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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꾼 세우기 (막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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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 세우기 (막 6:1~6)


한 사람의 일꾼이 세워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가 필요할까요? 물론 본인의 수고와 준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여기에는 한 사람의 일꾼을 세워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준비되어진 것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아는 일꾼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되는 길을 구하게 될 것이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어느 세상의 일꾼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에게서 대답을 구해보죠. 
그 일꾼은 우리에게 자신의 성공은 자신에게 달렸다고 하면서 우선 그 일에 몰입하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그는 아주 성심성의껏 대답한 것입니다. 한 가지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다른 일은 제쳐두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터득한 삶의 교훈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첫 번째 자리에 두지 않고 두 번째나 세 번째 자리에 두는 사람이라면 결코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될 수 없을 것이며 모든 것을 희생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가 우리에게 해줄 말은 인내 있는 훈련과 연습일 것입니다. 

이익은 뼈를 깎는 노력에서만 얻어집니다. 우리는 올바르게 일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학습은 무지와 실수에서 시작됩니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이 세상을 솜씨 좋은 일꾼들로 채우시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던 그분이 그 자녀들에게 그분의 동역자가 되는 은혜를 더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몫이 무엇인가를 보면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이 세상을 축복하는 것이고, 그 일을 감당해야 하며 우리의 삶과 복을 발전시켜 온전케 하는 것이며 또한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일꾼으로서 항상 쉬지 않고 열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할 때만 올바르게 일할 수 있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훈련 밑에서 시작해보십시오. 그분은 우리 안에서 그분의 일을 완수하실 것이며 그분을 위한 우리의 일이 합당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일꾼을 세우기 위해서 먼저 생각할 것은 그 사람의 본질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마침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게 되었을 때 그 가르침을 듣던 많은 사람들이 듣고 놀랐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일 처음으로 이적을 행한 곳이 가나의 혼인 잔치 자리였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고향 땅에 그 소문이 가득 퍼졌을 것입니다. 그래 그들은 놀라면서도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입니다. “그게 정말이야? 정말 예수가 그런 일을 했다고?” 아마도 사람들은 믿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예수가 어떻게 살아온 지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하는 고향사람들입니다. 그들로서는 산골에서 늦도록 장가도 들지 않고 가족을 돌보면서 목수 일을 하던 예수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런 능력이 있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그 산골에 파묻혀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겠죠.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참석하시자 관례대로 예수에게 말씀을 전해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을 듣고는 정말 기절할 뻔했습니다. 

정말 지금까지 자기들이 알아왔던 그 예수가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아니 예수가 그렇게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가난 혼인 잔치의 이적도 반신반의했었는데 지금 가르치는 말씀을 들으니 정말 기가 막힙니다. 그래서 외칩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나타난 결과에는 무언가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이 알아왔던 예수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자기들도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거기다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그런 능력까지 나타내는 것을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계속해서 물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기론 특별히 공부를 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권능을 나타낼 수 있게 된 것인지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겠나? 할 수 있다면 우리도 우리 손으로 권능을 나타내는 사람이 되고 싶네. 

이렇게 근본적인 문제로 접근을 했어야 마땅합니다. 정말 그들의 말처럼 어느 날 갑자기 예수가 그런 능력자가 되었고 놀랍도록 가르치는 선생님과 같이 되었다면 거기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먼저 알아보고 함께 박수를 쳐주고 그 가르침과 권능에 합당한 자리에 예수를 세웠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 정말 누가 보아도 보잘 것 없었던 사람이 갑자기 다른 사람의 눈앞에 우뚝 서게 될 때 대개 사람들은 놀랍니다. 아니 저 사람에게 저런 점이 있어? 야 정말 대단하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저렇게 될 수 있었을까? 나도 좀 그렇게 되도록 알아보아야겠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서는 마땅한 대접을 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에는 나보다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보잘 것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다 하더라도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그 사람이 나보다 낫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지금의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을 대해주어야 합니다. 내가 앞서 갔다고 하더라도 뒷사람이 나를 앞서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마땅히 길도 비켜주어 앞서 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잘 한다고 더 힘을 실어줄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사회가 발전합니다. 그럴 때 그 누구라도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그럴 때 나도 성장합니다. 

그리고 앞서게 된 사람은 또 뒤쳐진 사람을 붙잡아 끌어주게 될 때 그게 아름다운 사회입니다. 오히려 앞섰기에 뒤쳐진 사람을 위로하고 끌어주며 더 겸손으로 섬길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아름다운 것이요 그럴 때 거기에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가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익을수록 머리를 숙이는 이삭과 같은 모습이 그래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지만 내 뒤에 있던 사람이 나보다 앞서 갈 때 그를 인정해주고 그를 섬겨주는 것은 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후배에게 배우고 자식에게 배우는 것을 그러기에 결코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될 성 싶은 나무 떡잎을 보면 안다고 그렇다면 될 성 싶은 나무가 잘 자라도록 밑거름이 되어주는 것 역시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비결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있는 모든 곳에서 이런 귀한 역사를 일구어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심으로 좋은 일꾼들을 세우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는 친밀하기에 무시가 아니라 더욱 존경해야 합니다.
흔히 누구는 내가 아주 잘 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전혀 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런 모습을 그에게서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아주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저 사람에게 저런 점이 있었던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습을 보면 이번 일도 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끼를 발견하게 될 때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합니다.

다른 건 다 못하는데도 어느 한 가지에는 특출한 재능을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흔히 저지르게 되는 잘못은 그에게 있는 그 특출한 재능까지도 다른 보편적인 모습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무시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아무개가 이 일은 잘 할 거야 하고 누가 말하면 내가 그 사람 잘 아는데 그 사람 그거 못해 그럽니다. 아니 내가 보니 잘 하던데 해도 아냐 그 사람은 그런 능력이 없어 하고 단정해 버립니다. 하지만 어떤 재능이라고 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갑작스럽게 어떤 재능을 발휘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마치 흙 속에 묻힌 진주처럼 갈고 닦아주어야 빛을 발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흙 속에 묻혀있었다고 해서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고 닦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미 찬란한 빛을 발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무시한다면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잘 나가던 사람이 어느 날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내 그럴 줄 알았어 또는 어떻게 그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 하고 무시하거나 짓밟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럴수록 더 따뜻하게 위로도 해주고 다시금 손을 잡아 일으켜줄 수 있는 그런 배려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세상에 나는 절대로 넘어지지 않을 거야 하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전혀 넘어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한 평생을 걷고 뛰던 사람도 어느 날 발을 헛딛거나 돌부리에 걸려서 툭 넘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군가는 말합니다. 나는 아주 조심성이 많아서 절대 그런 일을 없어. 한데 정말 그럴까요? 한 가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잘 모르는 사람 같으면 아주 보잘 것 없던 사람이 어느 날 재능을 발휘하고 그래서 부각이 될 때 야 정말 대단하다 하면서도 내가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일 경우에는 언제쩍 그 사람이 그랬다고 하면서 애써 부시하더란 말입니다. 

그보다는 네가 그걸 했다고 야 정말 대단하다 놀랍다 정말 잘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 봐 하면서 칭찬해주고 격려해줄 때 그 사람이 더 신이 나서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인내심이 없었는지 몰라도 어느 날 그 사람이 변해서 진득하니 참고 견딜 수도 있는 겁니다. 내가 누구를 잘 안다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을 무시해도 좋다는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더군다나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홀연히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는 것아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바꾸어주시면 바뀌지 않을 자가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그 능력으로 우리가 역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변합니다. 그 변하는 것이 긍정적으로 변하느냐 부정적으로 변하느냐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놓아야 하고 우리 주위에 그렇게 긍정적으로 변화된 사람이 있다고 할 때 내가 그 사람의 과거를 알기에 더 기뻐해주고 더 자랑스럽게 여기고 더 격려해주며 지지해주는 그런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일꾼을 세우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건 고향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선지자를 선지자로 보기 전에 먼저 고향 사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친척은 또 친척의 눈으로 보려고 하고 자기 집에서는 가족의 눈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밖에서 보는 모습과 집에서 보는 모습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밖에서는 전혀 망가진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집 안에서는 망가진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밖에서는 잘 하는데 집에서는 안 하려고 합니다. 남들보고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된다고 하면서 막상 자기는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이중 성격자라고 합니다. 더 심하게는 남들 보는데서만 그럴 듯하게 하는 사기꾼이라고도 합니다. 네가 그러면서 어떻게 지도자라고 할 수 있냐고도 합니다. 네가 그러고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냐 교회의 지도자냐 라고 몰아대기 시작하면 그만 기가 팍 죽고 맙니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봅시다. 

집 안에서는 그렇게 못하지만 나가서라도 잘 한다면 그것처럼 고마운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흔히 그런 말을 합니다. 목수의 집에 연장이 하나도 없다고요. 남의 집은 잘 고치는데 자기 집 망가진 건 손도 안 보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밖에서 못하던 일도 집에 와서는 잘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밖에서는 잘 하는데 집에만 오면 전혀 못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게 왜 그럴까요? 그건 바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때문입니다. 그런데 밖의 사람은 기대 수준이 높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감동을 합니다. 하지만 늘 그런 모습을 보아온 집에서는 다릅니다. 겨우 그까짓 거 가지고 사람들이 호들갑떤다고 합니다. 그러니 집에서는 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집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다 보면 더욱 밖으로만 나돌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는 말합니다. 악처가 있기에 그 사람이 현인이 된 거라고. 하지만 그 부인이 현모양처라면 그 사람은 더 큰 현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자녀를 양육할 때 처음부터 잘 하는 아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물론 그 아이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 방면으로 키워주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그 재능을 발견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공부도 시켜보고 저런 공부도 시켜봅니다. 그러면 조금씩 조금씩 그에 익숙해져 가면서 남보다 뛰어난 적응을 하고 재능을 보이는 방면도 있고 그렇지 못한 모습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부를 잘 못한다고 해서 포기하는 부모 있습니까? 

오히려 학원이네 과외네 뭐 하면서까지 그를 끌어주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신뢰입니다. 그도 잘 할 수 있다고 믿고 양육하는 것입니다. 한데 양육을 한다고 하면서도 그래 봤자 무슨 소용 있냐고 제는 아주 깡통이라서 별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아이가 어떻게 올바로 성장해서 좋은 일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지금은 겉돌고 보잘 것 없고 남들이 다 외면한다고 해도 끝까지 그런 아이를 믿어주고 양육해 나가면 모두가 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그런 일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그건 우리 믿음의 구주가 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먼저 그렇게 상처를 받으셨고 외면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외면당하는 아픔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능히 상처 받은 사람들을 위로하실 수 있는 것이요 그 사람을 붙들어주고 능력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제자들까지도 끝까지 붙들어주셨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금 제자리에서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패를 두려워할 이유도 없고 실패하고 잘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외면하고 비난할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 그 손을 잡아 일으켜 주고 다시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끝까지 믿어주고 함께 해 줄 때 그런 믿음의 양육이 이윽고 좋은 일꾼을 세워나가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정말 쓸 만한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한데 그런 제자들을 주님은 끝까지 믿어주셨습니다. 끝까지 그들의 손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들에게 성령을 불같이 부어주심으로 귀한 초대교회의 사역을 감당할 뿐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수고를 멈추지 않는 귀한 일꾼으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님도 고향에서 믿어주지 않고 배척만 하니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우리 자녀들, 우리 이웃들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물론 속상할 때도 있을 것이요 배가 아플 때도 있을 것이요 상처가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입장이 아닌 함께 세워져나가는 비결을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내가 마음이 아프고 실망이 되면 더 기도함으로 붙들어주고 세워나갈 때 그 사람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나도 함께 서는 것입니다. 지게 작대기가 지게에 냄새 나는 것만 가득 실렸다고 피해 버린다면 지게가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지게 작대기 없이는 지게는 그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게를 지지해주는 작대기의 역할을 우리가 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실망할 때가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거기서 찬란하게 빛나는 진주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픈 것만큼 그 아픔을 극복한 자리에는 더 찬란하고 아름다운 진주가 빛을 발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항상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우시는 그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양육함으로 좋은 일꾼들을 세우시기를 축원합니다.

수도시설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때, 날마다 동네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 와야 했던 일꾼은 아침이면 어깨에 긴 막대기를 메고 그 양쪽에 두 개의 양동이를 달고는 집을 나섰습니다.
일꾼은 하루도 빠짐없이 우물과 집을 오가며 물을 길어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들고 다니던 양동이 중 하나에 조그만 금이 갔습니다. 그 틈새로 물을 길어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조금씩 물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일꾼은 양동이에서 물이 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묵묵히 물을 길러 다닐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부턴가 그 일꾼이 오가는 길 위에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일꾼을 불러 물었습니다. 
"네가 들고 다니는 양동이에 금이 가서 물이 새는 것을 알고 있느냐? 그러면 물을 길어 나르는 것이 헛수고가 되지 않느냐."
그러자 일꾼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양동이에서 물이 조금씩 새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제가 다니는 길 한편에 꽃씨들을 뿌려 놓았지요. 혹시 길 한편으로 예쁜 꽃들이 피어 있는 것을 못 보셨나요?"
그는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는 동안 틈이 난 양동이에서 저절로 물을 조금씩 뿌려 주어 예쁜 꽃들이 자랐습니다. 그 꽃들과 이야기하면서 다니면 힘든 줄도 모른답니다."
이런 여유가 우리들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가깝기에 더욱 그를 붙들어주고 속상할수록 더 그 손을 잡아줄 수 있을 때 나도 온전한 일꾼으로 서게 되고 내가 실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도 좋은 일꾼으로 세워지게 됩니다. 누구보다도 가깝고 그래서 그 사람의 약점을 잘 아는 입장에서 그를 감싸주고 좋은 점만 드러날 수 있도록 힘이 되어준다면 그 사람은 펄펄 뛰며 귀한 일꾼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꾼이 없다고 할 것이 아니라 일꾼을 세우지 못했다는 것을 이 시간 먼저 생각하며 우리 주위에 이 사람은 아냐 싶은 그 사람까지도 좋은 일꾼으로 세워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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