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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안식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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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안식 (마 11:28~30)
  

여러분, 혹시 이런 생각 안 해 보셨습니까? “에이, 일 더미에서 벗어나 어디 가서 한 달쯤 푹 쉬고 싶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 피곤해!” 그래서 약국에서는 피로회복제가 제일 잘 팔리고, 동네마다 사우나와 찜질방이 성업 중입니다. 

요즘 휴가철인데 많은 분들이 도심을 탈출하고 있습니다. 또 주말에는 레저를 즐기는 분들도 많습니다. 모두 다 좋은 일입니다. 쉼이 없는 인생은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위험합니다. 인간은 중간 중간 쉬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쉬어 봐도 그때뿐이지 피로감이 말끔하게 해소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심한 경우 휴가를 보내고 와서 오히려 더 피곤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 피곤해!” 이 말을 달고 삽니다. 

이처럼 만성피로감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참된 안식’입니다. 휴식을 취할 때 잠시 느끼는 일시적인 안식이 아니라, 일관된 삶의 방식 즉 라이프스타일로서의 참된 안식이 필요합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가 바로 그겁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말씀을 상고하면서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안식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안식을 상실한 인간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자주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정말 귀하고 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 ‘안식을 상실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28절 첫 머리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 ” 

모든 인생이 이렇다는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광경이 있습니다. 요즘에는 볼 수 없는 모습이지만, 옛날 연탄 때던 시절 연탄 배달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마 어린 시절 마음속에 또렷하게 새겨진 기억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한번은 리어카에 잔뜩 싣고 땀을 뻘뻘 흘리며 언덕배기를 올라가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짠했는지 모릅니다. 인생이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모든 인간이 모양은 다르지만, 다 힘들게 살아갑니다. 이런 저런 수고를 합니다. 무거운 인생의 짐들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측은함을 느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그런데 본래부터 인간이 이렇게 고달프게 살도록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는 그와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안식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평안과 기쁨이 가득한 인생이었습니다. 

창2:3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6일 동안 창조를 마치신 후 하나님이 7일째 안식하셨습니다. 인식일의 기원입니다. 

안식일은 복된 날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이 창조된 후 맞이한 첫 날이 안식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이 무엇입니까? 참된 안식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마치 엄마 품 안에서 아기가 최상의 평안을 누리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창세가 3장 보면,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맙니다. 선악과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 관계의 증표입니다. 마치 약혼반지와 같은 겁니다. 약혼반지를 팔아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파혼되는 것이죠.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죄입니다. 도둑질하고 거짓말 하고 살인을 하는 것도 죄이지만, 그 이전에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이 인생의 주인 되고자 하는 마음 상태가 근본적인 죄입니다. 이러한 죄로 인해 인간에게 주어진 참된 안식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창3:16 이하를 보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주신 말이 나옵니다. 창3:16~17, 19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19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을 떠나 죄인에게는 기쁨이어야 할 해산이 고통이 되고, 기쁨이어야 할 노동이 고통이 되고,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우리 인생을 가리켜 뭐라고 표현합니까? 시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이런 인생이기에 인간은 안식을 상실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갑니다. 

당연히 여기서 탈출해 보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육신의 휴식을 취합니다. 꼭 필요한 것이죠. 인간의 육신은 하루 쉬고 6일 일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쉬어 줘야 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휴식만으로는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런가요? 인간은 육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이 생명의 근원입니다. 육체가 아무리 좋은 환경과 조건 가운데 있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 할지라도 참된 인식이 없으면 늘 곤고합니다. 마음에 불안, 초조, 갈등, 공허가 자리 잡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치를 모르고 자꾸 육신의 만족만을 추구합니다. 끝없이 좋은 환경만 만들려고 하고, 세상의 향락거리만 추구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리만치 참된 안식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는 게 바로 이겁니다. 육신의 편리함과 영혼의 안식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만족해야 하는데 불만족합니다. 분명히 평안해야 되는데 불안합니다. 분명히 기뻐해야 되는데, 공허합니다. 
  

[2] 안식에의 초대 : 내게로 오라, 나의 멍에를 메라   

이처럼 참된 안식을 모르고 방황하는 인생들에게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초청하십니다. 참된 안식의 비결을 설파하십니다. 예수님이 안내하는 안식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① 내게로 오라 :  

28절을 다시 보시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무조건 예수님께 나아오라는 겁니다. 그러면 참된 안식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이 왜 상실되었습니까?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겁니다. 거기에 참된 안식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의로우신 분입니다. 죄인은 감히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마치 태양을 맨눈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가까이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난 수요일 무슨 일이 있었죠? 개기일식이 있었습니다. 달이 태양을 가려서 빛이 약해졌습니다. 그런데 방송에서 뭐라고 안내했습니까? 아무리 빛이 약해져도 맨 눈으로 보면 눈이 상할 수 있으니까 필름을 대고 보든지 선글라스를 끼고 보라고 했습니다. 태양 빛은 너무 강해서 반드시 필터를 통해서 봐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겁니다. 그러니까 중보자의 역할을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사53:4 보면, 성탄 7백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 ” 예수님께서 오셔서 모든 인간의 죄와 허물, 그리고 죄로 인한 모든 질고와 고통을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실 것은 예언한 말씀입니다. 또 요1:29을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증거한 말씀이 나옵니다. “ ...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구약 시대에 무흠한 짐승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것처럼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는 분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록막혀 있는 죄의 장벽이 무너집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던 인간이 이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영혼에 하나님으로부터 참 평안이 흘러내립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평안은 세상의 외적인 환경인 조건으로 잠시 누리는 세상의 즐거움과 다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과학자요, 철학자요, 무엇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던 파스칼(B. Pascal)이 한 말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공백이 있다. 이것은 어떤 피조물로도 채워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채워질 수 있다.”

그렇습니다! 오직 십자가 앞에 나아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참된 안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텅빈 영혼을 천국의 평안과 기쁨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때 세계를 제패했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패전한 후 세인트 헤레나 섬에 유배됩니다. 인생무상이죠. 기자들이 그를 만나려고 했지만 거부합니다. 그런데 한 기자가 어렵사리 그를 만났습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지나온 생애 가운데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그는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였습니다. 잠시 전투가 그친 어느 주일 아침이었는데, 산 아래 조그만 교회에서 종소리가 울려왔습니다. 그 소리에 이끌려 교회당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흐르며 최고의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의 축복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영혼의 안식은 더 나아가 육신의 건강과도 상관이 있습니다.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 등 3개 대학에서 공동으로 ‘신앙생활과 수명의 상관성’에 관해 연구한 자료가 있습니다. 9년에 걸쳐 2만 2천 명을 대상으로 연구했습니다. 그랬더니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이 불신자보다 수명이 7년쯤 길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82세 對 75세) 마음의 평안이 육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겁니다. 실제로 현대인의 질병 가운데 상당수가 마음에 의해 생기는 질병은 ‘심인성 신체질환’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은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오죠.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품을 떠나 세상에 나가 마음대로 삽니다. 그러나 결과는 돼지우릿간에서 쥐엄열매도 못 먹는 비참한 신세였습니니다. 탕자는 비로소 아버지 집이 최고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돌아갑니다. 그때 아버지가 뛰어와서 안아줍니다. 그 즉시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과거도 묻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 품 안에 안기면 참 안식을 얻고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탕’ 중에 최고로 좋은 ‘탕’은 ‘돌탕’(돌아온 탕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 품으로 나아오십시오! 아버지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참 평안과 안식을 맛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나의 멍에를 메라 :  

29절~30절을 보시죠.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갈5:1,13 참조)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멍에는 짐승(소)이 짐을 끌도록 목과 어깨 부분에 걸쳐놓는 고리 모양의 나무 기구입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의 멍에는 아주 특이했다고 합니다. 두 마리(어미와 새끼)가 함께 머리를 넣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둘 중의 하나(어미)가 리더십을 가지고 끌어가면 다른 하나(새끼)는 보조를 맞추어 잘 따라갑니다. 

그런데 멍에는 그 자체가 속박의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얼른 생각하면 이게 무슨 안식의 방법인가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30절 보면,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는 쉽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쉽다’는 말은 ‘편하다’(fitting well)는 뜻입니다. 옷이 몸에 딱 맞는 것처럼 멍에가 딱 맞아서 아주 편하다는 겁니다. 또 ‘짐이 가볍다’는 말은 어미 소가 리드할 테니까 새끼소는 멍에를 메더라도 짐의 무게를 거의 느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멍에 때문에 힘들고 어려울 것 같은데 실제로는 오히려 더 쉽고 편하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식에 대해 오해하는 바가 있습니다. 안식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위도식 내지는 무활동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런 게 아닙니다. 안식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주어지는 영혼의 평안과 기쁨입니다. 육신의 휴식을 취하든 활동을 하든 어느 경우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한다면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머에를 메는 게 어떤 것들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두 가지를 살펴봅니다. 

i) 말씀 순종 : 예수님의 말씀은 속박이 아닙니다.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말씀을 지키는 것은 부담으로 생각하고, 죄악 세상에서 그렇게 살면 손해보고 뒤처질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의 범위에서 나가지 않고 그 안에서 살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오히려 말씀을 벗어나 사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요 자살 행위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사는것은 결코 어렵거나 괴로운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도로를 조행할 때 차선을 생각해 보십시오. 차선이 불편합니까? 부담스럽습니까? 차선을 우리를 보호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런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눅9:23 “ ...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와 제자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까? 자기 부인(Self-denial)이란 자기 뜻을 포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인생에 대한 주권을 하나님께 양도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님의 뜻을 존중하고 순종하며 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멘 자로서 예수님의 인도하는 대로 따라 가라는 겁니다. 그러면 아주 평안합니다. 범사가 형통합니다. 이 비결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ii) 사명 헌신 :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게 우리 인생의 목적과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살아갈 때 가장 기쁘고 보람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죠. “이 짐을 지는 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날을 수 있는 날개가 된다.”(聖 어거스틴)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십자가는 무거운 게 아니라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대로 사명을 수행하면 기쁨이 충만합니다. 교회 봉사, 복음 전도, 직업의 소명 등을 감당하면서 기쁨과 보람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최근 신조어가 있죠. ‘볼런테인먼트’(Voluntainment) 즉 ‘놀이로서의 봉사’라는 단어입니다. 자원봉사자(Volunteer)라는 놀이(Entertainment)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봉사하는 게 힘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기쁘고 보람이 있다는 겁니다. 스포츠를 하면 땀이 나고 숨이 차지만 재미있어서 자꾸 하는 것처럼 봉사도 그렇다는 겁니다. 

성도들의 경우 주일 봉사, 전도 활동, 국내단기선교, 해외단기 선교 등 모든 봉사가 힘든 것 같은 데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러니까 하지, 월급 준다고 하겠습니까?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직분이 부담 같은데, 감당하다 보면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일상 속에서 직업 활동이나 가정 일, 학업도 마찬가지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셨다는 사명감을 갖고 하면 기쁜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예수님의 멍에로 여기고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3] 영원한 안식처 : 천국   

세상에서 우리가 주님의 품 안에 살면 안식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안식은 없습니다. 오직 완전하고 영원한 안식은 저 천국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되, 다른 한편으로는 항상 천국을 소망해야 합니다.

계14:13 보면, 천국은 안식이 가득한 곳입니다. “ ...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 ” 세상의 모든 수고를 그치게 됩니다. 계22:1~2 보면, 천국은 복락이 가득한 곳입니다.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 ” 우리는 장차 천국에 들어가 완전한 안식과 복락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남해안에 기도하며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는데, 바다 저 멀리에서 배 한 척이 다가옵니다. 모터 소리와 파도 소리를 크게 내면서 열심히 달려옵니다. 그런데 포구에 들어오면서 모터도 끄고 파도 소리도 잦아들면서 마치 엄마 품 안에 안기듯 배가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평안하게 보이던지!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 모습이 저렇겠구나.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다가 하나님 아버지 품에 평안히 안기겠구나!”  

여러분! 우리가 곤고한 세상에서 고달픈 인생을 살지만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고,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도 천국의 안식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부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며 살다가, 장차 영원한 안식처에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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