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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래도 나는 씨를 뿌린다 (눅 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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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씨를 뿌린다 (눅 8:4~8)


[무리가 많이 모여들고, 각 고을에서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오니, 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니,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쪼아 먹기도 하였다. 또 더러는 돌짝밭에 떨어지니, 싹이 돋아났다가 물기가 없어서 말라 버렸다. 또 더러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지니,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서, 그 기운을 막았다. 그런데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자라나,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 아, 답답한 세상
소서 대서가 다 지나 삼복더위 한복판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아침저녁에는 선선합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마치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처럼 무겁습니다. 그 마음 하나 부려 놓을 데 없어 전전긍긍하는 나날입니다. 민의를 반영해야 하는 국회에서는 활극이 벌어지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직감하는 이들은 거리에서 밤을 밝힙니다. 하루라도 마음 편한 날이 없습니다. 

급할 것도 없는 미디어법을 여당이 그렇게도 무리한 방식으로 밀어붙여야 할 까닭이 있었는지 사람들은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그 절차가 적법했는지는 전문가들이 따져볼 문제이지만, 방송에 대기업이나 신문이 참여할 길이 열린다면 미디어의 공적 기능이 약화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영상이 돈벌이나 자기들의 이념을 전파하는 도구가 된다면 우리 사회의 도덕적, 문화적, 영적 수준은 지금보다 훨씬 더 천박하게 변하게 될 겁니다. 

먹는 음식이 곧 그 사람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날마다 접하는 정보는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잣대가 됩니다. 현실은 복잡다기합니다. 그렇기에 다양한 관점들이 필요합니다. 나의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다른 이의 자리에 서면 보이는 게 있습니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視差’(parallax)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시차를 인정할 때 우리는 서로를 통해 세상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미디어법이 우려를 자아내는 것은 미디어가 시장 논리에 내맡겨질 때 하나의 관점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마음이 심란한 이들을 보면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이구나 새삼스럽게 느낍니다. 자연은 말없이 제 몫의 생명을 살아낼 뿐인데, 사람들은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생명의 실상을 알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따뜻한 노래가 따뜻한 세상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이 시대의 노랫꾼 홍순관은 피고 지고를 반복하는 꽃들에 눈길을 던집니다. 

“저만치 핀 꽃/피고 지고 피고 지고/저 혼자 세월을 삽니다.//눈에 띄는 꽃들은 이내 꺾여 짧은 생을 마감하지만/저만치 피는 꽃은 오랜 세월//산을 들판을 세상을 숨 쉬게 합니다.”(<<네가 걸으면 하나님도 걸어>> 중에서)

꽃들은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저 혼자 세월을 삽니다. 때가 되면 피어나고, 또 때가 되면 질뿐입니다. 억지가 없습니다. 무심히 피었다 지는 꽃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산을, 들판을, 세상을 숨 쉬게 합니다. 놀라운 발상의 전환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무위지위無爲之爲, 즉 함이 없는 함이라 합니다. 이런 시를 읽고 나면 상처입고, 오그라들고, 은결든 마음이 조금은 펴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사람이 망쳐놓은 세상 질서를 하나님은 바로잡아 가십니다. 우리의 희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 로마의 복음 vs. 예수의 복음
1942년 25세의 청년 시인 윤동주는 일제의 억압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스스로를 곧추세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쉽게 쓰여진 詩>>)에게 손을 내민다고 노래합니다. 

좋은 세상은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 등불 하나를 밝히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 울면서라도 생명과 평화의 씨를 뿌리는 사람을 통해 옵니다. 예수님은 식민지 백성이 되어 살아가는 동족들에게 이런 꿈을 심어주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삶에 지치고, 시대에 치인 사람들에게 다가가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아주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마4:23)

이 말씀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이런 일을 하고 계십니다. 무지하기에 가르쳐 깨닫게 하시고, 주저하기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여 결단을 독려하시고, 약하기에 고쳐 주시고 온전케 해주십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그 시절, 사람들은 로마의 평화(Pax Romana)에 기만당했고, 로마의 복음(Roman Euggelia)에 현혹당했습니다. 로마는 두 얼굴을 가지고 식민지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한 얼굴은 가공할 군사력입니다. 누구도 로마의 압도적인 무력에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한 얼굴은 자애로운 얼굴입니다. 로마는 평화를 지키고, 무질서한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고, 사회의 기반시설을 건설하는 세력이라는 환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습니다. 

로마는 여신으로 숭상되기도 했는데, 사람들은 로마를 아마조네스 전사의 모습으로 형상화했습니다. 그가 머리에 쓴 투구와 손에 든 무기는 로마의 군사력을 상징하고, 드러낸 한쪽 젖가슴은 자비롭게 먹이는 어머니 혹은 그 매력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강력한 로마는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매혹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John Dominic Crossan and Jonathan L. Reed, <>, HarperOne, 2004, pp. 58-59 참조) 

하지만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그들은 성전세․십일조․첫 열매 제물과 같은 ‘종교세’와, 조공․토지세․인두세와 같은 직접세, 소금세․판매세 등의 간접세, 각종 관세, 각종 수수료와 강제 부역에 시달렸습니다. 그 체제 아래서는 조상으로부터 땅을 물려받은 사람들조차 소농, 소작인, 상인, 날품팔이, 어부, 목자, 과부, 고아, 창녀, 거지, 강도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 가장 빈곤한 사람들의 운명에 동참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건 대단한 결단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세상은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변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통해서 열린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것을 지키기에 급급하지만, 주변부로 내몰린 사람들은 다른 세상을 모색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돌아보면 그들도 중심에 편입되기를 꿈꿀 때가 많습니다. 주님은 그들 속에 들어가 중심과 주변의 구별이 무너진 세계, 모두가 서로를 귀히 여기고 존중하는 세계, 지배가 아니라 섬김과 돌봄이 소중히 여겨지는 세상의 꿈을 심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꿈은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이지는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슬그머니 이 꿈으로부터 돌아서곤 합니다. 이 꿈 하나 품고 살던 이들은 이런 현실의 난관 앞에서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 가운데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늘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 허비된 씨앗
한 농부가 들판에 나가 씨앗을 뿌립니다. 그는 벌써 바람에 몸을 뒤채는 밀 이삭을 머리에 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늘 기대에 못 미치게 마련입니다. 농부가 뿌린 씨는 길가에도 떨어지고, 돌짝밭에도 떨어지고, 가시덤불에도 떨어집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날아와 얼른 쪼아먹고, 돌짝밭에 떨어진 씨는 기껏 싹이 나도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없어 뜨거운 햇살에 그만 타버리고 맙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도 어렵게 싹을 틔우지만 가시나무의 기운에 막혀 자라지 못합니다. 복음서의 기자들도 자기들 나름의 해석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그 뒤에 악마가 와서 그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므로, 믿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된 사람입니다. 도시의 분잡紛雜 속에 사는 동안 우리 마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스팔트 바닥처럼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이런저런 사람들과 만나 복닥거리며 살다보니 자꾸 상처를 받게 되고, 더 이상 상처를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을 닫고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갑각류처럼 자기 속에 갇혀 사는 이들은 새로운 삶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지 못합니다. 길가에 떨어졌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을 뜻하는 것일 겁니다.

돌짝밭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잘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열정적이고 헌신적입니다. 그들의 존재는 도드라집니다. 문제는 지속성입니다. 그런 열정은 지속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들은 제풀에 지치거나, 작은 장애물을 만나면 마치 짚불이 사그라들듯 열정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열정을 잃는 순간 그는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전가시키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분란을 일으킵니다. 깊은 신앙은 과도한 열정을 경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밭에서 돌 하나하나를 골라내는 농부처럼 꾸준해야 합니다. 

누가는 가시덤불에 떨어졌다는 것을 말씀을 들었으나 살아가는 동안에 근심과 재물과 인생의 향락에 사로잡혀서 열매를 맺는 데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들은 존 웨슬리 목사가 말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입니다. 그들도 하나님께 봉사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을 피하려고 애쓰고 깨끗한 양심을 간직하려고 노력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행을 하려고도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이 닥치면 그는 얼른 신앙적 태도를 거두어들이고 맙니다. 웨슬리 목사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의 마음에 부어지고 퍼져 있습니까? 당신은 ‘나의 하나님, 나의 전부’라고 외칠 수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으로 행복합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 환희, 기쁨의 면류관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한 계명이 당신의 마음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합니까? 그뿐 아니라 당신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당신의 죄를 거두어서 그것을 바다 깊숙이 돌처럼 던져 버리신 것을 믿습니까?”(웨슬리 설교전집1‖ 설교2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44-45쪽) 

이 물음 앞에 설 때마다 부끄럽습니다. 아직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입니다. 부끄럽지만 이게 우리의 실상입니다. 하지만 실상에 대한 자각은 새로운 삶을 향한 결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웨슬리 목사가 말하는 그런 믿음을 지향하고, 또 구해야 합니다. 

• 흰눈썹뜸부기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자기 마음을 살피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겪어야 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마음이 길가와 같았던 사람들, 돌짝밭 같았던 사람들, 가시덤불과 같았던 사람들…. 허탈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 주님의 말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씨앗들이 많이 허비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진 것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는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굳게 간직하여 견디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 사람들”(15)이라는 해석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들은 흙이 그 부드러운 가슴으로 씨앗을 품듯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존재의 깊은 곳에 받아들여 그것을 자기 삶 속에서 구현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통해 변화된 한 사람은 그의 주변으로부터 시작해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것이 바로 백배의 결실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정신으로 다가가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과 세상으로 인해 실망하는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6:9)

언제부터인가 이 말씀이 제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오늘 내가 뿌리는 복음의 씨가 살아있다면 때가 되면 반드시 결실을 거둘 것임을 알기에 나는 조급해하지 않습니다. 

일본의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1935~ )는 노벨 문학상 수상 강연에서 자기 가정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가정을 꾸린 후 태어난 첫 아이는 지적 발달 장애아였습니다. 오에는 그 아이에게 ‘빛’이라는 뜻의 히카리(光)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어릴 때 그 아이는 들새가 지저귀는 소리에만 반응을 보이고, 사람의 음성나 말에는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여섯 살 나던 해, 여름을 보내려고 찾아간 산간 마을 통나무집에서 숲 건너편 호수로부터 들려온 흰눈썹뜸부기 한 쌍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들새 울음을 녹음한 레코드 해설자의 악센트로 “흰눈썹뜸부기, 예요”라고 한 말이, 히카리가 처음 입 밖에 낸 인간의 언어였다고 합니다. 그것을 계기로 그 아이와 부모는 언어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카리는 지금 장애인을 위한 복지작업소에서 일하며 작곡을 하고 있습니다.(오르한 파묵 외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10인 지음, <<아버지의 여행가방>>, 문학동네, 2009, 211-212쪽)

씨앗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제 아무리 곤고하고, 역사가 제 아무리 척박해도 모든 사람들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고,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하며 살기를 바라는 주님의 꿈은 그저 스러질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외치는 음성이 메아리조차 없이 흩어지는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길 힘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늘은 때때로 폭우를 쏟아 가던 길을 멈추게 하기도 하고 다리를 끊어 되돌아가게도 합니다. 그래도 나는 씨를 뿌리렵니다. 지향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견뎌낼 수 있습니다. 압도적인 힘으로 세상을 호령했던 로마 제국은 사라졌지만, 사랑의 힘으로 폭력에 맞섰던 예수의 꿈은 여전히 스러지지 않았습니다. 박기호 신부님은 “해가 넘어가 버린 땅에서 서산만 바라보면 무얼 하겠는가. 몸을 일으켜 동쪽을 바라보아야 여명을 맞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씨 뿌리는 자로 부르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이 부름에 응답하여 살아가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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