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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안에서 자라나라 (엡 4: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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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안에서 자라나라 (엡 4:13~16)
  

새 가족으로 등록한 성도의 집에 심방을 갔다. 예배를 마친 후 그의 가정을 둘러보니 벽에는 자녀가 자라는 모습을 도표로 그린 그림이 붙어 있었다. 아이들이 지난 달과 금번 달에 얼마나 자랐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래프를 그려 놓았다. 나는 그 막대 그래프를 보면서 ‘아이가 성장하지 않고 자라지 않는다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걱정이 될까’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반면 쑥쑥 잘 자란다면 부모의 마음이 정말 행복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성장이 멈춰있지 않고 계속 자라나야 한다. 교회의 지체된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도 계속 자라나면 주님은 기뻐하신다. 그래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에게까지 자라나야 한다. 여기서 ‘그에게까지’란 성도들의 성장의 크기이다. 오직 예수가 우리가 닮아가야 할 본보기이고 성장의 모델이 됨을 의미한다. ‘그에게까지’란 예수의 성품, 예수의 사역, 예수의 권세, 예수의 아들됨, 예수에 대하여 드러난 모든 것을 닮아가는 자라남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예수는 사람으로 오셨다. 사람으로 오셔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를 이루고 생명을 가져오신 참 사랑의 모습을 내가 본받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다가가는 것이다. 온전한 사람으로서 성장하고 또 성숙하여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예수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신앙 생활은 그런 의미에서 성숙해 가기이다. 하나님께 거역하며 죄인된 내가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후 계속해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처럼 순종하며 살아가기 위한 과정이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들은 항상 자라나야 한다. 자라나고 자라나는 과정에 핑계대서는 안된다.
  

1. 자라나는 것은 성경의 법칙이다. (눅2:52)

성경은 예수님이 자라나는 것을 보여주신다. 
눅2: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유년 시절 예수는 모든 면에서 자라나셨다. 키가 자라는 것은 성장의 모델이다. 지혜가 자라는 것은 성숙의 모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장하고 성숙해야 하는 것은 성경의 법칙이다. 그 예수님은 마13:31에서 겨자씨의 비유로 천국을 설명하셨다. 씨 중에 가장 작은 씨인 겨자씨라도 심겨지면 자라나고 자라난 후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새 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는 것에 대해 언급하셨다. 즉, 천국이란 자라나는 것이고 확장되어 가는 속성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라나는 것은 땅의 법칙만이 아니고 하늘의 법칙이다. 성경의 법칙이다. 성령은 생명의 원리를 알기에 명령한다. 생명은 자라는 것이다. 교회와 천국은 예수를 지닌 자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반드시 자라나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2. 자라나는 것은 어린 아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엡4:14上)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라고 하였다. 어린 아이 같은 신앙, 아이 신앙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머리 되신 주님이 맡기신 미션을 감당할 수 없다. 자라나야 나름대로 성도의 구실을 한다. 자라나지 못한 어린 아이 신앙은 불평하는 신앙이다. 트집 잡는 신앙이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못하는 신앙이다. 

어린 아이 신앙은 항상 100점이라는 칭찬을 요구한다. 히5:12을 보면 자라나지 못한 아이 신앙은 항상 누구에게 이끌려야 하는 모습이다. 말씀도 항상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단단한 음식은 먹지 못하고 젖을 먹어야 한다. 쓰고 질겨서 소화 시키기 어려운 말씀에는 등을 돌린다. ‘당신이 하십시오. 당신이 짊어지십시오. 당신이 섬기시오. 당신이 건축 헌금 하세요.’라며 이런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당신이 복을 받으세요. 당신이 상을 받으세요. 당신이 최고예요.’라는 말씀만 받아 먹는다. 

히5:13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라고 하였다. 우리가 자라나야 하는 것은 장성한 자가 되기 위해서다. 

히5: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성도들은 자라나야 어떤 말씀이라도 받아 먹고 선악을 분별하게 되는 것이다. 장성한 자는 드리려 한다. 섬기려 한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한다. 교회는 아이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자라나 청년의 신앙 그리고 마침내 아비의 신앙, 장성한 신앙의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이런 교회는 든든한 교회다. 
  

3. 자라나는 것은 요동하지 않기 위해서다. (엡4:14下)

요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의 속임수와 유혹을 잘 이겨낼 때이다.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이 얼마나 무서운가? 온갖 교훈의 풍조는 얼마나 세차게 믿음을 밀어내려 하는가? 신앙 생활은 온실 속에 보호 받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 생활은 격렬한 외부적 도전이 있다. 그런데 성숙한 수준으로 자라나지 않으면 요동하고 무너진다. 

여기 요동한다는 말은 밀려드는 파도에 이리 저리 흔들린다는 의미이며 새로운 돌풍에 의해 빙글 빙글 도는 팽이 같은 모습을 의미한다. 자라나지 못한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도는 팽이 같다. 변할 수 없는 확신에 서지 못하고 이런 저런 바람과 파도에 떠 밀린다. 사람이 뭐라고 얘기하는지, 뉴스가 뭐라고 얘기하는지, 서적과 잡지와 신문이 뭐라고 떠들었는지, 새로운 사조와 유행이 밀려오면 쉽게 동조하고 요동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주체성이 없다. 우리 성도들이 자라나야 하는 이유는 모든 세파에 밀려가지 않고 오히려 파도를 타고 소원의 항구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성숙한 성도가 되면 소망의 닻을 주께 내렸기에 요동할 일이 없다. 이제 자라나야 할 이유를 알았는가? 견고함을 위해서다. 나무가 요동하면 시든다. 요동하지 않도록 성장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자라날까? 엡4:15을 보면 세 가지로 자라나야 한다.
  

① 사랑 안에서 자라나라.
② 참된 생활 속에서 자라나라.
③ 협력 속에서 자라나라.

자라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공급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랑, 진실됨, 협력의 이 세 가지는 서로 관련이 있다. 사랑이 있으나 참된 진리의 삶을 견고하게 지키지 못하면 안된다. 반대로 진리를 굳게 지키고 참된 생활을 하더라도 사랑이 부족하면 안된다. 우리가 자라나기 위해서 사랑은 참된 진리를 필요로 하고 진리의 삶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지킨다고 굳게 다짐하는데 그것이 다른 이를 정죄하는 삶, 비난과 독선의 삶이 될 때가 많다. 조금만 결격 사유가 눈에 들어오면 어금니를 깨물고 주먹을 쥐고 눈에는 전쟁을 치르려는 불이 번쩍 거린다. 이는 옳으냐, 그르냐만 알았지 사랑 안에서 자라나야 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 모든 허물을 덮는 것이라고 하면서 진리를 희생시키는 실수를 저지른다.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계시의 중심도 희생시키고 믿는 소리가 어그러짐에도 괜찮다로 일관한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사랑임에도 오직 사랑을 내세우다가 그릇된 길을 고치려는 각오를 하지 않는다. 

사랑과 진리의 삶은 길이 있어야 한다. 진리는 자칫하면 딱딱한 사람을 만든다. 사랑으로 자라야 부드럽게 되고 굳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자칫하면 무르기 짝이 없는 감상적인 사람을 만든다. 진리로 강하게 무장되어야 물지 않고 제대로 된 성숙을 경험한다. 그리고 사랑과 진리의 삶으로 성숙하는 우리는 서로 연합하고 결합해야 한다. 각자 각자는 너와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속에서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한다. 독불 장군의 생활이 되어서는 안된다. 개인주의의 신앙 생활도 안된다. 온 몸의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으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몸을 자라게 한다. 협력을 소중히 여기고 협력 속에서 자라나라.

여름성경학교는 온 교회의 협력 속에 교회학교 어린이들을 자라나게 한다. 그래서 영혼의 아비 신앙으로 성장하게 된다. 엡4:11의 말씀대로 내가 사도든지, 선지자든지, 복음 전하는 자든지, 목사와 교사든지 사랑과 진리 그리고 서로 서로 협력과 도움으로 역사할 때 모두 모두 사역을 맡은 이들도 자라나게 되고 말씀을 배우는 어린이들도 자라나게 된다. 성냥갑처럼 포장된 채 각 부서마다 지체의 역할마다 단절이 되고 협력이 되지 않으면 거룩한 교회를 세우기 어렵다. 내 부서만 중요하다. 내 부서만 최고다는 오만을 버려야 한다.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를 하되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는 부서 간의 협력이 중요하다. 협력 속에서 자라나라. 그러면 머리되신 주님과 하나됨을 이루어 백전 백승한다. 영적 승리를 누린다.

이렇게 하나되어 자라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성장하는데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에 참된 생활을 유지시킨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 안에서 자라나게 한다. 성령의 은사는 한 성령으로부터 주어진 다양한 것이기에 어떤 직임을 가지고 일하더라도 하나됨을 이룬다. 성령의 기름부어주심으로 우리는 다 엡4:13의 말씀처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되게 하시는 영이다. (엡4:3)

성령은 공간을 뛰어넘어 역사하는 일치의 영이다. (사도행전 10장)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 안에서 자라나자. 참된 생활을 하며 자라나자. 각자의 협력 속에서 자라나자. 그러면 자라나고 자라므로 갓난 아기 신앙에서 어린 아이 신앙이 된다. 다시 자라나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고 청년의 신앙이 된다. 그리고 아비의 신앙이 되어 하나됨을 이룬다. 머리 되신 주님을 감동시키는 장성한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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