가하는 무신론이 있습니다. 

우리는 또 하나님을 과소평가하곤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지만 하나님의 가치는 너무 보잘 것 없게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이 없다고 소리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시편14:1)

신앙인에게도 이처럼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습니다. 현실의 엄청난 벽 앞에서 힘이 없는 하나님, 무력한 하나님,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해서 저 멀리 떨어져서 상관하지도 않는 하나님. 이런 생각은 대부분 자기 자신의 생각, 자기 자신의 고정관념에 집착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입니다. 

신앙의 아버지인 아브라함도, 그의 아내였던 사라에게도 하나님이 자꾸만 보잘것없게 여겨지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주신 약속에 대하여 그들은 허탈하게 웃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자기의 고집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기력하고 작은 하나님은 곧 그들의 불신앙의 표현이었습니다. 

신앙이란 말씀과 씨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몸부림치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회 오래 나간 것, 교회에서 직분 받는 것운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사로잡히는 것, 사로잡히려 애쓰는 것이 신앙입니다. 욥의 삶에 고난이 닥쳐왔을 때 아내가 욥을 향하여 비난합니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기 2:9)

하나님은 형편없다고 이야기하고 그냥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아내가 하나님과 자신을 비난할 때 욥은 자기 인생에서 말씀과 씨름하는 고통을 경험합니다. 무신론의 상황 속에서 그는 고통스럽게 부르짖습니다. 
오늘 시편 14:2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에서는 하늘의 세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브라함이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욥이 자기의 문제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탄식하는 이유도 보이는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늘의 세계를 알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무자비한 신으로 생각하는 무신론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자비한 신으로 생각하는 무신론도 있습니다. ‘세상에 고난이 왜 아직도 있습니까?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왜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왜 악을 그대로 두십니까? 하나님은 인자한 분이 아니라 무자비한 신이 아닙니까? 왜 인간의 고난과 슬픔에 모른 척 합니까?’ 

이런 질문들은 우리를 무신론자로 만들려고 달려듭니다. 마치 기독교는 우리를 하나님의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연약한 자의 친구다. 억압받는 자를 자유하게 하고 해방시키는 그런 하늘의 존재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아시고 함께 고통스럽게 아파하시는 분임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실 때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아파하시며 하나님도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도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시편 14:6-7)

가난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 피난처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구약의 역사였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신앙과 함께 의심의 동행을 인정하며 가슴으로 믿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질문과 의심에 머무르지 말고 참된 신앙으로 도약해야 할 이유가 명백히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의심의 순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이 부르심에 응하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 신앙과 함께 의심도 동행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의심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느끼고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의심은 믿음으로 인도하는 관문입니다. 

그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의심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더 깊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끕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던 제자들도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소식을 그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증거 했을 때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24:11에 제자들은 여인들의 말을 ‘허탄한 듯이’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안 생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대하여 겸손하게 인정하면서 믿음이 커졌습니다. 의심보다 믿음이 더 커진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인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교회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어느덧 신앙은 사라지고 종교만 남기 쉽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사라지고 종교적 이데올로기만 자기를 붙드는 것은 보게 됩니다. 

지금도 예수님보다 기독교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행사에 참여하여 드러내는 것을 교회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신념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종교는 이론이지만 신앙은 가슴의 고백입니다. 믿음이란 자기 생각과 환상의 고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절반 신앙과 절반 불신앙 사이에서 결단하십시오. 

이제 절반의 신앙과 절반의 의심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으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다 알 수는 없지만, 여전히 많은 의심과 질문이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하겠다고 결단하십시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즐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무신론자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우리들 안에 있는 무신론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선포하겠습니까? 오늘 저마다 자기 안의 무신론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 안의 의심과 교만함에 무너지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선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무신론에게, 우리 안에 교만한 의심에게 선포합니다. 우리를 무너뜨리고 결박하려하는 모든 교만한 의심은 물러나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과 겸손함과 믿음의 선포가 가득하도록 우리를 충만케 하옵소서. 믿음으로 무신론을 타파하게 하시며,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예수 그리스도가 왜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기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를 확인하고 매 순간마다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