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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리아산의 하나님 (창 2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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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아산의 하나님 (창 22:1~19)
  

지금부터 오백여 년 전인 1505년 7월 17일, 나이 22세의 한 청년이 수도사가 되기 위해 머리를 깎고 있었습니다. 그가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불과 보름 전인 7월 2일이었습니다. 에어푸르트 대학의 학생이던 그는 부모님을 만나고 학교로 돌아오던 길에 벼락을 맞아 땅바닥에 나뒹굴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그를 짓눌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 분노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거룩한 분의 분노> 앞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살려면 수도사가 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곳은 어거스틴파 개혁수도원이었습니다. 원장은 그에게 수도 생활의 고달픔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그대는 앞으로 자신을 부정해야 하며, 음식도 변변치 못하고, 육신을 죽이고, 가난의 치욕을 겪어야 하며, 구걸의 수치를 맛보아야 하고, 지겹게 갇혀 사는 생활을 해야 한다....이 모든 짐을 마다하지 않고 짊어지겠는가?> 그는 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간의 허약한 체질이 허용하는 한 따르겠습니다.> 모든 예식이 끝난 후 원장은 그에게 권면을 했습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시작하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견디는 자니라> 그 날부터 그는 끝까지 견디기 위한 혹독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이 겁에 질린 햇병아리 수도사의 이름은 나중에 전 세계를 울린 <마틴 루터>였습니다. 

수도사가 된 후 그는 날마다 자신의 죄를 고해했습니다. 털끝 만한 죄라도 남기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무려 여섯 시간 동안이나 연속해서 고해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고해를 받던 신부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를 정도였습니다. 그는 아무리 철저히 회개를 해도 아직 고백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을까 불안해했습니다. 이게 수도사 시절의 루터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설 때 루터처럼 두려움으로 떱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뿔 달린 괴물처럼 무섭게 느껴집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신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신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물을 드렸습니다. 제물도 짐승 제물, 곡식 제물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극치는 사람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제물로 바쳐서라도 신의 진노를 면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인신 제사는 여러 곳에서 보여집니다. 예를 들면 아메리카의 마야 문명이나 잉카 문명을 일군 사람들이 인신 제사를 드렸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도 인신 제사가 있었다는 흔적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에도 그 내용이 나옵니다. 남 왕국 유다 왕 아하스도 그렇게 했었습니다. 열왕기하 16장 2-3절을 보면 <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라고 했는데,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한다>는 게 인신 제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신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신은 어떤 신일까요? 그 신은 한 마디로 무서운 존재입니다. 그들은 신에게 잘못 보이면 큰 일 난다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해 신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신을 향한 이런 성향이 오늘날은 없을까요? 저는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그럴 때가 종종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어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알기나 해? 하나님께 충성해. 무조건 시키시는 대로 해. 잘 보여야 돼. 잘못하면 죽는 수가 있어.> 그러면서 충성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듣는 사람이 사업이 망해가거나 암 판정이라도 받은 사람이라면 등골이 오싹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을 잘 들은 대표적 모델로 흔히 아브라함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잘 순종해서 칭찬과 복을 받은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삶으로 보여준 믿음의 원조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바로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2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들을 드리라니! 여러분, 이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자녀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아내의 몸종인 하갈을 첩으로 들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다가 무려 그의 나이가 백 살이나 되었을 때, 기적적으로 아내 사라가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러니 이삭이 얼마나 귀한 아들입니까?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귀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아들을 제물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몹시 잔인한 분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요구를 받은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우리의 기가 질리게 만듭니다. 그는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2절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다음에 무슨 내용이 나와야 할까요? 우리 생각엔 <아브라함이 그 날부터 잠을 자지 못했다. 그는 곡기를 끊고 엎드려 제발 이 일만은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차라리 아비인 자신이 죽겠다고 했다. 그 날부터 그의 집은 초상집처럼 되었다......> 뭐 이런 내용이 나와야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 3절에 무슨 내용이 나옵니까?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루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고뇌했다, 슬퍼했다>, 이런 내용을 단 한 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무슨 소풍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출발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목석입니까? 아브라함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와 세포 구조까지도 다른 사람인가요?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할 말을 잃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이런 설교를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해야 합니다. 아들이라도 드려야 합니다. 목숨을 내 걸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아멘,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도 오늘 집에 돌아가서 아들이라도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십니까? 저는 아직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이런 게 신앙이라면 나는 자신 없어! 난 못해. 난 이 테스트를 통과할 자신이 없어. 제발 저에게는 그런 요구는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이게 우리들의 반응입니다. 그래서 오늘 많은 교우들의 하나님께 대하여 많은 두려움과 부담감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에 기쁨이 없습니다. 겁에 질린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 같다, 전도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 같다. 헌금을 드리지 않으면 벌을 받으면 어떻게 하지?>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 하나님을 이렇게 믿는다면 정말 우리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새로운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아들을 내 놓으라. 난 너희의 슬픔 따위엔 관심 없다.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일까요? 그래서 마치 계엄령을 선포해서 꼼짝도 못하게 억압하는 폭군처럼 하나님 당신을 무섭게 보이고자 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적 메시지는 <아들을 바치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아들에게 손을 대지 말라>는 데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손도 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하는 기본적인 신 인식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죽이게 하는 분입니까? 그래서 그 아버지까지도 슬픔 중에 죽게 하는 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리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살리시고, 그 아버지까지도 기쁨으로 웃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삭 대신 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할렐루야!

그 날 아브라함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아브라함은 그 날 모리아 산에서 너무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그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16-18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그 날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우리가 아브라함이 만난 <모리아 산의 하나님>을 만나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아들이라도 드리지 않으면 벌을 받지나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겁에 질려 떨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신앙 생활이 두려움이 아닌 기쁨과 감사로 넘치길 기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무도 좋으신 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렸나요? 아무 것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들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양을 드렸는데, 그 양도 아브라함의 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양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도 손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만을 위해 양을 준비하신 게 아닙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도 양을 준비하신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우리 죄를 갚아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죽음의 제단에 올라가고자 할 때, 이미 우리 보다 한 걸음 먼저 그 죽음의 제단에 오르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다름 아닌 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도록 미리 준비된 양 같은 분입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을 보면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 그리고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으러 오신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어린양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이 아니라, 그 사랑의 품으로 달려가 안겨야 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게 바로 복음이며, 성경 전체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당신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 품안에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루터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면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의 인간적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절벽 앞에 선 사람처럼 절망할 무렵,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가르치기 위해 시편과 로마서, 히브리서, 갈라디아서 등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루터의 눈을 여셨습니다. 그는 말씀을 통해 자기 생각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만난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 아닌, 사랑의 아버지이셨습니다. 그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수도원 방식의 몸부림치는 고행을 통해서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구원은 사람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 하나님의 의를 통해 얻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진리를 깨달은 순간에 느낀 기쁨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나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이른 기분이었다!> 

여러분, 이게 바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제 힘으로는 안 됩니다. 제 노력으로는 하나님 당신의 기분을 충족시켜 드리려고 애썼지만, 저는 당신의 분노를 잠재울 수도 없고, 만족시켜 드릴 수가 없습니다. 죽이든 살리든 저는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라고 하면서 그 앞에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분은 당장 우리는 치실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왜 이제야 내게로 오느냐? 난 오래 전부터 널 기다렸다. 이리 오너라. 그냥 오너라. 내 품에 안겨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란 그 하나님께 우리의 무능함을 고백하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 안에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그러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군요. 그 분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제 우리는 응석받이 아이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핑계하면서 우리 마음대로 살고, 못되게 굴어도 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단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매를 맞을까 겁이 나서, 공포에 떨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음을 기뻐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다시 한 번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드리러 가면서 조금도 고민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 것은 그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도 인간적으로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으로, 아들을 드리지 않으면 벌을 주실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으실 거야. 단지 내가 그 계획을 모를 뿐이지. 백 살에 기적적으로 아들을 낳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죽이실 리가 있나? 죽인다 해도 다시 살리실 거야! 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 그리고 지금까지 내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가? 내가 그 분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말이 안 되지. 하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게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7절 이하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칭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모리아 산으로 가는 아브라함의 발걸음은 공포와 슬픔의 발걸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신뢰와 기쁨의 발걸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길 원합니다. 우리를 위해 아들 예수님까지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감사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고백하길 원합니다. <하나님, 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제 소중한 것을 드리겠습니다. 저를 받아 주옵소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잘 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뇌물이 아니라, 감사하여 드리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 때 우리 마음에 기쁨이 있고, 이게 바로 행복한 신앙 생활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성경 구절 하나를 읽어드립니다. 스바냐서 3장 17절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지 보십시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이 사랑많고 좋으신 하나님을 활짝 웃는 얼굴로 바라보시면서 기쁨으로 섬기시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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